1장

스승 김억과의 만남

 

 

5

 

“그 학생 시를 보고는 제 가슴 속으로 상쾌한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갔더랬습니다. 순진무구한 감정을 아름다운 시로 표현하는 뛰어난 재능을 지닌 학생입니다. 앞으로 우리 학생 중에서 놀랄 만한 시인이 탄생할 가능성이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더랬습니다.”

김억이 교무실의 교장 책상 앞에 서서 조만식(古堂 曺睌植) 교장에게 말했다. 마침 그때 정식은 교무실에 막 들어오던 중이었다. 나가지도 못하고 들어가지도 못한 채 출입문 옆에 있는 서가 뒤에 멈춰 섰다. 김억이 압수해 간 노트를 찾으러 왔는데, 김억과 조만식은 정식이 들어온 줄을 몰랐다. 교무실에는 선생님들 몇몇이 서로 바라보고 앉아서 잡담을 나누고 있을 뿐 누구도 서가 뒤의 정식을 주목하지는 않았다.

“허허, 그렇소이까? 대체 누구이오이까?”

“이걸 보십시오.”

조만식이 노트를 받아들었다. 접혀진 부분을 펴서 작은 목소리로 읽었다.

그리운 우리 님의 밝은 노래는

언제나 제 가슴에 젖어 있어요.

 

긴 날을 문 밖에서 서서 들어도

그리운 우리 님의 고운 노래는

해지고 저물도록 귀에 들려요.

밤 들고 잠 들도록 귀에 들려요.

 

- ‘님의 노래’ 일부

들리는 몇 개의 낱말만으로도 정식은 그것이 어떤 시인지 알았다. 김억은 이번에는 등짝을 주무르고 있었다. 조금 전 배찬경의 할아버지로부터 맞은 자리일 터였다.

“김정식 군의 시군요. 과연 시재(詩才)가 출중하오이다. 김정식 군 별호가 만점인 건 알지요? 제식훈련을 빼고는 모든 교과목에서 다 만점을 맞았단 말이외다. 군내 주산대회에서도 일등을 했지 않소이까. 선생님들마다 영민한 학생이라고 칭찬이 대단하더니 시까지 이렇게 잘 지을 줄은 몰랐소이다.”

“처녀를 연모하는 감정을 시로 옮겼나 봅니다. 연애가 학업에 지장을 줄 것 같아서 칭찬을 앞세우진 못했댔습니다.”

“우리 학교 출신인데다 우리나라 신시 운동의 선구자이신 안서 선생님이 지도해주신다면 장차 대성이 약속된 거나 진배없겠소이다. 아, 그런데…….”

“말씀하십시오.”

“안서 선생님 부인이 김정식 군의 육촌누이가 된다고 했지요?”

김억은 정식의 마을 남단동에서 20여 리 떨어진 곽산 관삼동 태생이었다. 정식은 오산학교 입학 전까지는 김억이 육촌누이의 남편인지 알지 못했다. 육촌누이가 정식을 김억의 집에 초대한다는 말을 전해 와서야 알았다. 적당한 때를 잡지 못해 초대에는 아직 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맞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사돈 사이입니다.”

“아무래도 김정식 군이 걱정이 되오이다. 우리 조선민족의 간성으로 자라야 할 학생인데, 여자에 빠져 있다면 아니 되지요. 일찍 혼인하는 민족의 풍습이 차차 고쳐져야 하리라고 봅니다만.”

“저도 걱정이 됩니다. 사돈 사이라고 해도 다감한 마음을 표한 적은 아직 없었더랬습니다. 다른 학생들과 차별 두지 않고 엄격히 가르치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아니, 차별하는 게 낫겠소이다. 영민한 학생이니 안서 선생님의 각별한 지도가 필요하겠소이다. 그런데 등을 왜 자꾸 주무르시오이까? 어디 불편하시오이까?”

“아, 아닙니다.”

“주무르실 때마다 낯빛이 영 안 돼 보이오이다.”

정식은 이쯤에서 슬그머니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자신의 재능에 대해서 칭찬할 때에는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되어 자긍심이 일었다. 그저 시가 좋아서 써 봤을 뿐이었다.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시인이 소망이 되어야 할까? 하지만 자신을 탓하는 대목으로 옮겨가자 민망하고 답답해서 더는 듣고 있을 수 없었다.

정식의 장래에 대해서 할아버지는 정식과 전혀 다른 소망을 품고 있었다. 얼마 전 정주 금융조합에서 주최한 군내 주산대회 이후부터는 그 소망이 완고해졌다. 정식은 오산학교 대표에 끼어 대회에 참가했다. 주산은 입학 이후 학교에서 일주일에 한 시간 되나마나 한 수업을 받았을 뿐 따로 학습 받은 적이 없었다. 손가락을 놀리는 것이 잽싸지 못했다. 다만 암산만은 지극히 민첩했다. 숫자를 대하면 머릿속에서 주판알이 먼저 튕겨졌다. 덕분에 오산학교 대표 중 혼자서 대회 예선을 통과했다. 이어서 금융조합 직원 두 명과 순사주재소의 일본인 순사, 정식이 준결승전을 치렀다. 여기서도 뜻밖에 정식이 두각을 나타내 일본인 순사와 함께 결승에 올랐다. 승기는 그치지 않았다. 결승전에서는 마침내 일등을 거머쥐었다. 이 일로 할아버지는 크게 기뻐했다. 애초부터 정식이 상업계통에서 성공하기를 바라며 상급학교로 보냈다. 할아버지의 어머니, 즉 정식의 증조할머니는 젊어서 남편을 여의고 옷감장사를 하는 등 억척같이 일해 기울어진 가세를 일으켜 세웠다. 증조할머니의 기질을 본받은 할아버지는 상업과 결부시켜 개화문명을 받아들였다. 정식이 일등을 하자, 정식의 재능이 자신이 바라던 바와 맞아떨어졌다고 믿은 것이다. 정식의 상업계통 진출이 할아버지의 부동의 희망으로 고착되었다. 그런데 시인이라니. 순이 누이에게 품은 연정이 공부에 방해가 된다니. 과연 공부란 무엇일까? 세상을 살아가는 경제적 수단? 점잖은 선비 노릇을 하는 방편? 과연 사랑을 빼놓고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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