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국내 대표 해운업체 무너져
경영진 방만 경영, 정부 정책실패가 원인
해운 호황기 찾아왔으나 선복량 회복 아직

국내 최고 최대 선사로 명성을 떨쳤으나 방문경영, 정책실패 이중고로 무너진 한진해운 <사진=한진해운>
국내 최고 최대 선사로 명성을 떨쳤으나 방문경영, 정책실패 이중고로 무너진 한진해운 <사진=한진해운>

[현대경제신문 김영 기자] 2020년 2분기 HMM은 20분기 연속 적자를 마무리했다. 지난해에는 7조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기록했고, 올해 또한 전년 못지않은 호실적이 기대된다. HMM의 기적적인 실적 반등은 2017년 2월 내려진 한진해운 파산 결정이 얼마나 성급하고 어리석은 선택이었는지를 상기시켜 주고 있다. 한진해운 파산 5년을 맞아 그날 어떤 일이 있었고 그로 인해 우리 해운업에 어떤 씻지 못할 상처가 남았는지 미래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이를 되새겨 보는 시간을 가져봤다.

2017년 2월 2일 대한민국 국적선사 중 한 곳이자 선복량 기준 국내 1위이자 세계 6위였던 한진해운이 파산절차에 돌입, 보름 뒤인 17일 파산했다.

해운업은 호황과 불황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업종으로 그 과정에서 기업 간 인수합병이 빈번하게 발생하나, 한진해운 정도되는 해운사가 파산하는 경우는 글로벌 해운사(史)에서도 보기 드문 케이스에 해당한다.

해운사 파산에 따른 화주 피해와 물류난 발생은 물론 국가 신인도 하락까지 그에 따른 파장이 적지 않다 보니, 우선 살리고 난 뒤 기업합병 등의 절차가 진행되는 게 일반적인 절차였음에도 한진해운은 문을 닫아야 했다.

한진해운 파산을 지금은 상관없는 과거 사건으로 치부하기도 어렵다. 아직도 국내 해운업 전반에 걸쳐 당시 사건의 여파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한진해운 대표 취임 후 경영권 방어에 있어선 선방했으나 회사 리스크관리는 실패했다 지적 받은 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 <사진=연합>
2008년 한진해운 대표 취임 후 경영권 방어에 있어선 선방했으나 회사 리스크관리는 실패했다 지적 받은 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 <사진=연합>

국내 최고·최대 해운사의 몰락

한진해운은 대한선주가 1987년 한진그룹에 매각된 후 같은 그룹 해운 계열사인 (구)한진해운과 합병해 설립된 회사다. 대한선주는 해방 직후인 1949년 설립된 국영기업 대한해운공사가 전신으로, 한-일간 국제 정기항로를 최초 운항했고 국내 최초 증시에 상장된 기업 중 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전성기 시절 한진해운은 한국을 넘어 아시아를 대표하는 해운사로 명성을 날렸다.

1992년 일본 오사카에 전용터미널을 개장했으며, 이듬해엔 미주 전지역 내륙화물 무서류 자동통관절차 전산화를 구축했다. 1995년에는 아시아 최초로 멤브레인형 LNG선을 취항했고, 거양해운과 독일 DSR-세나토를 인수하는 등 공격적 경영을 이어갔다.

한진해운 위기는 2006년 고(故) 조수호 회장이 사망하고 2008년 그의 아내인 최은영 회장이 대표로 취임하며 본격화됐다.

취임과 함께 경영권 위기에 시달렸던 최은영 회장은 거양해운과 합병 및 그룹의 지주사 체제로 전환 등을 통해 경영권 안정화에는 나름 성과를 거뒀으나, 해운업 시황을 잘못 판단하는 등 리스크관리에는 실패했다.

최 회장은 업황이 호조를 보이자 대규모 선박을 잇달아 매입하며 사세 확장에 나섰다가 불황이 찾아오자 이를 감당 못 하고 알짜 자산매각을 차례로 매각했다. 또다시 찾아온 호황기에는 장기 용선 계약을 다수 체결했고 뒤이은 글로벌 경기 침체로 직격탄을 맞았다.

한진해운 몰락에는 외부 요인도 한몫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여파로 글로벌 물동량이 급감하자 해운업 전체가 장기 불황에 빠졌다. 물동량이 줄자 머스크와 MCM으로 대표되는 글로벌 대형선사들은 보유하고 있던 1만8000TEU급 초대형 컨테이너선을 통해 대대적인 저가 수주에 나섰고 한진해운을 비롯한 국내 선사들은 이들과의 치킨게임에서 큰 손실을 봤다.

한진해운 경영정상화를 시도했으나 최순실과 갈등 속 회사 파산을 지켜봐야 했던 고 조영호 전 한진그룹 회장. <사진=한진>
한진해운 경영정상화를 시도했으나 최순실과 갈등 속 회사 파산을 지켜봐야 했던 고 조영호 전 한진그룹 회장. <사진=한진>

정부 외면과 정책실패

해운업 전반에 걸친 위험 신호가 계속되던 가운데 2013년 재계에는 한진해운 법정관리 가능성에 대한 전망이 스멀스멀 제기됐다.

그 당시 정부는 머스크가 대우조선해양에 1만 8000TEU급 초대형 컨테이너선을 발주하자 1조원 규모 수출금융을 지원했음에도, 한진해운에 대해선 금융채 발행에 그치는 등 불을 끄기보다 위기를 부추겼다.

결국 한진해운 경영권은 최은영 회장 손을 떠나 한진그룹으로 돌아갔고 고(故) 조양호 한진 회장은 회사 정상화를 위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이에 한진해운은 흑자전환에 성공하며 회생 가능성을 잠시 보이기도 했으나, 해운업 전반에 걸친 유동성 위기 장기화 여파를 버티지 못했고 경영권은 채권단에 넘어갔다.

그리고 정부는 한진해운과 함께 채권단 관리를 받게 된 현대상선 중 규모가 더 크고 글로벌 물류 네트워크도 잘 갖춰져 있어 생존 가능성 크다 평가 받던 한진해운 대신 현대상선을 살리는 이해 못 할 결정을 내렸다.

또한 당시 부산시는 부산항을 거점항으로 사용하는 한진해운을 살리기 위해 부산항만공사 등과 함께 기업 인수를 시도했으나 이 또한 정부 반대로 무산됐다.

이후 조양호 회장과 박근혜 정부 비선실세였던 최순실의 관계 악화가 한진해운 파산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고, 세간에선 회사 경영진의 방만 경영에 대한 지적을 넘어 권력 눈치만 보며 내려진 정부의 허술한 정책에 비난이 쏟아졌다.

한진해운 파산 반사이익에 따른 수혜가 예상됐으나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HMM(구 현대상선) <사진=HMM>
한진해운 파산 반사이익에 따른 수혜가 예상됐으나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HMM(구 현대상선) <사진=HMM>

한진해운 파산이 남긴 것

한진해운 파산과 함께 부산항 컨테이너 환적물량이 급감했고 국내 기업 중심 물류대난이 찾아왔다.

한진해운 점유 물동량 대부분과 1억 TEU 이상 초대형 컨테이너선 및 핵심 인재 상당수는 머스크 등 해외 선사로 넘어갔다.

한진해운이 운항하던 미주노선 일부를 물려받아 사실상 그 후신으로 평가받는 SM상선의 경우 초대형 선박은 확보하지 못했고 6500TEU와 8000TEU 등 일부 선박만 인수할 수 있었다.

한진해운 파산 당시 산업은행 관계자를 비롯해 정부에서는 채권단 관리하에 있던 현대상선이 한진해운 물동량 확보 등 반사이익을 받게 될 것이라 기대했으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무엇보다 한국 해운업에 대한 국제 신인도가 한진해운 파산으로 급락, 화주들의 한국 해운사 보이콧이 발생했다.

한진해운 파산은 글로벌 해운시장에도 영향을 줬다.

일본에선 대형 해운사 3사가 컨테이너 부문 합병을 발표했고, 대만은 한진해운 사태를 거울삼아 자국 해운사에 대한 2조 2000억원 규모 지원을 결정했다. 2014년부터 정부 차원의 해운업 구조조정을 진행하며 규모의 경제를 시도했던 중국은 한진해운 파산에 다른 최대 수혜국으로 거론되고 있다.

한진해운 파산 여파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2019년 하반기부터 글로벌 물동량 증가 및 운임상승 등에 따라 해운업이 다시금 호황기를 맡고 있으나, HMM을 비롯한 국내 선사들의 선복량은 한진해운 부재 여파를 메꾸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수출에 집중하는 국내 업체들의 물류비용 부담 증가로 이어지는 형국이다.

5년 전 잘못된 결정이 해운업 부흥이란 기회의 시기, 이를 가로 막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 해운업계 관계자는 “한진해운 파산을 막기 위해 필요했던 자금은 대략 4000억원 정도였는데, 이후 HMM 등 해운사 회생에만 수조원 투입됐고 이게 끝도 아닌 상황이다”며 “회사가 방만 경영으로 위기에 빠진 것은 사실이나, 파산보다는 경영권 회수가 나은 선택이었을 것”이라 지적했다.

이어 “운임료 급등 시기 국적선사 부재에 따른 국내사들의 부담이 상당하다”고 강조하며 “한진해운 사태 재발 방지를 위해선 기복이 심한 해운업 업황에 대응할 수 있는 정부 차원의 컨트롤타워가 상시 운영돼야 하며, 무엇보다 정부 정책 결정에 있어 전과 같은 실수가 반복돼선 안 될 것이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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