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거미줄과 잠자리 5 정식은 오순의 젖무덤에 얼굴을 묻었다. 오순의 몸에서 지금까지 맡아 본 적이 없는 향긋한 냄새가 났다. 냄새의 근원을 찾아 정식은 자꾸 얼굴을 더 깊이 묻었다. 그러다가는 오순의 속옷 속을 더듬었다. 오순은 전혀 저항하지 않았다. 되레 그동안 가장 금기시했을 법한 은밀한 곳으로 정식의 손을 이끌었다. 백사장처럼 부드러운 평원에 이르렀다. 오순이 이끄는 최종 목적지가 어딘지 정식은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오순의 손이 이끌지 않아도 정식의 손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다보독한 숲과 만났다. 숲에서 일어나는 여러 이야
2장거미줄과 잠자리 3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졌다. 새 계절에 자리를 내주는 것이 못마땅한 듯 교정의 나무들 속에서 매미들이 그악스레 울었다.“아까 읍내 행사에 참석해서 제군들이 잘 알겠지만, 오늘이 이른바 천장절(天長節)이외다. 일본 천황이란 자의 생일이란 말이외다.”연단에 오른 교장 조만식이 교정에 도열한 학생들에게 훈화를 했다. 연단 밑에는 찹쌀떡이 든 나무상자가 너덧 개 쌓여 있었다.“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국치일이 바로 그제이외다. 우리나라가 죽은 거나 다름없고 우리나라 백성이 모두 상중(喪中)인 거나 다름없소이다. 어찌 슬프
2장거미줄과 잠자리1붉고 큰 해가 신미도 삼각산 너머로 사라지는 중이었다. 노을이 지상과 하늘의 경계를 짙게 물들였다. 옥녀봉 냉천터 부근 바위에 앉은 정식이 피리를 불었다. 오순이 옆에 앉아 피리 음률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정식의 시에 오순이 세간에 흘러 다니는 노래를 나름으로 변조한 곡을 붙였다. 오순은 목청이 고와 남산학교 시절 여러 차례 학예회에 뽑혀 나갔다. 그것이 학교에서 노래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스스로도 그때부터 노래에 자부심을 갖는 듯했다. 잊힐 듯이 볼 듯이 늘 보던 듯이그립기도 그리운 참말 그리
1장스승 김억과의 만남 5 “그 학생 시를 보고는 제 가슴 속으로 상쾌한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갔더랬습니다. 순진무구한 감정을 아름다운 시로 표현하는 뛰어난 재능을 지닌 학생입니다. 앞으로 우리 학생 중에서 놀랄 만한 시인이 탄생할 가능성이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더랬습니다.”김억이 교무실의 교장 책상 앞에 서서 조만식(古堂 曺睌植) 교장에게 말했다. 마침 그때 정식은 교무실에 막 들어오던 중이었다. 나가지도 못하고 들어가지도 못한 채 출입문 옆에 있는 서가 뒤에 멈춰 섰다. 김억이 압수해 간 노트를 찾으러 왔는데, 김
1장스승 김억과의 만남31915년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나팔소리가 요란하게 빈 하늘을 갈랐다. 북소리가 꽝꽝 뒤를 이었다. 침묵이 깨지면서 교정에 활기가 돌았다. 흰 저고리와 검정 바지를 입고 팔을 번쩍번쩍 치켜드는 학생들의 대열이 교사 전면에 도열한 선생님들 앞을 지나가기 시작했다. 악대는 대열의 맨 앞에 서서 힘차게 서양식 행진곡을 연주했다.정식은 배찬경과 한 줄에 섰다. 사열대 앞을 지나간 행렬이 선생들로부터 점차 멀어졌다.“이 짓을 왜 하지? 왜놈들이 식민 지배를 고착시키려고 하는 수작에 우리가 놀아나는 거라고.”배찬경이 투
1장스승 김억과의 만남 2 안채를 가운데 두고 양 옆에 사랑채와 헛청채를 거느린 디귿(ㄷ)자 형 집의 마당 위에 파란 하늘이 펼쳐졌다. 대문 옆 가죽나무의 앙상한 가지 위에서 까치 서너 마리가 깡충깡충 뛰어다녔다. 정식에게 기쁜 일이 닥친 것을 아는 모양이었다. 큰 가방을 들고 마당 가운데에 선 정식의 앞자락 위로 늘어진 털목도리를 어머니가 추슬러 주었다.“네 애비 경우를 봐서라도 행동거지를 각별히 조심하거라.”정식이 작별인사를 하자 할아버지가 당부했다. 정식을 전송하러 나온 할머니와 어머니, 첫째 작은어머니 모두 제발 할아버지 말
1장스승 김억과의 만남 1 1915년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남단동연초록 산록 구석구석에 진달래꽃이 만발했다. 겨우내 인고의 세월을 견디던 진달래가 사라졌던 것이 결코 아니었다고 함성을 지르는 듯했다. 소년 정식은 석양에 타오르는 꽃들을 바라보며 남산 옥녀봉에 올랐다. 마을사람들이 냉천터라 부르는 폭포가 저만큼 보였다.“아악, 악!”젊은 남자의 절규가 아스라이 들렸다. 정식은 소리에 이끌려 그만 산 그림자에 묻힌 아랫마을을 돌아보았다. 소란을 예감하고 소란을 피해서 산으로 온 처지였다. 차츰 부옇게 밝아오는 자신의 집이 마을 가운데에
장편소설 ‘국경’, ‘압록강블루’와 단편소설집 ‘그 여름의 두만강’을 집필한 이정 작가가 국민애송시로 널리 알려진 소월의 시를 소설로 재해석했다. 김영삼 시인의 소월 정전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보탰다. 애송시 대부분의 주제가 되는 그리움에 초점을 맞춰 그 재미를 더했다. [편집자주]◆ 작가의 말재작년 여름 영화 일을 하는 지명혁 교수로부터 소월의 삶을 소제로 하는 영화 시나리오를 부탁받았다. 기억 속에 막연히 걸려 있던 소월을 구체적으로 탐색하기 시작했다. 민족의 보편적 정서를 노래해 국민 애송시로 널리 알려진 소월의 시가 한둘이 아
#68. 장자의 검술 아무리 공평무사한 사람이라도 자신이나 자기 가족과 관련된 일을 냉정하게 잘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아무리 공정하게 한다 해도 어느 정도는 과장하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겸손하여 스스로 깎아내리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장자도 말하기를 친아버지는 자기 아들의 중매를 설 수 없다(親父不爲其子媒) 하였다. 장자의 아들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장자 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아무래도 자기 입으로 자랑하기는 민망할 터이니, 내가 아는 장자의 검술실력을 잠깐, (장자가 분주한 틈을 타서 우리끼리 얘기로) 귀띔해
#67, 걱정과 비판 담당관 (5) 왕은 마침내 걱정과 비판 담당관을 해고하기로 결심했다.종일 백 마디 칭송을 듣다가 듣는 한두 마디 듣는 걱정은 말 같지도 않게 들렸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찾아온 걱정과 비판 담당관에게 왕은 말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좋다고 하는데 그대는 혼자서 만사에 걱정인가. 그대의 정신상태가 이상해진 것 아닌가 걱정되니 일을 그만두고 집에 돌아가라. 그대는 너무 지친 것 같다. 그리고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 걱정과 비판 담당관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말했다. “왕이시여. 전하
#66. 걱정과 비판 담당관 (1)두 사람의 젊은 선비가 똑같이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치러진 초시(初試)에서 가장 우수한 사람들만을 골라 왕 앞에서 두 번째 시험인 전시(殿試)가 치러졌는데, 여기에서 장원을 다툰 두 사람이 추밀원의 낭사(郎舍)로 특별 채용되었던 것이다.두 사람에게는 전에 없던 중대한 직책이 맡겨졌다. 그들은 매일 아침 왕의 조회 때마다 직접 참석하여 왕의 언행이나 명령, 통치 전반에 대한 간쟁을 하도록 특별한 지시를 받았다. 고대의 경전과 역사, 문학에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왕을 깨우쳐 국정이 어느 한
#65. ‘인간 같은 놈들’ - 이른 아침 여기로 오는 길이었네.- 부지런도 하십니다. - 그런데 새들이 유난히 짖어대더군. - 그래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 잠깐 귀를 기울였지. 제 놈들끼리 다툼을 벌이고 있었어. - 아! 영역다툼이라도 벌어졌던 모양이군요. 발정기가 되어 경쟁이 붙었거나.- 그런데 녀석들이 서로 다투면서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인간처럼 뻔뻔한 놈들’- 예? 인간 같다고요? - 그렇지. 새들도 욕을 할 때는 다른 동물을 빗대서 하더라고. 마치 사람들끼리 다툴 때 ‘개같이 더러운 놈들’이라고 하듯이 말이야.
#64. 팔둠의 전설 - 헤르만 헤세가 동화를 썼더군요. - 하하하. 헤세의 동화는 유명하지 않은가? 그가 쓴 최초의 작품은 10살 때 지은 ‘두 형제’라는 동화였네. 그의 노년, 70대에 그의 모든 작품들이 출판될 때 이 이야기도 포함되었지. - 아, 그랬나요? 유명 작가들이 동화를 몇 편씩은 다 쓰는 것 같아요. - 그럴만하지. 모든 진리는 비유로 말해지는 법. 무엇에 빗대지 않고 어떻게 한 부분이라도 제대로 표현할 수 있겠나. 작가들은 자신이 진리라고 믿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인용이나 비유를 즐겨 사용하지. - 그렇군요. 장자
#63. 코끼리의 최후 - 대동소이(大同小異)라는 말이 있네. - 크나 작으나 별 차이 없다는 말이 아닌가요?- 크게 보면 같고 작게 보면 다르다는 말이지.혜시(惠施)가 말했다네. 만물은 금방 생겨났다가 금방 죽는다. 큰 견지에서 보면 모두 같은 것이다. 그러나 작은 견지에서 보면 모두가 다르다. 대동이여소동이(大同而與小同異). 그래서 만물은 모두가 같다고도 할 수 있고, 모두 다르다고도 할 수 있다. - 장자님은 혜시의 말이 허황되다고 비판한 것으로 압니다만. - 그랬지. 이것이 말장난으로 흘러서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지만 그
#62. 특이점을 넘어선 인간 - 그런데, 무슨 일로 오늘은 이렇게 직접 내려오신 겁니까? 만나서 해야 할 이야기라도? - 그저 바람 좀 쏘일 겸 내려왔다네. 오랜만에 이승 구경도 좀 하고 말이야. - 뭔가 좀 심상치 않은 느낌이 오는데요. - 하하하.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네. - 아니에요. 내가 아는데 말이죠. 예를 들어 어느 나라에서 대통령 선거가 있다거나 큰 정치/사회적 중대사가 터지면 세계 각국의 첩보원들이 몰려들죠. - 그래서? - 지금 지구상에 뭔가 큰 일이 진행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장자 어른께서 직접 납신걸 보면,
#61 브레인 샤워 어허, 하늘이 맑구나. 이런 날은 햇빛을 허비하지 말고 밖으로 나오게.밖으로요?그래. 이런 하늘이 얼마만인가. 나오라구.어디로요?햇볕 좋은 곳으로 나와. 방구석에 앉아서 자판이나 두들길 게 아니라 밖에서 보자구. 그, 자주 가는 공원이 있지 않나? 햇볕 잘 들고 바람 잘 부는…아, 거기요? 좋아요. 그러면 잠깐 준비를 좀준비는 제기럴… 아무도 볼 사람 없으니 그냥 그대로 나오게나. 이리하여 햇빛 좋고 공기 맑은 어느날, 모년 모월 모시에 나는 모모한 장소에서 드디어 장자 어르신을 뵙게 되
#60. 진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않아. - 한국 정치가 아주 시끄럽지요? - 의견이 다른 것을 잘 참지 못하는 성격이 강해. 반드시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어 하니까 말이 많아지는 거지. - 그것도 좀 심하지 않은가요? - 한국 사람들이 열정이 좀 강한 편이긴 하지. 오죽하면 옛날 기록에도 노래하고 춤추는 걸 좋아한다 했겠나. 하지만 한국 사람들만 그런 것은 아니야. 이탈리아 사람들은 또 어떻구. 태양의 정기를 받은 스페인, 라틴 사람들의 열정도 그렇지. 거기도 조용한 날이 없어. 삼바 축제 같은 건 오히려 한국사람들이 따라오기도
#59. 천국은 있던가요, 테스형 - 지난 추석명절엔 하늘에서도 한바탕 웃을 일이 있었지. - 웃었다고요? 잊어버릴 뻔했습니다. 웃는다는 것. - 웃음이야말로 살아있다는 징표지. 죽어가면서 웃는 사람 본 적 있나? 웃음을 잃으면 죽는 거야. 개도, 사람도, 사회도. - 웃음이 있어야 하는군요. - 그렇지. 살판 날 때 웃는 거지, 기울어가는 사람은 제일 먼저 얼굴에서 웃음기부터 사라지지 않던가. - 웃음기가 생기(生氣)로군요. - 그렇다네. 웃음을 잃지 말게. - 웃을 일이 없으면요. - 웃을 일을 만들어야지. ‘웃음이 생명이다’
#58. 균형과 조화를 위한 실행자회의 (2)- 분명히 말해주지. 천상의 ‘우주의 균황과 조화를 위한 실행자회의’가 지구에 대해 가지고 있는 큰 기조는, 인간의 지성발달을 촉진하여 지구나 인류가 파괴되는 것을 평화로운 방법으로 막아보자는 것이야.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지. 그러는 사이에 인간들 스스로가 경쟁의 갑갑함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준동하면서 죽고 죽이는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거든. 그걸 굳이 뜯어말리지 않고 방관하는 면이 있다는 게 솔직한 얘기야. 이런 태도에는 여러 가지 의도가 있다네. - 인간들이 스스로 만드
#57. 균형과 조화를 위한 실행자회의 (1) - 이 바이러스의 정체를 궁금해 했으니 오늘은 그 얘길 해주겠네.먼저 말을 걸어온 莊子의 표정이 진지했다. - 아, 드디어? 정말 궁금했습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악성 바이러스의 정체. 이건 미국이 만든 건가요 중국이 만든 건가요? 부터 해서...- 누구 손에서 만들어졌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하늘에서 이런 게 필요하다 하면 지상의 누군가는 만들게 마련이니까. 중요한 건, 인간 세상에 이런 바이러스와 같은 것이 퍼질만한 때가 되었다는 사실이지.- 필요성이라도 있었다는 얘긴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