晉 문공 중이(1)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人生安樂 孰知其他 인생안락 숙지기타
인생이 안락한데 누가 다른 생각을 하겠는가 (晉本紀)
공자 중이가 대업을 위해 떠나라는 부인의 말을 거절하며

구사일생으로 돌아간 당진(晉)의 혜공이 이후 정치와 교화를 밝게 닦았다고 기록된 바는 있지만, 얼마나 새 사람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태자인 아들 어(圄)를 섬진(秦)에 인질로 보내고 다시는 진을 침범하지 않은 것도 근신이라면 근신이다. 그러나 자신의 배은망덕한 행위를 만류했던 충신 경정을 처형했으며, 외국으로 떠돌며 잠재적 위협이 되고 있던 이복형 중이(重耳)를 죽이려고 자객을 보낸 것을 보면 역시 본질이 바뀌지는 않은 듯하다.

당진의 공자 중이는 일찍이 아버지 헌공이 늘그막에 태자를 죽이고 후처의 어린 아들을 태자로 세울 때 다른 형제들과 함께 달아나 외국을 떠돈 망명객이다. 역사에 정치적인 유랑객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 이오만큼 드라마틱하게 유랑하고 또 화려하게 복귀한 인물은 드물다. 나이 60을 넘어 제후 자리에 올랐음에도 이후 10년이나 권좌를 지키면서 춘추 5패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남긴다. 그의 유랑시절을 살펴보자.

중이는 어릴 적부터 생각이 깊고 학문을 좋아했다. 17세에 이미 다섯 명의 현사들이 그를 따랐다고 한다. 아버지 헌공이 즉위할 때 중이의 나이는 이미 21세였다. 헌공이 여인의 꾀에 빠져 공자들을 죽이려고 한 것은 그로부터 22년 후였다. 추격해온 환관에게 옷소매를 베이면서 달아나 현사들과 함께 외가인 적(狄)나라에 도착했을 때는 43세였다. 다섯 명의 현사를 비롯하여 수십 명의 추종자들이 그를 호위했다. 5년 뒤 헌공이 죽자 본국의 대부들이 후비의 자식들을 제거하고 이오를 옹립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으나 이오는 사양하였다. 원수나 다름없는 아버지였지만, 그 아버지의 자식들이 죽었는데 돌아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중이의 양보 덕에 제후가 된 이복형제 이오는 탐욕스런 사람이라 굳이 중이를 죽여 잠재적 위협을 없애려고 자객들을 파견했던 것이다. 중이는 적나라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적나라는 소국이어서 대국인 진의 위협으로부터 그를 지켜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이는 제(齊)나라를 목적지로 정했다. 주나라 천하에서 가장 강하고 덕망도 높은 환공이 다스릴 때였기 때문이다. 중이가 제나라로 출발할 때 나이 어린 처에게 말했다. “앞으로 어떤 곤란이 닥칠지, 또는 행운이 올지는 알 수가 없소. 앞으로 25년을 기다려도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마음대로 재가하시오.” 중이가 적에 머무른 지 12년째였으니 그의 나이 이미 55세였다. 중이의 아내는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25년 뒤면 내가 이미 죽어 무덤가에 심은 측백나무도 한창 자라있을 것입니다.”

중이가 위(衛)나라를 지나갔다. 위 문공은 그에게 예를 갖춰 접대하지 않았다. 그대로 지나쳐 어느 시골을 지나가다가 시골 사람에게 밥을 구걸하였는데, 시골사람은 그릇 밑에 진흙을 숨기고 밥을 담아서 주었다. 중이가 화를 내자 수하인 조최(趙衰)가 만류하며 말했다. “진흙은 토지를 의미합니다. 주군께 땅이 돌아감을 상징하는 것이니 오히려 그에게 절을 하고 받으셔야 합니다.” 조최는 진나라로부터 중이를 따라갔던 현인이다. 적나라에 있을 때 중이와 함께 족장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동서지간이다. 후일 삼진(三晋)의 하나인 조(趙)나라의 시조가 된다.

제나라에 도착하자 환공은 융숭하면서도 엄중한 예의를 갖춰 중이를 맞이했다. 공족의 여자를 시집보내고 20승의 말을 보내주어 편안히 머물게 하였다. <춘추좌전>에는 이 여자가 환공의 딸이었으며 선사한 말은 80승이나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중이는 자기 나라는 아닐지언정 안전한 곳에서 제후다운 품격을 유지하며 안락한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이야기 PLUS
비록 안정된 생활을 얻기는 하였으나, 제나라가 최종 목적지가 될 수는 없었다. 중이는 제나라에 5년을 머물렀다. 그를 환대했던 제환공은 중이가 안착한지 2년째에 죽었고, 제나라 역시 역아 수조 개방 등 간신 3인방이 권력을 휘둘러 내정이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중이의 현사들은 본국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으나 만사가 편안해진 중이는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참모인 조최와 구범이 뽕나무 아래서 이를 걱정하며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고 있었다. 구범은 중이의 외삼촌이다. 마침 여종 하나가 뽕잎을 따러와 나무 위에 올라가 있다가 미처 피하지 못한 채 엿듣고 말았다. 여종은 부인 강씨에게 달려가 들은대로 일러바쳤다. 그러자 부인은 (남편의 안전을 위하여) 여종을 죽여버리고는 중이에게 급히 움직일 것을 권했다. 그러나 중이는 거절했다. “사람이 태어나 안락하면 됐지, 다른 일을 더 벌일 필요가 있겠소. 더구나 내 나이 이미 60이니 당신과 함께 여기서 편히 여행을 보내다가 죽으려오.” 강씨는 중이를 힐난했다. “당신은 일국의 공자로서 사정이 곤궁하여 여기까지 왔습니다. 저 현사들은 당신 한 사람에게 생명을 맡기고 있고 본국에서 기다리는 백성들도 있는데, 마땅히 환국하여 저들의 노고와 기다림에 보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저 여색에 마음을 두고 눌러앉으려 하시니 소첩이 당신을 대신하여 부끄럽습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남자고, 그 남자를 지배하는 것이 여자라 했던가. 종종 위인은 현명한 여자에 의해 만들어진다. 물론 쓸 만한 남자가 째째해지는 것도 여자 탓일 때가 많다.

“25년을 기다려도 내가 돌아오지 않거든 재가해도 좋소.”
중이의 말에 부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 세월이면 내 무덤가에 심은 나무가 자라
거목이 돼있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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