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분노의 단계

 
 

#56. 분노의 단계       

- 지난번에 ‘분노의 단계’가 온다고 했던가? 과연 원망과 분노가 가득한 세상이 된 것 같네. 서민들은 부자들에게 분노를 드러내고, 시민들은 국가와 정부를 원망하며, 약소국은 강대국에 적개심을 나타내고, 강대국은 이를 응징한답시고 더욱 강하게 약소국을 짓밟으려 하네. 이것이 바로 ‘분노현상’이겠나? 
- 원망과 분노는 사실 인류사회에서 오랫동안 반복되고 있는 전통적인 패러다임 같은 것이죠. 어쩌면 인류의 속성 자체가 아닐까요. 불만이 있어 공격하고, 공격에 의해 달라지고, 그러면서 역사가 진화되어온 셈이니까요. 불만이 역사의 동력이었죠. 그런데 죽을병이 드러났을 때 ‘현실부정’에 이어 일어나는 ‘분노의 현상’이라는 건 좀 다른 차원이 있는 것 같아요. 
- 다른 차원이라? 
- 어떤 일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되는 분노는 대상이 명확하죠. 누구에 의해 피해를 입었을 때, 가해자에 대한 피해자의 분노. 이것은 가해자에게 처벌을 하고 피해자에게 배상이 이루어지면 어느 정도 해소가 돼요. 즉 해결할 답이 있는 분노 같은 것이죠. 
- 답이 있는 분노. 그러면 지금은? 답이 없는 분노라는 말인가? 
- 다분히 그런 측면이 있지요. 원인부터가 모호하니까요. 실제로 화를 내야 하는 대상은 암인데, “왜 하필이면 나에게 오는 거야? 내가 무슨 잘못을 했어?”하고 화를 내야 하는데, 암에게 화를 내봤자 그건 아무런 분풀이가 안 되잖아요. 운명에게 화를 내도 그렇고. 그러니 다른 이것저것에 화를 내는 거죠. 이길 수 없는 사람에게 얻어맞고 돌아갈 때 길에서 마주치는 애먼 강아지나 하다못해 깡통이라도 걷어차듯이.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불쾌한 일이 있으면 과도하게 분풀이를 한달까요. 
- 그런 방법으로 화가 풀릴까? 조금은 해소가 될 지도 모르지.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해답 없는 분노. 그 말이 맞겠네. 
- 코로나 때문에 답답해졌지만, 코로나에게 화를 낼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 코로나와 사우는 방역당국에도 화를 내고, 경제가 부진한 책임을 정부에 항의하고, 코로나가 시작된 중국에 원한을 품고, 지구파괴를 주도한 선진국들을 미워하게 되죠. 그 뿐인가요. 일상에서도 답답한 일이 많아요. 이 코로나 때문에 장사도 안 돼, 학교도 못가, 놀러도 못가, 회사에서는 쉬라고 해, 결혼식도 제대로 못하고 돌잔치도 제대로 못하고, 회갑 칠순 잔치는 말할 것도 없고, 회식도 못해, 법회나 교회 예배도 마음대로 못해…. 
- 자유를 잃었군. 답답하겠구나. 
- 그러니까 이건 개개인이 마치 중병에 걸려 입원실에 갇힌 거나 비슷해요. 무엇보다 장사가 안 되니 경제적인 어려움이 생기고 노인이나 젊은이들도 욕구불만이 생기죠. 스트레스를 해소할 길도 막연해요. 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가 있나, 조기축구를 자유롭게 할 수가 있나, 프로야구나 축구 경기장에 갈 수가 있나, 노래방이라도 가서 자유롭게 소리를 지를 수가 있나. 클럽에 가서 춤을 출 수 있나, 파티를 마음 놓고 할 수가 있나. 하다못해 사우나에 가는 것도 안심할 수가 없으니, 스트레스를 풀 길이 없죠. 그게 다 어디로 분출되겠어요. 한강시민공원마저 이용이 금지되는 걸 보지 않았어요? 이제 마을 공원이나 마을회관조차 마음 놓고 모여 놀 수가 없게 되었다구요. 모여서 화투나 치다가 집단감염이 일어나기도 했죠. 이런 게 다 답답하죠.  
- 그래? 거꾸로 보면 그동안은 다양한 해소책이 있었던 셈이로군. 그런데 생각해 보게. 사람들이 해가 뜨면 일어나 각자 자신의 직장으로, 학교로 나가 해가 질 때까지 바깥일만 하며 살기 시작한 게 얼마나 되었다고? 1백년 전만 해도, 아니 50년 전만 해도, 더 많은 사람들이 지금처럼 자기 집 주변에서, 자기 마을 안에서 사는 경우가 더 많지 않았나? 낮에는 일어나 밭에 나가고 저녁이면 가족들끼리 모여앉아 밥을 먹고 오순도순….
- 크핫. 지금 사람들 대다수는 그런 농경문화적인 삶을 잃어버린 지 오래죠. 노인세대가 아니라면, 젊은이들은 마치 DNA가 바뀌기라도 한 듯 도시문명에 젖어버렸어요. 층층이 쌓아올린 고층아파트의 보금자리, 고층건물의 사무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빽빽하게 맞물린 기계구조 속에서 살아왔지요. 시간 맞춰 전철을 타고, 시간 맞춰 일을 시작하고, 시간 맞춰 퇴근을 해요. 이틀의 주말에는 친구를 만나거나 종교모임이나 가족모임, 스포츠경기장이나 등산을 하고, 다시 월요일이면 출근을 시작해요. 한 사람의 일생을 놓고 보면, 어려서부터 유치원-학교-직장 순으로 구조화되어 있죠. 이러한 질서에 적응되어 있었거든요. 이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건 삶의 질서가 흐트러지는 것을 의미해요. 순서가 틀어졌을 때, 무엇을 하며 어찌 지내야 하는지 알지 못하니 숨이 막히는 것 같을 거에요. 
- 그래. 자동차 엔진룸처럼 빽빽하게 맞물려 돌아가던 현대인의 일상이 곳곳에서 멎어버린 요즘, 도시 사람들은 어떻게 견디고 있나?
- 갑자기 낯설죠. 아침저녁으로만 보던 가족들이 하루 종일, 주말이나 휴가도 아닌데 하루 종일 집에서 얼굴을 맞대고 지내는 경우가 많아졌어요. 10년 넘게 같은 단지 안에 살면서 얼굴도 모르고 지내던 이웃들과 마주치는 일도 늘어났죠. 어린 아이들은 유치원과 학교가 쉬어서, 직장인들은 재택근무로, 장사하던 사람들은 가게를 여는 시간이 줄어서…
- 허어, 매사가 낯설겠군. 그렇지만 좋은 점도 있겠는걸. 부부금슬이 좋아진다거나 부모자식간에 대화의 시간이 늘어난다거나. 
- 누가 그러더군요. 매일 얼굴 마주보면서도 잘 지내려면 금슬이 좋아야 한다고요. 아무래도 같이 집에 있으면서 부딪치는 일이 늘어나니 부부싸움과 이혼이 늘어날 거라는 전망과 오히려 같이 있으면서 더 좋아질 거라는 전망이 팽팽합니다. 이혼도 결혼도 줄었다고 해요. 대개 이혼은 명절 직후에 많다던데, 곧 추석을 지나면 드러나지 않을까요. 
- 올해 추석명절을 조심해야겠군. 코로나 덕분에 오히려 특수를 누리는 분야도 있지 않겠나? 풍선도 한쪽을 누르면 반대쪽에선 돋아나는 법인데. 
- 택배사업이 굉장히 잘되고, 자전거가 많이 팔리고,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니까 집을 고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수리업자나 가구업자 인테리어 업자들이 호황을 누린답니다. 인터넷 사업쪽은 더욱 대단해요. 직접 만나는 대신 온라인 모임이나 게임이 늘어났으니까요. 
- 개인적 분노, 집단적 분노, 국가간, 종족간의 분노. 이거 감정조절 잘 해야겠는걸.  
- 그런데, 이 시기는 어떻게 지내야 합니까? 참고 기다리면 예전과 같은 태평성대로 돌아갈 수는 있는 건가요? 코로나 이전의 시대가 회복될까요? 
- 이런, 이런! 시계가 어떻게 과거로 돌아가겠나. 코로나의 위협이 끝난다 해서 과거시점으로 돌아가지겠나? 그저 코로나가 끝난 미래가 되는 것이지. 질문을 하겠거든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떤 새로운 미래가 열릴까’라고 묻는 게 옳네. 좋은 일과 궂은 일,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어려운 일과 쉬운 일, 이 모든 것은 하늘의 도(道)에 비추어본다면 모두 한 가지로 통하는 것이지.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고, 사실은 이것이 저것이라네. 하나의 파괴는 새로운 완성을 위한 과정이지. 즉 새로운 완성. 
- 니체가 그리 말했던 것 같군요. 헤겔의 변증법인가?

* <장자> 한 마디    
其分也成也 其成也毁也 (기분야성야 기성야훼야)
파괴는 곧 완성이며, 완성은 곧 파괴다. (2. 제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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