風馬牛 不相及 풍마우 불상급
발정난 소나 말이라도 서로 찾아가지 못 할 만큼 거리가 멀다. <春秋左氏傳 僖公4년>
제 환공의 공격을 받은 초 성왕이 두 나라가 서로 무관함을 비유로 변증한 말

제나라 환공이 패권을 행사하던 무렵, 초나라는 성왕(成王)이 다스리고 있었다. 성왕은 문왕이 식(息)나라 군주로부터 빼앗아온 식부인이 낳아준 두 아들 중의 하나다.

성왕은 제위에 오른 뒤 백성들에게 은덕을 베풀어 민심을 수습하고 인근 제후들과 우호관계를 회복하는 데 힘썼다. 천자인 주나라 왕에게 예물을 보내자 천자는 제사지낸 고기를 하사하며 중국 남방의 이민족들을 다스리는 권한을 위임했다. 초나라의 왕권은 안정이 되고, 영토는 천리로 확장되었다. 전성시대를 맞은 것이다.

제나라 환공이 맹위를 떨칠 무렵, 제나라의 군대는 초나라 변경까지 이르렀다.

제 환공에게 채나라에서 시집온 여자가 있어 채희라고 불렀다. 어느날 제 환공이 강 위에 배를 띄우고 채희와 함께 놀았는데, 채희가 장난을 치면서 배를 흔들자 물에 익숙하지 않은 환공이 크게 겁을 먹었다. 배를 흔들지 말라고 타일렀으나 채희는 장난을 멈추지 않고 심히 흔들어 급기야 환공의 분노를 샀다. 뭍으로 올라온 환공은 분을 삭이지 못해 채희를 친정 채나라로 돌려보냈다. 그러자 채나라 군주는 제 환공의 처사를 괘씸하게 여겨 여동생을 다른 곳으로 개가시켜버렸다. 그래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제 환공은 군대를 몰고 쳐들어가 채나라를 무너뜨렸다. 싸움이 싱겁게 끝나자 환공은 돌아오는 길에 초나라를 침범했다. 이것은 계획된 양수겸장의 전략이었다. 환공은 언젠가 초나라를 한번 손볼 필요가 있다고 벼르고 있었다. 마침 채나라를 치려고 군사를 일으키자 관중이 이 기회에 초나라까지 공략하여 숙원을 풀도록 조언했던 것이다.

초나라는 강했으나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제나라 군을 능가할 정도는 아니었다. 두 나라 군대가 맞서고 있을 때 초나라 성왕이 제 환공을 향해 소리쳤다.

“본래 공의 나라는 북쪽에 있고 과인의 나라는 남쪽에 있으니, 설사 발정난 소나 말이라 할지라도 서로 찾아갈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살았소(君處北海 寡人處南海 唯是風牛馬不相及也). 서로 간섭하거나 원한을 살 이유가 없단 말이외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 땅을 범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오.”

그러자 환공이 대답했다.

“본래 우리 제나라 시조인 강태공께서는 주 천자로부터 천하의 제후들을 다스려 주 왕실을 잘 보좌하라는 명을 받으셨소. 근자에 초나라는 천자께 공물(포모)을 바치지 않으니 왕이 제사를 지내는 데 품목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고 있소. 그 책임을 물으려는 것이 첫째요. 또 오래전에 주나라 소왕(昭王)이 남쪽으로 순수하러 갔다가 돌아가셨는데, 아무도 그 책임을 지지 않았으니 이제 문책하려는 것이오.”

초 성왕이 답하기를 “공물이 들어가지 않은 일은 과인의 잘못이오. 앞으로는 빼놓지 않고 바칠 것을 약조하겠소. 그러나 소왕이 귀국하지 못한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는 바 없으니, 한수(漢水)에 가서 물어보시오”라고 하였다.

환공의 군대가 곧 돌아가지 않고 초나라 변경마을에 머무르자 성왕이 굴완(屈完)을 보내 막도록 하였다. 굴완은 제 환공을 찾아갔다. 환공이 굴완에게 겁주어 말했다. “우리 군의 위세를 직접 보셨으니 아실 게요. 초나라가 무슨 수로 우리 군대를 막아서려오?”

그러자 굴완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임금께서 도의를 따져서 행동하신다면 우리도 막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으신다면, 초나라는 험한 산세를 성으로 삼고 양자강과 한수를 해자로 삼아 끝까지 저항할 터인데, 아무리 강군인들 어찌 전진하실 수 있겠습니까?”
환공은 그제야 초나라 왕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제나라로 돌아갔다.

이야기 PLUS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명분이다. 10년 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할 때에도(실제 속셈이야 어디에 있든), 우선 맨해튼에 가해진 9.11 테러에 대한 보복과 심판을 내세웠기 때문에 국회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에 침공의 명분이 상당부분 과장되었거나 거짓으로 드러나면서 미국 내 여론은 군 철수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되었다.

제 환공이 내세운 초나라 침략의 명분도 우선은 뚜렷해 보이나, 사실 두 이유 가운데 하나는 구실에 불과했다.

주나라 소왕이 누군가. 무려 200년 전에 죽은 왕이다. <제왕세기(帝王世紀)>에 소왕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있다. 부덕하고 놀기를 좋아했던 소왕이 일행을 거느리고 멀리 남쪽으로 놀러갔다가 한수(漢水)에 이르렀는데, 그 곳 사공들이(사공을 동원하면서 원한을 샀던지) 왕에게 아교로 붙여 만든 배를 주었다.

배가 강 한가운데 이르렀을 때 아교가 풀리면서 소왕이 익사했다. <주(周) 본기>에 따르면 주나라는 왕의 죽음을 제후들에게 부고(訃告)하지도 못했다. 제왕의 유람단이 일개 사공들에 의해 몰살당한 일을 알리기가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그 뒤늦은 책임을 초나라에 묻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 얘긴가.

이런 제나라 군을 돌려보낸 굴완의 협상수완은, 전쟁의 승패가 반드시 무력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당신의 군대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도의(道義)를 잃는다면 행패에 불과하다. 그런 행패라면 우리도 능히 막아낼 수 있다.” 강한 군대와 더불어 사리에 맞는 명분이 있어야만 승리가 보장될 수 있다는 말로 해석될 수 있다.

임금께서 도의를 따져서 행동하시는 것이라면 우리도 막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으신다면, 끝까지 저항할 터인데, 어찌 전진하실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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