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제 환공- 경제전쟁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政之所興 在順民心, 政之所廢 在逆民心
 정지소흥 재순민심 정지소폐 재역민심
정치가 흥하는 것은 민심을 따르는 데 있다. (<管子> 목민편)

어느날 환공이 물었다. “노나라와 양나라는 서로 이웃한 나라로, 우리에게 위협이 되기도 하고 의존이 되기도 합니다. 노나라와 양나라를 정복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관중이 대답했다. “노나라와 양나라의 백성은 비단을 짜서 옷을 입는 풍속이 있습니다. 군주께서도 비단옷을 입으시고 좌우의 신하들도 입도록 명하십시오. 그러면 백성들도 좇아서 모두 비단옷을 입으려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비단짜기를 금지하면 반드시 양나라와 노나라에서 사오게 될 것입니다.”
환공을 필두로 귀족들이 비단옷을 입기 시작하자 제나라에서는 비단옷이 유행이 됐다. 관중이 양나라와 노나라 상인들에게 값을 후하게 쳐주면서 두꺼운 비단을 들여오도록 했다. 노나라와 양나라는 비단으로 큰돈을 벌었다. 대신 백성들이 본래의 생업인 농사일을 제쳐두고 뽕나무를 심어 비단짜는 일에 몰두했으므로 두 나라는 농업이 황폐해졌다.
1년이 넘어 관중은 신하와 백성들에게는 비단옷을 입지 못하게 하고 동시에 노나라와 양나라로 통하는 관문을 막아 교역을 중단시켰다. 곧 노나라와 양나라에서는 굶는 백성들이 속출했다. 비단을 팔 길이 없어 수입은 줄어들었고 곡물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었기 때문이다. 한번 폐한 농업을 되살리는 데는 최소한 석 달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제나라에서 1섬에 10전이면 살 수 있는 곡식이 노나라에서는 1천전까지 오르자 노나라와 양나라 사람들이 제나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곧 백성의 6할이 제나라 땅으로 들어왔다. 3년이 지나자 노나라와 양나라 군주는 제나라에 복속하기를 자청하였다.
초나라는 강국이었으며 군사력도 강했다. 환공이 초나라를 공략할 방도를 묻자 환공은 초나라로부터 특산물인 사슴을 수입하자고 했다. 동시에 산림이 울창한 래(萊)나라와 거(莒)나라의 목재를 땔감으로 삼아 화폐를 주조해서 초나라의 사슴을 사들이니, 래와 거나라 사람들은 스스로 삼림을 파헤치고 초나라 사람들은 남자나 여자나 사슴을 잡으러 돌아다녔다. 초나라는 사슴을 비싸게 팔아 국부가 다섯 배나 늘어났다. 초나라 임금은 곧 제나라가 자신들의 휘하에 들어올 것이라 착각했다. 그 사이에 제나라는 백성들에게 오직 식량을 다섯배나 비축하게 했다.  
관중이 환공에게 말했다. “이제 초나라를 정복할 때가 되었습니다. 초나라는 화폐가 다섯배나 늘어나 스스로 강해졌다고 착각하고 있으나 단지 화폐만 다섯 배 늘어났을 뿐입니다.”
제나라가 교역을 중단하자 초나라에서는 양곡의 가격이 1섬에 400전까지 올랐다. 초나라 백성의 4할이 제나라로 투항해오자 초나라는 제 환공에게 항복했다. 동시에 땔감을 팔던 래나라와 거나라 사람들도 제나라가 땔감 사용을 중단하자 양곡 값이 370전까지 뛰어 더 이상 먹고 살 수 없게 되었다. 두 나라에서 7할의 백성이 제나라에 귀순하자 28개월만에 두 나라의 군주가 환공에게 복종을 맹세했다. 같은 방법으로 많은 나라들이 제에 귀의했다.

이야기 PLUS
관중의 정책은 백성을 아끼는 애민(愛民)정신과 되도록 침략 전쟁을 지양하는 평화주의를 기본으로 삼는다고 볼 수 있다. 흔히 천하를 제패하는 패자는 강한 군사력을 수단으로 삼는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환공이 다스리는 제나라는 굳이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주변 나라들을 차례로 굴복시켰다. 이는 재상 관중이 제시한 경제적 수단과 협상의 기술이 주효한 결과였다.
화폐와 물가의 원리를 파악하여 마음대로 통제한 관중은 단지 재화를 팔고 사는 것만으로 다른 나라들의 목줄을 조이고 풀었다. 천하가 그의 손바닥 위에 놓인 듯하였으니, ‘천하를 경영한다’는 것이 바로 그를 두고 한 말 같다. <관자>에서 협상보다 전쟁을 우선한 경우는 거의 발견할 수 없다. ‘경제침략’이나 ‘식량전쟁’ 등의 현대적 개념들이 2천700년 전에 사용됐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오늘날 강대국과 무역협상을 맺으면서 유리한 협상을 맺었다고 자화자찬하는 지도자들은, 그 옛날 중국에서 강대국 제나라가 주변 나라들을 복속시킨 수법이 시사하는 바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근래 중국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중국 역사에 최대의 비극은 관자(管子; 관중을 높여부른 명칭)를 스승으로 삼지 않고 공자를 스승으로 삼은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관중의 경세론 <관자>는 엄청난 지혜의 보고다. 더구나 그것은 공허한 논쟁이 아니라 실사구시의 현실적 경세론을 담고 있다.
관중의 사상은 철학부터 정치 사회 산업과 경제에 이르기까지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주역 이론을 실용화한 음양오행이 관중에게서 비로소 정립되었다고 한다. 전국시대의 제자백가가 모두 관자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정치적으로는 민본주의의 기틀이 그에게서 마련되었다. “정치가 흥하는 것은 민심을 따르는 데 있고, 정치가 피폐해지는 것은 민심을 거스르는 데 있다(政之所興, 在順民心; 政之所廢, 在逆民心).” ‘목민(牧民)편’에 나오는 말이다. 정치의 흥망은 곧 국가의 성쇠로 이어진다. 한마디로 국가가 흥하려면 정치는 민심을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는 사상이다.

제나라가 후한 값에 비단을 사들이자
노나라 사람들은 농사를 팽개치고 비단짜기에 바빴다.
1년 뒤 교역을 중단하자 노나라 곡물값은 100배나 뛰었다.
백성의 6할이 제나라로 넘어가자
노나라 군주는 제나라에 복속되기를 자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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