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천부(天府)의 원탁회의

#2, 천부(天府)의 원탁회의

이것도 지난 얘기지만, 조금만 더 얘기해 두어야겠다. 아무래도 장자와 채팅을 시작하게 된 경위가 모두에게 궁금하실 테니까.

잠에서 깨어나서 아주 잠시 후, 나는 장자와 함께 낯선 곳에 있었다. 바닥은 구름이었는데 생각보다 푹신하지 않았고, 벽도 천장도 없이 탁 트인 공중이었다. 이를테면 구름 위에 펼쳐진 너른 공간이었다. 그렇다,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본다면, 이곳은 하늘이다.

어떻게 이곳으로 이동하게 되었는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장자가 ‘따라오게’라고 말하며 내 손을 잡았다고 느끼는 순간 아주 잠시 아찔한 느낌이 들었으며,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전혀 다른 곳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의 길이는 0.3초도 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구름 위의 공간 한 가운데에는 길이를 알 수 없는 긴 테이블이 두 줄로 나란히 놓여 있었다. TV에서 가끔 보는 국회 인사청문회 대형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 길이가 매우 길고 앉아있는 멤버들의 숫자는 한눈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는 점이다.

- 원탁은 아니지만, 우리는 전통에 따라 이것을 ‘현자(賢者)들의 원탁회의’라 부른다네. 천부(天府= 하늘에 있는 자치 행정기구)에 있는 수많은 장치들 중 하나지. 수많은 현자들 가운데서 연 단위로 1백명씩 교대로 참가하여 회의를 구성한다네. 멤버 구성은 주로 지구상의 관심사나 주요 현상들과 관련이 있어. 그러니 어떤 사람들이 회의에 참석하고 있는가를 보면 지금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네.

어떤 사람들이 테이블에 두 줄로 마주보며 앉아있었다. (사실 ‘사람’이라는 표현은 좀 그렇다. 몸을 가진 존재가 아닌 영적 존재들인 셈이지만, 그렇다고 ‘영혼’이라는 표현을 쓰면 너무 생소하게 느껴질 듯하니 편의상 ‘사람’으로 지칭하는 것을 양해하시기 바란다.) 여기 모여 있는 이들은 내게는 모두 초면이지만, (놀랍게도) 나는 그들 대부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장자>에 나오는 인물들. 열어구, 혜시, 고자, 송영자, 견오, 연숙, 곽자기들이 있는가 하면, 제자백가의 현인들과 역대 인류사의 현자들도 포함돼 있었고, 20세기 이후까지 인간 세상에 우리와 함께 살고 있던 과학자들의 모습도 더러 눈에 띄었다. 고대 그리스의 현인들, 로마와 페르시아의 선지자들, 르네상스시대의 현자들, 그리고 한두 해 전까지도 매스컴을 통해 종종 볼 수 있던 현대 인물들도 있다. 그들의 이름을 일일이 나열하는 것은 별로 의미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 과학자들의 모습이 많이 보이는군.

장자가 입을 열었다. 이 원탁회의에 요즘 들어 과학자들의 참석이 눈에 띄게 늘었다는 것이다.

-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혹시 짐작하겠나?

- 글쎄요. 나는 과학을 잘 몰라서….

자신 없어하는 나의 얼굴을 힐끗 돌아보고 나서 장자는 말을 이었다.

- 지상에 전쟁이라도 벌어질 때가 되면 역대의 무인(武人)들과 정치가들이 회의에 많이 참석하지. 사상적 혼란이 극심할 때는 사상가와 예술가. 문인들이 주로 모였다네. 그러면 과학자들의 참석은 무엇을 의미하겠나.

그러고 보니 테이블 중간쯤에는 윌리엄 길버트, 막스 플랭크라든가 케플러, 앙리 베크렐, 슈레딩거, 니콜라 테슬라, 오펜하이머 등이 보였고, 죽은 지 얼마 안 된 스티븐 호킹의 모습도 언뜻 보이는 듯했다.

- 아인슈타인과 다빈치의 영혼도 어디선가 원격으로 참석하고 있지.

- 지구에 과학적 위기가 증가하고 있다는 의미겠군요.

- 바로 말했네.

- 얼마나 심각하길래?

나의 반문에 장자가 말했다.

- 자네는 지금 지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 심각성을 모르겠나?

그의 눈빛이 가슴을 꿰뚫기라도 할 듯 강렬했다.

- 아, 심각하다는 말이야 늘 듣고 있지요. 북극 빙하가 두 자릿수 비율로 줄어들었다든지, 해양의 온난화라든지…. 내가 살고 있는 나라만 해도 사계절이 뚜렷한 온대성 기후에서 아열대 기후로 바뀌고 있어요. 연안에 상어가 올라오고 동해안에서는 오징어 대신 갈치 떼가 등장했답니다. 서울 근교에서 커피나무를 시험 재배하는 친구들도 있죠. 내가 왜 모르겠습니까. 기상이변부터….

- 쯧쯧….

장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 멀었네. 그놈의 위기의식. 그래서 언젠가, 지금과 다른 지구가 될 거라고 생각은 하겠지. 자네도 알 수 없는 어느 먼 훗날에 말이야. 그게 심각한 인식인가? 바로 일 년 뒤, 몇 달 뒤, 어쩌면 내일이라도 지각변동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 그, 그럴 수도 있겠죠. 한반도에서 측정되는 지진 횟수만 해도 연간 2백건이나 될 만큼 급증했답니다. 작년과 재작년. 그러나 ….

- 그러나?

- 바로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 거란 사실을 내가 알고 있다 한들, 무엇을 어찌 할 수 있습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어라도 있나요?

장자는 걷기 시작했다.

- 이렇게 하세. 지상의 인간들이 알아야 할 일이 많이 있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판단에 원탁회의는 지상에 몇 사람의 메신저를 두기로 했다네. 지금 지구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곳의 관측결과를 알려주고, 또 지구의 종말이 오기 전에 인간들이 알아둬야 할 것을 깨우치기 위하여. 지상에 1백명의 메신저를 두게 될 걸세. 자네도 그 중의 한 사람이 될 거네.

- 영광이로군요. 아, 그런데 지구에 종말이 오는 겁니까 마침내?

나는 놀라서 발길을 멈추었다.

어떤 대답을 듣기도 전에 아찔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잠시 후 나는 아직 침대 위에 누워있는 몸 안에서 깨어났다. (계속)

 

 

* 과학하는 장자

2천5백년쯤이나 전에 살았던 ‘장자’는 아득한 하늘 위(우주)에서 내려다보는 지구도 푸른빛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다음과 같은 말로 넌지시 알려주고 있다.

天之蒼蒼 其正色邪 其遠而無所至極邪 其視下也 亦若是則已矣
(천지창창 기정색사 기원이무소지극사 기시하야 역약시즉이의)

하늘의 푸른 것은 그 본래의 색일까. 아득하게 멀어 끝이 없기 때문 아닐까?

그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아도 또한 이와 같으리.

- <장자> 소요유(逍遙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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