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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한 천사를 사랑했네> 43회 무서운 백색의 세계②
이군산  |  kj.lee@finom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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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2.14  10: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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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기억하고 있는지요. 당산동 살 때 언젠가 수도가 얼어 물이 안 나온 적이 있었죠. 보일러도 안 돌고, 그래서 방 안에서도 입김이 났는데, 그때 당신이 언 수도를 녹여주었지요. 옆집으로, 부엌으로, 방으로, 당신을 따라다니면서 나는 참 행복했습니다. 몸살이라도 걸리면 어쩔 뻔했느냐고, 너 같은 바보는 또 없을 거라고, 당신이 연신 투덜거렸지만 나는 구름 위에 둥둥 뜬 기분이었습니다. 물이 나오고, 보일러가 돌고, 방이 따뜻해지고…… 당신은 말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그때 내 안에서 종이 울렸습니다. 그래요 종이었어요…… 당신은 한때 내 몸을 온통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종처럼 느끼게 해준 사람. 당신이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그 날의 기억을 사탕처럼 굴리며 한평생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도 기뻐해주고 이해해주는 사람. 나를 만난 게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하는 사람. 헤어져 있는 동안 얼마나 많이 당신을 그리워했는지요. 꿈속에서나마 당신을 만나고 싶어 잠자리에 들 때마다 당신 떠올리며 뒤척이곤 했지요. 가야지, 가야지, 내일은 가야지, 전화라도 해야지…… 참 많이도 고민했습니다. 한번도 실행에 옮기진 못했지만.

선뜻 여행제의를 받아줘서 고마워요.

당신 기다리면서, 피가 마르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을 만나자 너무 편안했습니다. 끔찍한 기억은 다 사라지고, 마냥 당신과 함께 있는 게 좋았습니다.

이룬 것 하나 없어 억울한 인생이지만 당신이 있어서 내 인생은 가난하지 않습니다. 당신하고 있으면 내가 아름다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나는 먼 우주를 통과하여 여기까지 왔고, 당신을 만났고, 사랑했습니다.. 당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내 생은 위태롭지 않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가지고, 나는 다시 먼 우주로 돌아갑니다.

완벽한 순간, 뭔가 머릿속이 통일된 기분. 사랑하는 사람들, 미워하는 사람들, 엄마 찾는 아기의 울음, 사형장의 총성, 깜박 잊고 지키지 못하게 된 약속, 깨어진 꿈, 믿었던 친구의 배반, 갑작스런 교통사고󰠏󰠏󰠏그런 모든 것들이 다 긍정적으로 보이는 은총의 순간, 우주적 하모니로 느껴지는 순간, 지금 그런 순간입니다.

당신 곁에서 아름답게 늙고 싶었는데…… 이제 가야 합니다. 미처 다하지 못한 사랑 여기 남겨두고, 이제 가야 합니다. 짧은 생애지만 열심히 살았고, 후회는 없습니다.

 

오래도록, 오래도록 당신을 들여다봅니다.

잠든 당신에게 마지막 입맞춤을 합니다. 당신께 지상에서의 마지막 인사를 합니다.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쌀쌀맞게 대해도, 당신은 큰 그릇이 작은 그릇을 포개듯이 나를 감싸주었지요. 당신은 내게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먼저 사람에게 잘해준 사람은 다음 사람에게도 잘해준다고 합니다. 당신은 다시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실 겁니다.

행복하세요.

아, 당신. 한 번 더 당신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조금 전 당신이 마신 술에 수면제를 탔습니다. 미안해요, 이 방법밖에 없었어요. 당신을 속일 생각은 없었지만, 혼자 죽기는 너무 무서웠습니다. 당신 곁에서 죽고 싶었습니다…… 혼자 떠나지 않을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그게 끝은 아니었다. 열 문장 정도 더 적혀 있었다. 그러나 뒤에 적힌 글들은 외계인의 문자가 그럴까 싶게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다. 그녀 나름대로는 힘들게 한 글자 한 글자 마지막 기력을 다해 적어나갔을, 그녀의 마지막 마음을 담은 문장들󰠏󰠏󰠏 그러나 나는 끝내 해독할 수 없었다.

나는 다이어리를 내려놓고 망연자실 누워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상스런 한기가 전신을 파고들었다. 목 안쪽이 뜨거웠다. 폐가 닫혀가는 것처럼 숨쉬기가 힘들었다.

내가 잠들었을 때 그녀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내 팔에는 손톱에 긁힌 자국이 있었다. 살려달라고, 나 좀 봐달라고, 버티기 힘든 고통 속에서 그녀가 내 팔을 흔들고 꼬집고 할퀸 흔적 같았다. 그런데도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잠만 자고 있었다.

정적.

모래톱과 하천물 위에서 햇빛이 다글다글 끓었다. 물결은 바람의 세기와 빛의 각도 등 미세한 작용으로 시시각각 변했다. 모든 풍경이 한 겹 투명한 막으로 씌워진 것처럼 선명하지 못하고 부유스름했다. 둥, 둥, 둥, 둥…… 가슴이 북처럼 뛰고 다리가 걷잡을 수 없이 후들거렸다. 무얼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눈이 자꾸 아물거리고, 다시 누워 잠들고만 싶었다. 그러면 다시 몇 시간 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선 정신을 차려야 했다. 나는 물새들의 발자국이 점점이 찍힌 모래톱을 걸어 물가로 갔다. 햇볕이 불을 쏟아붓는 듯 뜨거웠다. 물고기 몇 마리가 은빛 비늘을 반짝이며 물 위로 뛰어올랐다.

물을 움켜 얼굴에 적셨다. 목운동을 했다. 머리는 맑아지지 않았다.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녀는 거기 그렇게 누워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무참한 단절. 이제 은영인 나를 부르지 못한다. 은영인 죽었다. 그녀의 영혼은 34년 4개월 끌고 온 저 무거운 육신을 버리고 나갔다.

외로웠다. 그녀가 곁에 있었지만, 그녀는 어제까지의 그녀가 아니었고, 나는 외로웠다. 저물녘 인적 끊어진 어두운 골짜기에 혼자 버려진 어린아이처럼 외롭고 무서웠다. 맴맴맴맴 처르르르, 맴맴맴맴 처르르르…… 세상이 끝난 것처럼 매미들이 일제히 목놓아 울어댔다. 나는 두려워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다시 모래톱을 걸어 그녀에게로 갔다. 나는 자동차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파워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경찰에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음을 알렸다.

 

평온한 여름철, 물고기는 뛰어오르고 어느새 길게 자란 목화들…… 아빠는 넉넉하고 엄마는 환한 얼굴…… 그러니 아가야 울지 말고, 고이 잠자거라…… 어느 날 아침 너는 다 자라 노래부르겠지…… 그때쯤 너는 네 날개를 활짝 펼 거야…… 그 날이 오기까지, 아무것도 널 해치지 못한단다…… 엄마아빠가 네 곁에 있는 한…… 사자(死者)의 혼백에게 저승길을 안내하는 주문 바르도 쉐돌(BARDO THÖDOL)처럼 마할리아 잭슨의 노래가 간단없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구름 그림자가 물 위를 지나갔다. 물이 잠깐 검푸른 빛을 띠었다가 다시 하얀 빛으로 돌아왔다. 모래알들이 일제히 튀어오르듯 반짝거렸다.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콧등이 시큰거리면서 기어이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딱딱해진 그녀의 몸을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았다.

무서워하지 마, 은영아…… 내가 옆에 있으니까 무서워하지 마…… 난 항상 네 곁에 있었어. 열일곱 살 이후, 난 한번도 너를 남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 넌 혼자가 아냐. 영혼 밑바닥까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여자, 내 사랑, 내 생에 겹친 영원. 너로 인해 나는 신들의 나라 공기를 호흡할 수 있었지…… 날 믿어줘서 고마워…… 누가 뭐래도 넌 천국에 갈 거야. 살아서 많이 힘들었으니 죽어서라도 행복해야지. 네가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이었는지 너의 선하신 하느님이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거야…… 보이니? 천국의 계단이……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 은영아…… 보이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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