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티카카 생각난다.” 은영이 불쑥 말했다.

홍대 앞에 티티카카란 이름의 카페가 있다. 커피 한 잔을 시키고 반나절을 앉아 있어도 아무도 눈치를 주지 않는 편안한 곳.

티티카카(Titicaca)는 페루와 볼리비아 국경에 위치해 반은 페루, 나머지 반은 볼리비아의 영토에 속하는 담수호의 이름이다. 정확히 말하면 페루 쪽이 조금 넓고 볼리비아 쪽이 조금 좁아 3분의 1쯤을 가지고 있다. 해발 3,812m에 위치하고 면적은 8,300㎢로 한국 충청북도 넓이와 비슷하고 평균 수심은 280m이며, 안데스 산맥의 눈 녹은 물이 20군데 이상의 지류로부터 흘러 들어 수량이 항상 풍부하다. 호수 주위를 잉카문명의 땅으로 만들며 일찍이 ‘안데스의 축복’이란 찬사를 받아왔다. 티티카카 호수 변의 도시로는 페루 쪽으로 뿌노(Puno), 볼리비아 쪽으로는 꼬빠까바나(Copacabana)가 있다. 뿌노 근처에는 원주민 우로족이 모여 사는 인공섬 지역이 있다. 우로족은 갈대로 섬을 만들고, 배를 만들고, 집을 짓고 산다. 먹기도 한다. 우로족의 어떤 아이들은 학교에 가기 위해 작은 갈대배를 타고 한두 시간 고독하게 노를 저어야 한다. 여자애들도 마찬가지다. 팔이 부러질 정도로 힘든 노동이다. 가다가 자기보다 더 어린 아이를 태워주기도 한다. 몽골 초원의 아이들이 걸음마를 배우자마자 말타기를 배우는 것처럼, 우르족 아이들은 대부분 수영을 잘 한다. 티티카카호에서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배워하는 기술이다.

티티카카, 두 나라가 나눠 가진 아름다운 호수, 우리는 그보다 더 좋은 신혼여행지는 있을 수 없다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었다. 나는 아마 이생에서 티티카카에 영원히 가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티티카카는 너무 멀다.”

다시 은영이 힘없이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그렇게 침묵이 흘렀다. 태초에나 있었을 법한 그런 침묵. 나는 모로 누워 팔베개를 하고 채 물결을 바라보았다. 태양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졸음이, 졸음이…… 물결처럼 밀려왔다. 해일처럼 밀려왔다. 따뜻한 늪처럼 나를 감쌌다. 눈꺼풀이 무겁게 느껴졌다.

하늘거리는 버드나무 잎새들, 사람 키보다 높게 웃자라 우거진 억새들, 하얀 모래톱, 반짝거리는 물비늘…… 단발머리 찰랑이며 모래톱을 달리는 어린 은영의 모습이 보인다. 버드나무 아래 바위에 앉아 하모니카를 부는 은영의 모습이 보인다. 연둣빛 잎새들…… 잎새들…… 햇빛…… 햇빛…….

“자기야.”

은영이 나를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응.”

“나 귀찮지?”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싸워도 너와 함께 있어야 내 마음이 편해. 넌 내 몫의 여자야.

“말이지……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이 모두 농담이었으면 어떡할 거야?”

“……무슨 말이야?”

“위암이 아니라 위염이고, 살인도 농담이었다면 어떡할 거야?”

나는 잠의 문턱에서 반쯤 감긴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장난스런 미소가 맴돌고 있었다. 한순간 머릿속이 뒤죽박죽으로 헝클어지는 기분이었다.

“왜 말을 안 해?”

조금 들뜬 목소리로 은영이 다시 물었다. 더운 바람 한 줄기가 먼 추억처럼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농담이라면…… 아, 정말 농담이라면…… 그 생각은 너무도 강렬해 다른 생각을 못하게 만들었다. 아니, 너무 피곤해서 다른 경우의 생각을 할 여력이 없었는지도 몰랐다.

“우선 너를 때려줘야지…… 니가 지금까지 속썩인 거 다 기억하고 있어.”

나는 아마 빙긋 웃었을 것이다.

“그래. 난 맞아야 해. 근데 너무 아프게 때리지는 마.” 그녀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어떡할 거야?”

“다 때려치우고…… 한 몇 달 세계여행이나 하자…… 너 체코 가고 싶어했잖아. 작년에 나 체코 갔었다. 카를 다리에서 몰다우강을 보는데, 네 생각나서 혼났어…… 같이 가자.”

“돈은 안 벌고? 이번에도 돈 많이 썼을 텐데…….”

“돈이야…… 우리는 아직 젊고, 다시 시작하면 되지…… 금방 만회할 수 있어.”

“그래. 그럼 우리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순식간에 온몸의 긴장이 확 풀리면서 졸음이 쏟아졌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피로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졸음이었다. 아아, 이제 조마조마한 시간은 다 끝났다. 자고 일어나면 당장 서울로 올라가자. 그리고, 다 때려치우고 떠나자. 다시 시작하는 거다…….

나는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얼마나 잠들었을까.

문득 “졸려?” 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잠 밖으로 확 당겨졌다.

“으…… 응.”

나는 가까스로 중얼거렸다.

“자기야.”

“……응.”

“나 사랑해?”

“……그럼.”

왜 자꾸 말을 시키는 걸까. 그 짧은 말을 해주는 게 너무 힘들었다.

“난 늘 문제만 일으켰는데…… 그래도 정말 내가 좋아?”

“……응.”

하지만 문제를 일으킨 건 사실이지. 두고두고 들춰내어 괴롭힐 거야. 이젠 죽는 날까지 단 하루도 널 혼자 있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단단하게 성을 쌓아 너를 가둬놓고, 나도 마초가 될 거야.

“고마워. 나 같은 여자 사랑해줘서.”

“…….”

“자기야. 자?”

“…….”

나는 더 이상 아무 대꾸도 해줄 수 없었다.

다시 멀리서 “꿈속에서도 내 생각해야 해…….”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또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저 목소리라고 생각되는 어떤 소리가 웅웅거리며 귓전에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밀려갔다. 사랑한다고, 오 년 동안 자기도 많이 보고 싶었다고 말한 것 같았다. 신랑아 미안해, 이제 다 끝났어, 라고 말했던 것도 같았다. 문득 그녀의 머리카락이 뺨에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촉촉한 입술…… 의식 저편에 하얗게 스크린처럼 그녀와 여행하는 장면들이 떠올랐다. 그녀와 함께 바츨라프 광장에서 카를 다리까지 걷는 모습, 곤돌라를 타고 베네치아의 수로를 지나가는 모습, 샹젤리제 거리 노천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유쾌한 장난을 치는 그녀의 모습, 오 샹젤리제, 원하는 모든 것이 여기 다 있다네, 오 샹젤리제, 오 샹젤리제…… 축복처럼 쏟아지는 햇빛, 햇빛…… 그리고, 그리고…… 티티카카…… 우리들의 신혼여행지…… 푸른 하늘, 푸른 물, 흰 구름, 투명한 햇빛, 선한 눈빛을 한 인디오 소년들…… 물 위에 떠 있는 인공 갈대섬들, 갈대로 만든 배, 갈대로 만든 학교, 갈대로 만든 운동장, 갈대로 만든 교회…… 그 속에서 그녀, 그녀가 웃는다. 그녀의 웃음이 커다랗게 확대된다. 생각 속의 시야를 가득 메운다…… 아, 아, 저 웃음…… 저 웃음이면 된다…… 저 웃음을 위해서라면 나는 모든 것을 걸 수 있다…… 나는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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