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연재소설] <한 천사를 사랑했네> 32회 비와 하모니카, 결혼사진이 있는 풍경①
이군산  |  kj.lee@finomy.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8.11.01  09:16:28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정선의 여관이었고, 아침이었다. 나는 나쁜 꿈에서 깨어났다. 내용은 기억나지는 않지만 흉흉한 꿈인 것만은 분명했다. 방 안에, 그리고 내 몸 안에 나쁜 에너지가 흐르고 있었다. 그럴 때는 다른 사람의 건강한 체온이 필요하다. 나는 은영을 안으려고 팔을 뻗었다. 그런데 옆이 허전했다. 눈을 떴다.

그녀가 없었다. 화장실에 간 건가.

어디 있어? 하고 막연히 불러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크게 은영아, 하고 불러보았다.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예감이 안 좋았다.

퍼뜩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문을 열어보았다. 은영은…… 없었다.

방 안을 둘러보았다. 테이블에 놓여 있던 그녀의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정전이라도 된 것 같은 막막한 기분.

그녀는 연기처럼 사라진 것이었다.

그녀 스스로 자취를 감추면 내가 그녀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나는 그녀의 집을 모르고, 그녀에게는 전화기도 없다. 지금 놓치면 영원히 놓치는 것이다.

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나는 세수도 못하고 서둘러 옷을 입고 여관을 나왔다.

텅 빈 골목, 잿빛으로 낮게 내려앉은 하늘…… 나는 아직 악몽 속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혹시나 하고 자동차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역시 그곳에도 그녀는 없었다.

가까운 구멍가게에서 담배를 사들고 나오는 군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에게 시외버스 터미널 위치를 물었다.

자동차 시동을 걸고 골목을 빠져나와 차도로 들어섰다. 어두운 하늘이 덩달아 내 마음도 암울하게 했다. 여기서 혼자 사라지면 나는 어떡하라고, 어떻게 맨 정신으로 현실로 돌아가라고…… 조금 전 골목에서 터미널 위치를 들었으면서도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다시 행인에게 터미널 위치를 물었다. 정신이 딴 데 가 있어서인지 나는 그 한적한 도로에서도 몇 번인가 다른 차와 충돌할 뻔했다.

터미널 앞에 차를 세우고 허겁지겁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은영은 보이지 않았다. 승강장으로 가보았다. 거기, 나무의자에 허깨비처럼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실감이 나지 않아 나는 한동안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뒤늦게 나를 발견한 그녀가 화들짝 놀라 의자에서 일어났다.

말없이 다가갔다. 은영이 겁먹은 얼굴로 뒷걸음질쳤다.

나는 걸음을 빨리 했다. 은영이 몸을 돌려 미친 듯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마치 저승사자로부터 도망치려는 듯한 필사적인 뜀박질이었다. 내 가슴이 쾅쾅 밟히는 느낌이었다. 나도 달리기 시작했다. 한 지붕 밑에서 살 섞고 살며 죽을 때까지 그렇게 함께 하자고 약속했던 사이인데, 쫓고 쫓기고……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내 눈에서 눈물이 몇 방울 떨어졌다. 너무 마음이 급했는지 다행히 은영은 얼마 못 가서 발을 헛디디고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나는 그녀의 앞을 막고 잠깐 숨을 골랐다. 그리고 그녀의 손목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시동을 켜놓은 버스 앞에서 짧은 시간 틈을 내 농담을 주고받던 기사 둘이 저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선뜻 참견하지는 않았다.

“이거 놔!”

그녀가 사납게 팔을 비틀며 잡힌 손목을 빼내려고 했다.

나는 다시금 그녀의 팔목을 꽉 움켜쥐고 낮게 윽박질렀다.

“사람 많은 데서 소란 피울래?”

뒤늦게 주변을 둘러본 그녀가 사람들 시선이 모두 우리에게 향하고 있는 것을 깨닫고는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팔목을 잡고 터미널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끌려나오며 “차표, 차표 어떡하고…….” 하고 가냘프게 소리쳤다.

구겨 넣듯 그녀를 차에 태우고 탕 소리나게 문을 닫았다. 뒤에서 택시기사가 빵빵 날카로운 경적을 울리며 내게 큰소리로 욕을 퍼부었다. 나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고 자동차 앞을 돌아 운전석에 올라탔다.

신경질적으로 액셀을 밟았다. 터미널 앞 도로를 벗어나 한적한 곳을 찾았다. 간다지 못 간다지 얼마나 울었나, 송암정 나루터가 한강수가 되었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오, 구슬프고 구성진 곡조의 정선아라리가 환청으로 들려오는 듯했다. 나는 정선읍을 휘돌아 흐르는 조양강 둑길로 가 한적한 곳에 차를 세웠다.

“미안해.” 엔진을 끄자 그녀가 말했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자기 마음 알면 됐어. 그걸로 충분해. 자기 마음만 가지고 갈게. 자기한테 죄짓고 싶지 않아. 내가 너무 아파.”

“이미 늦었어. 이렇게 도망가는 게 더 날 괴롭히는 일이라는 거 몰라?”

“내 모습 보기 흉할 거야. 나 자기한테 흉한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아.”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나는 핸들을 쾅쾅 때리며 악을 썼다. “왜 네 입장만 생각해! 나도 네 흉한 모습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알겠어? 네가 뭘 하든 이해할 수 있고 견딜 수 있어. 하지만 이건 아냐!”

그녀가 느닷없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와앙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목놓아 울었다.

심장이 예리한 면도날 같은 것으로 베이는 듯한 아픔.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열 살 가량의 계집애가 자동차 앞을 지나 빈터로 갔다. 빈터에는 트램폴린(trampolin)이 놓여 있었다. 계집애가 주인에게 계산을 하고 트램폴린으로 올라갔다. 날이 흐려서 그런지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자애는 혼자 텅, 텅, 뜀을 뛰었다. 지켜봐 주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 엉덩이로 반동을 주고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하는 동작을 되풀이하고, 최대한 높이 뛰어보기도 하고, 뛰어오르며 가랑이를 번갈아 벌려보기도 했다. 마치 국가대표 운동선수의 지옥훈련 같았다 저게 즐거운 걸까? 여자애는 고독하고 슬퍼보였다. 함께 흔들리는 스커트도 고독해보였다.

“우리가 왜 이 먼 곳까지 와서 이래야 할까.”

은영이 울음을 삼키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젖어 있었다. 그녀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왜 말도 없이 연락을 끊었냐구? 너무 힘들었어. 내가 싫어질 정도로 너무 힘들었어. 오늘 아침 기분도 그랬어. 내 운명이 무서워. 그래도 오 년 전은 지금에 비하면 나은 편이었지. 그때 전화를 했으면 운명이 바뀌었을까. 인생이 이렇게 빨리 끝날 줄 누가 알았겠어? 집에 가고 싶어. 연남동 우리 집. 가서…… 한 사나흘 정신없이 자고 싶어. 요즘도 뒷집 여자애 클라리넷 불어? 많이 늘었겠지? 그땐 참 지겨웠는데…… 많이 생각했어. 잠잘 때면 자장가처럼 환청으로 들려오기도 했어. 얼마나 많이, 얼마나 많이 꿈꿨는데…… 나 아직도 집 열쇠 가지고 있다. 항상 열쇠고리에 끼우고 다녔어. 자기한테 가면…… 아무 일 없이 옛날로 돌아가는 거야…… 우리 집 가게는 장사가 잘 되고, 자기는 열심히 기사 쓰고, 나는 다시 센터 나가고…… 아이도 낳고…… 재미있게 오래오래…… 얼마나 많이…… 얼마나 많이 꿈꿨는데…… 하지만 어떡해? 여기까지 와버린 걸…… 나도 믿어지지 않아. 어떻게 이런 일이 한꺼번에 나에게 일어났는지…… 후우……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어…… 여긴 너무 까마득히 먼 곳이야…….”

말을 마친 은영이 탈진한 듯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댔다.

<계속>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헤드라인 뉴스

기준금리 인상 유력... 가계부채 증가세 빨라질 듯

기준금리 인상 유력... 가계부채 증가세 빨라질 듯
[현대경제신문 김영 기자] 한국은행의 11월 기준금리 인상이 유력한 가운데,...
포토뉴스
만평 조민성의 그림판
[만평]조민성의 그림판
가장 많이 본 기사
1
SPA업계, 대규모 할인 대전…“싸게, 더 싸게”
2
로스트아크, 오픈베타 캐릭터 초기화 없이 정식 서비스로
3
베일 벗은 '로스트아크'...스마일게이트, 대박 조짐에 '흐뭇'
4
잘 만든 로스트아크, 서비스는 ‘부실’
5
‘병점역 아이파크 캐슬’ 견본주택 북새통
6
정성립 대우조선 사장 “MJ FPSO 입찰 불참”
7
금호그룹 대우건설 우발채무 손배소송 곧 결판
8
금호건설, 광주·인천서 아파트 분양 완판행진
9
쌍용차株, 핵심 협력사 파업에 추가 급락 우려
10
에어부산 상장 예비심사결과 곧 나온다
'相生'에서 '希望'을 찾다!

삼성전기 ‘전국 장애인 배드민턴대회’ 개최

삼성전기 ‘전국 장애인 배드민턴대회’ 개최
[현대경제신문 차종혁 기자] 삼성전기가 전국 장애인 배드민턴대회를 28~29...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이메일무단수집거부청소년보호정책
서울시 마포구 마포대로 4길 18, 3층  |  대표전화: 02)786-7993  |  팩스: 02)6919-1621
인터넷신문등록번호: 서울 아02356  |  등록일: 2012.11.23  |  발행일: 1996.7.1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이도훈
Copyright © 2010 ㈜현대경제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