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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한 천사를 사랑했네> 30회 여름밤은 깊어만 가고②
이군산  |  kj.lee@finom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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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0.17  10: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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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인가…… 꿈인가…… 꿈인가……

옛날 신라시대, 조신(調信)이라는 중이 태수 김흔공(金昕公)의 딸을 깊이 연모하여 틈만 나면 낙산사 관음보살 앞에 가서 그 여자와 맺어주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러기를 수년, 여자에게 다른 배필이 생겼다. 조신은 법당에 들어가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며 저물도록 슬피 울다 깜박 졸았다.

그런데 그때 뜻밖에도 여자가 조용히 문을 열고 나타나 환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일찍이 스님을 먼 빛으로 잠깐 뵙고 마음 속으로 잊지 못하여왔으나 부모의 명을 어기지 못해 억지로 다른 사람을 따라갔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스님을 잊지 못해, 죽어 한 무덤에 들어갈 벗(同穴之友:부부)이 되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조신은 여인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40여 년을 같이 살며 자녀 다섯을 두었다. 그러나 집안이 점점 가난해져 끝내는 식솔을 이끌고 사방으로 걸인처럼 떠돌아야 했다. 명주 해현령 고갯길을 넘다가 큰아이가 굶어죽어 길가에 묻고, 남은 네 아이를 데리고 우곡현(羽曲縣) 길가에 초가집을 짓고 살았다. 부부가 늙고 병들어 거동을 못하게 되자 열 살 된 계집아이가 돌아다니며 밥을 빌어 겨우 끼니를 이었는데, 그 아이마저 개에 물려 앓아 눕게 되었다.

아내는 눈물을 씻고 말했다.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 나는 젊고 예뻤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고 따뜻한 옷도 함께 입으며 오십 년을 살아왔으니, 정도 들고 사랑도 못내 했습니다. 홍안의 미소는 덧없는 풀잎의 이슬이 되고, 지란(芝蘭) 같던 언약도 바람에 날리는 버들가지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내가 있어 누가 되고, 나는 당신이 있어 걱정이 많습니다. 이젠 함께 주리기보다 짝 잃은 새가 거울을 보며 짝을 부르는 게 낫겠습니다.

달리 방법이 없었으므로 아내의 뜻을 따라 아이 둘씩 맡고 헤어지기로 했다. 그리고 막 길을 떠나려하는 찰나, 홀연 정신을 차려보니 낙산사 관음보살 앞이었고 타다 남은 등잔불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꿈이었던 것이다. 하룻밤이지만 아주 긴 꿈이었는지 그 사이에 수염과 머리털이 하얗게 세어 있었다.

인생의 무상함을 깨달은 조신은 그 후 재물에 대한 욕망 여인에 대한 욕망 모두 끊고 재산을 털어 정토사(淨土寺)라는 절을 짓고, 좋은 업을 쌓으며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조신이 어느 땅에서 생을 마감했는지는 기록에 없다.

어차피 시간 밖의 세계로 나간 사자(死者)들의 입장에서 보면 인생 자체가 한바탕 일장춘몽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거나, 앞으로 죽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안고 산다. 존재의 숙명이다.

“우리 빨리 바다 내려가자.”

원통보전을 한바퀴 돌고온 은영이 말했다.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인가. 태양은 정확히 팔 분 전 모습이라고 한다. 시간은 수억 겹으로 무한히 분할되어, 그러나 순식간에 나를 지나간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내 앞의 사물은 정확히 0.002초 전의 사물이다. 환각이다.

“수영할 거야?”

“수영복 없어.”

“없으면 사면 되지.”

“그래도 안 해. 구경만 할 거야.”

0.002초 전에, 내 앞에서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참을 수 없는 노스텔지어를 불러일으키는 웃음. 그녀에게, 그리고 그녀와의 시간 속에 있는 나에게, 잡을 수 없고 되풀이될 수 없는 모든 순간 순간은 이미 까마득한 과거였다. 지금 내 손으로 어루만지고 있어도, 때때로 그녀는 이미 없어져 있는 사람 같았다.

“그래. 얼른 내려가자.”

나는 그녀의 팔을 잡았다.

얼핏 보면 여름해변은 낙원의 모습을 많이 닮아 있다. 눈부신 햇빛, 무한과 영원을 떠올리게 하는 바다, 끝없이 밀려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부드러운 모래사장, 그리고 타고르(Rabindranath Tagore)가 말한 아득한 나라 바닷가 아이들처럼 아무런 걱정 없이 웃고 마시고 뛰노는 반나체의 사람들. 이 낙원을 맛보기 위해 사람들은 일 년에 한번씩 기를 쓰고 일상을 탈출해 바다로 몰려나온다.

우리는 신발을 벗어들고 백사장을 걸어다녔다. 모래밭에 발이 푹푹 빠졌다. 백사장 곳곳에서 늘씬한 여인들이 오일을 바르며 선탠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모래찜질을 하는 사람들, 비치볼 게임을 하는 사람들, 사진 찍는 사람들, 아이스박스를 멘 행상들…… 우리는 사람들 사이를 천천히 걸어다녔다. 사람들 표정은 한결같이 여유 있고 행복해 보였다. 이 시간은 일상 바깥의 시간이다. 축제의 시간이다. 순수한 놀이의 시간이다.

백사장을 한 바퀴 돌고, 나는 은영을 잠깐 세워둔 채 혼자 주차장으로 갔다. 자동차 트렁크에서 은박 돗자리를 꺼내 다시 백사장으로 돌아갔다. 가면서 과일장수에게 포도를 몇 송이 샀다.

파라솔을 하나 빌려 돗자리를 깔고 포도를 씻어왔다. 나란히 앉아 포도알을 하나씩 까먹으며 바다를 보았다. 우리 왼쪽은 두 쌍의 젊은 남녀 파라솔이었고, 오른쪽은 학교 동문들로 보이는 20대 중후반 여자 예닐곱 명의 파라솔이었다. 그녀들 중 몇 명이 내년에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자고 의기투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년에…… 내년에…… 우리는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 하얀 물꽃 띠를 두른 파도가 끝없이 밀려들고 또 밀려들었다. 사람들은 환성을 지르며 파도에 먹히거나 파도 위로 떠올랐다. 방송국 헬리콥터가 낮게 떠서 해변을 찍었고, 그걸 보고 사람들은 손을 흔들었다. 멀리 물보라를 일으키며 모터보트들이 수면 위를 미끄러졌다.

“우리 모터보트 한번 타볼까?”

“싫어. 멀미할 것 같아.”

앉아만 있는 게 따분했는지 은영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물에 들어갔다. 그녀는 무릎 깊이까지만 나갔다가 파도가 밀려오자 허겁지겁 뒷걸음질쳤다. 그리고 파도가 밀려가면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고 파도가 밀려오면 뒷걸음질치는 일을 되풀이했다.

간간이 그녀가 나를 돌아보며 까르르 거품처럼 웃었다.

십 분 정도 물장난을 하다가, 그녀는 내 옆으로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 졸음이 온다면서 내 무릎을 베고 누웠다. 나는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수평선을 바라보고, 수평선 위에 펼쳐진 구름이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득하게 들려오는 환호소리, 즐거운 비명소리…… 간단없이 규칙적으로 밀려오는 파도소리…… 선글라스를 썼지만, 뜨거운 햇살이 자꾸 눈꺼풀을 무겁게 했다. 주변의 소음들이 멀어지면서, 대신 우웅 우우웅󰠏󰠏󰠏󰠏 하는 우주음(宇宙音)이 들려왔다. 해수욕장 주변 식당에서 나온 사람들이 계속 배달음식 전단지를 발치에 내려놓고 갔다.

오른쪽 파라솔의 여자 하나가 책으로 얼굴을 덮고 누웠다. 오일을 발라 번쩍이는 건강하고 탄력적인 몸이었다. 얼굴을 덮은 책을 힐긋 보니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이었다. 죽어버린 마을을 되살려놓은, 신에게나 어울릴 만한 놀라운 일을 혼자 힘으로 묵묵히 해낸 한 소박한 늙은 농부의 이야기. 칠 년 전 늦가을 어느 날, 은영이 그 책을 내게 선물한 적이 있었다.

조금씩 그림자가 길어졌다. 물놀이하는 사람들도 현저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우리 왼쪽 파라솔들이 치워지고 대신 그 자리에 서너 명의 아이들이 나타나 모래성을 쌓고 있었다. 나는 그새 깜박 잠든 은영을 깨웠다.

돗자리를 접고 백사장을 벗어나 모텔을 찾았다. 바가지들이 심했을 뿐 아니라 그나마 빈 방을 찾기도 힘들었다. 읍내로 나갈까 하다가 몇 군에 모텔을 더 돌아 평시의 다섯 배 되는 가격으로 빈방을 하나 얻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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