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좋다. 결혼식도 마쳤으니 이제 신혼여행 가야겠네?”

흐뭇한 얼굴로 액자와 사진이며 필름이 든 봉투를 가슴에 안고, 내 칠 월의 신부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세상은 어느덧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상쾌한 저녁바람이 기분 좋게 살갗을 스치고 지나갔다.

밤이 깊어갔다. 자동차가 36번 국도를 타고 백두대간을 넘어 울진으로 향했다. 빛의 띠처럼 구불구불 오르락내리락 이어져 산모퉁이 저쪽으로 사라지는 자동차의 미등들. 피크는 아니지만 바다로 향하는 많은 차량들이 줄을 잇고 있어, 운전하는 데 심심하지 않았다. 창문을 열면 여기저기에서 서로 다른 음악소리가 터져나왔다.

은영이 생각난 듯 카오디오를 틀었다. FM음악방송이 나왔다.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산울림의 <청춘>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은영이 볼륨을 올렸다. 심금을 울리는 김창완의 잔잔한 노랫소리가 차안 가득 맴돌았다. 가고 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 손짓에 슬퍼지면…… 차라리 보내야지 돌아서야지, 그렇게 세월은 가는 거야……

“야, 죽인다.” 은영이 나직하게 감탄의 소리를 냈다. “그런데 왜 이 아저씨는 노래 안 부르고 탤런트를 하는 거지?”

“가수보다 탤런트가 더 좋은가보지. 사실 가창력은 별로잖아. 고음도 안 올라가고.”

나를 두고 간 님은 용서하겠지만, 날 버리고 가는 세월이야……

“말도 안되는 소리. 고음 잘 지르는 게 가창력의 척도야? 가창력 좋은지 나쁜지 못 느낄 정도로 노래가 좋은데 고음 좀 시원하게 안 터지는 게 무슨 상관이야. 싸이는 뭐 가창력이 좋아서 떴남? 드라마에서 이 아저씨 보면 괜히 화가 나. 신이 그에게 준 진짜 달란트가 아까워.”

“랭보처럼 더 좋은 노래 만들 자신이 없어서 가수 그만둔 건지도 모르지. 어차피 영감 같은 건 다 고갈됐을 나이야.”

“하긴…… 그건 그렇다.”

산울림의 <청춘>이 끝나고, 약간의 멘트가 이어지고, 다른 노래가 시작되었다.

은영이 불쑥 입을 열었다.

“공자가 그랬다며? 아침에 도(道)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뜬금없는 말 같았지만 청춘, 세월, 랭보, 공자,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 어찌 보면 자연스런 연상작용의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어도’라는 말이 가슴을 찔렀다.

나는 못들은 척했다.

은영도 자기 말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오른쪽으로 희끗 불영사 안내판이 지나갔다. 쾅쾅 음악을 틀어놓은 빨간색 스포츠카가 우리를 추월해 지나갔다. 휙휙 지나가는 여름밤의 숲, 하늘을 수놓은 은하수, 엿가락처럼 휘어진 도로를 따라 높은 재를 얼마나 오르내렸을까, 산맥이 끝났다. 열린 창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소금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울진이었다.

울진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천천히 바닷가를 드라이브하다 깨끗해 보이는 모텔에 들어가 방을 잡았다. 우리는 결혼사진이 담긴 액자 두 개를 침대 양옆 머리맡에 올려놓고 잤다. 몸을 안자 그녀는 몇 번인가 장난스럽게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부끄럽사옵니다……” 하고 나를 밀어내고 몸을 움츠리고 하며 철모르는 어린 새색시 흉내를 냈다.

 

이튿날 일찌감치 일어나 7번 국도를 타고 주변경치를 감상하며 천천히 삼척, 동해, 강릉을 거쳐 양양으로 올라갔다. 갈매기들이 끼룩거리며 허공을 날고,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와 하얗게 거품을 물며 뒤집어지고 있었다.

어디쯤에선가 도로변을 걸어가는 노파를 태워주었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하도 오지 않아 걸어가는 중이라고 했다. 할머니가 사는 마을에 도착하자 할아버지가 나와 있었다. 할머니가 끼니때가 되었는데 식사라도 하고 가라고 하더니 조금 전에 늦은 아침을 먹었다면서 사양하자 진심이었는지 서운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자동차를 다시 출발시키자 뒤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나란히 서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꼭 늙은 소년 소녀 같네.”

“밥 먹고 가라니. 많이 적적하신가봐. 두 분만 사시는 거겠지?”

“그렇겠지. 자식들은 도시로 나가 명절 때나 찾아오고…….”

두 사람의 모습은 자동차가 커브를 돌면서 금방 사라졌다.

자동차가 주문진을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양양으로 들어섰다.

양양에는 내 외삼촌이 살고 있다. 여름 한철만 외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곳, 다른 계절에 오면 더할 수 없이 쓸쓸하고 적막하게 느껴지는 곳, 바람이 심해 양간지풍(襄杆之風)이라는 말까지 만들어낸 곳. 양양은 내게 그런 고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우리는 계속 7번 국도를 타고 가다 낙산사로 올라갔다.

관동팔경의 하나인 낙산사는 불교신자가 아니라 해도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학여행이나 여름휴가 때 한번쯤은 찾아오는 곳이다. 사는 일이 아득하고 막막할 때 겨울바다를 보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천천히 언덕길을 올라갔다. 피서철이라 그런지 평일치고는 비교적 관광객이 많은 편이었다. 우리는 사람들 틈에 섞여 느릿느릿 걸었다.

홍예문을 통과하자 낙산사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먼저 홍련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군데군데 숲은 아직 거뭇거뭇하게 십년 전 산불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의상대를 지나자 쏴아󰠏󰠏󰠏 바닷바람이 불어와 은영의 머리칼을 가볍게 날렸다. 얼핏 보니 은영은 눈살을 찌푸린 채 걷고 있었다.

홍련암으로 가는 길의 어디쯤 기와불사 접수하는 곳에서, 그녀는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내고 흰색 매직펜을 받아 기와에 ‘박서준 빛나는 삶!’ 이라고 썼다. 앞으로 오래도록 내 이름이 적힌 기와 한 장이 낙산사 지붕 어딘가에 남을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왜 네 이름은 쓰지 않느냐고 말할 수 없었다.

홍련암을 돌아나와 이번에는 해수관음상으로 올라갔다. 해수관음상은 한 손으로 감로수 병을 받쳐들고 다른 한 손은 천의(天衣)자락을 살짝 잡고, 인자한 얼굴로 바다를 굽어보고 있었다. 불자인 듯 보이는 관광객들은 그 앞에서 오체투지의 절을 했다. 우리는 해수관음상과 함께 동해바다를 한 번 보고, 원통보전으로 향했다.

원통보전은 낙산사의 중심법당으로, 대웅전이 없는 관음도량 낙산사의 본전 역할을 하는 곳이다. 내가 낙산사에서 가장 좋아해 항상 제일 나중에 찾는 곳이기도 하다. 십년 전 산불로 전소되었다가 몇 년 뒤 다시 복원되었다는 기사를 본 게 내가 접한 마지막 정보였다. 가까이 가자 담장이 군데군데 그을음을 입은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조산시대 별무늬 담장,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 34호, 안으로 들어가 안내판을 보니 ‘높이는 약 3.8m, 전체 길이 약 220m로 일부 원형이 남아 있고 대부분 2005년 산불 이후에 연결 보수하였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복원된 원통보전은 나 같은 비전문가가 보기에는 별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칠층석탑은 옛모습 그대로였다. 화마가 휩쓸고 가던 과거를 아는지 모르는지, 여기저기서 새들이 명랑하게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은영이 내 옆에서 떨어져 다른 관광객들과 함께 천천히 원통보전을 돌았다.

……꿈인가…… 꿈인가…… 꿈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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