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편애(偏愛)가 낳은 참극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無使滋蔓 蔓難圖也 무사자만 만난도야
(풀이) 무성해지도록 놓아두지 말라. 무성해지면 다스리기 어렵다. (春秋左氏傳)
정(鄭)나라 무공에게 동생 단의 반란 가능성을 무시하지 말도록 경고한 말

정(鄭)나라 환공이 주 유왕을 구원하려다 함께 죽은 뒤, 환공의 아들 굴돌이 대를 이어 무공(武公)이 되었다. 사건 후에 정나라 군주는 주 평왕에 의해 삼공(三公) 대열에 들어섰으므로 무공은 이 기회를 활용하여 나라의 영토를 넓히며 강국의 기틀을 다졌다.

이 와중에 무공이 신후(申侯)의 사위가 되었다. 변란의 와중에 무공은 신후의 요청으로 다른 제후국들과 함께 출동하여 도성에서 융적을 몰아냈으며, 평왕의 즉위를 돕는 동안 평왕과 신후의 신임을 얻게 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신후는 유왕의 장인이면서 평왕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했으므로, 무공은 천자의 동족이면서 외척이 된 것이다. 정나라는 상승가도에 올랐고, 모든 것이 순탄해 보였다.

부인 신씨의 이름은 무강(武姜)이었다. 무강은 아들 둘을 낳았는데, 첫째 아들의 이름을 오생(寤生)이라 했고 둘째를 단(段)이라 했다. 오생의 오(寤)는 잠에서 깨어난다는 뜻이다. <사기>와 <춘추좌전>에 따르면, 무강이 첫 아들을 낳을 때 난산이어서 무척 고생을 하며 낳았으므로 그런 이름을 지어주었다 한다. 반면 둘째 단을 낳을 때는 순산이었다.

아기를 낳을 때 산모들은 힘들게 낳기도 하고 손쉽게 낳기도 한다. 하지만 그 때문에 아기를 미워하거나 더 예뻐한다는 것은 (남자들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인데, 제후의 딸인 무강은 난생 처음 겪는 산고의 충격을 용납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무강은 고통스럽게 낳은 오생을 미워했다. 반면 둘째 단을 편애해서, 마치 아비가 다른 자식들을 기르는 사람 같았다. 아버지 무공에게 오생 대신 단을 후계로 삼으라고 권할 정도였다.

하지만 군주의 대를 잇는 일이 부인의 감정 때문에 바꿀 수 있는 문제던가. 무공은 그저 웃어넘겼다. 무공이 죽고 태자 오생이 대를 이었다. 그가 장공(莊公)이다. 그런데 무강은 여전히 장공을 미워하며 단이 군주가 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무강이 장공에게 단을 위해서 제(制)라는 읍을 주도록 청하자, 장공은 제읍이 험한 곳이라 적절하지 못하다고 만류했다. 대신 경(京)이란 큰 도성을 맡기고 단을 태숙(太叔)이라 부르게 했다. 대부 제중(祭仲)이 반대했다. “경읍은 도성보다 크니 장차 나라의 해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장공은 어머니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며 듣지 않았다. 제중이 다시 직언했다. “풀이 자라나는 걸 놓아두지 마십시오. 무성하게 자라난 뒤에는 제어하기가 어렵습니다(無使滋蔓 蔓難圖也). 잡초도 그러하거늘 임금을 조롱하는 아우야 더욱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장공은 말했다. “의롭지 못한 짓을 많이 행하면 반드시 스스로 방하는 법(多行不義必自斃). 그대는 오직 때가 오기를 기다려라.“

동생에게 어머니가 요청한 땅보다 더 크고 좋은 땅을 주었고, 칭호도 높여준 것은 분명 호의였다. 어머니가 무엇을 원하든 그 이상으로 해주었다. 그러나 어머니 무강은 고마워하기는커녕 여전히 작은 아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 떠나가는 단에게 무기를 준비하고 군사를 기르라고 당부했다. 단은 변방의 야만인들을 매수하여 거사에 동원할 대비도 해두었다.

보다 못한 공자 려(呂)가 말했다. “이제 백성들마저 혼란스러워하고 있으니 무슨 수를 내십시오. 만약 태숙에게 정권을 넘기실 생각이라면 저는 그 분을 따르겠습니다만, 그럴 생각이 아니시라면 당장 그를 제거하셔야 합니다. 이제 결단을 내리십시오.” 그러나 장공은 “손을 쓰지 않아도 스스로 화를 당할 것이다.”라고 답할 뿐이었다.

마침내 장공이 빈틈을 보이자 단은 어머니 무강과 거사 일자를 주고받았다. 사실 장공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단을 감시하던 중이었다. 곧 먼저 군사를 보내 경읍을 치니 단은 외국으로 도망치다 죽었다(사기에서는 단이 먼저 공격해왔으므로 반격한 것이라고 하였다).

어머니의 인정(認定)을 받고 싶다는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장공은 화를 터뜨리며 말했다. “황천(黃泉)에서 뵙기 전에는 어머니를 다시 보지 않겠다(不及黃泉 無相見也).” 그리고는 무강을 영(穎)이라는 변두리 성읍에 유폐시켰다.

- 이야기 Plus
정나라 장공과 어머니 무강의 이야기는 모정(母情)을 주제로 한 심리학 담론에 훌륭한 소재가 아닐까 한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사랑에 굶주렸던 장공은 동생이 거사를 일으키기 직전의 순간까지 세인(世人)들의 수군거림과 반역의 위험을 감내하며 어머니의 회심을 기다렸던 것이 분명하다. 출산의 고통 때문에 맏아들이 임금이 될 때까지 미움을 거두지 않은 어미의 고집은 연구과제다. 같은 배로 낳은 두 자식을 이리도 상반되게 대할 수 있다니. 상식적인 일은 아니지만, 둘러보면 이런 일은 우리 현실 속에도 종종 있는 것 같다.

어머니를 유폐시킨 장공의 속마음은 어땠을까. 그로부터 1년쯤 지났을 때 영읍의 고숙(考叔)이란 사람이 장공을 찾아왔다. 장공이 고숙에게 식사를 대접하는데 고숙이 음식을 절반이나 남기면서 말했다. “저에게 노모가 계시는데, 이 맛난 음식을 좀 가져가고 싶습니다.”

그제야 장공이 속마음을 내보이며 탄식했다. “그대가 부럽네. 내게도 어머니가 계시건만, 황천에서 볼 때까지 만나지 않겠노라 맹세했으니 어쩔 수가 없다네.” 장공은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고숙이 말했다. “황천이라 하면 저승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땅을 파서 물이 솟으면 그 또한 황천이니 누가 임금께 말을 바꾸었다 하겠습니까.” 장공이 탄복하며 수긍했다. 곧 물이 솟을 때까지 땅을 파게 하고 그곳 지하에서 어머니를 만나 화해하였다. 

어머니의 인정(認定)을 받고 싶다는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장공은 화를 터뜨리며 말했다. “황천(黃泉)에서 뵙기 전에는 어머니를 다시 보지 않겠다(不及黃泉 無相見也).”
그리고는 무강을 영(穎)이라는 변두리 성읍에 유폐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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