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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한 천사를 사랑했네> 23회 카르페 디엠, 현재를 즐겨라③
이군산  |  kj.lee@finom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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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7.25  10:3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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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다 스러질 것이라는 얘기는 그녀에게 아무 위안도 되지 않는다. 그녀도 알고 있다. 모든 것은 다 소멸된다는 것을. 삶은 안개처럼 왔다가 가는 더없이 ‘짧은 순간’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러나, 그렇게 빨리 스러지지는 않는다.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어린아이에게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흐른다. 반면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 노인에게 시간은 쏟아진다. 그녀에게도 아마, 지금, 치밀히 계산된 폭파공법에 의해 낡은 아파트가 무너져 내리듯, 시간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고 있을 것이다.

“나 어때, 이뻐?”

팔을 뻗어 한 송이 한 송이 들꽃을 꺾으며 걷던 은영이 어느새 그 들꽃송이들로 동그랗게 고리를 만들어 제 머리에 얹고 백치처럼 웃으며 물었다. 천진한 아이 같은 웃음. 무언가 지상의 것 같지 않은 아름다움이 그녀를 휘장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기우는 햇살, 짙은 녹음…… 나는 참지 못하고 와락, 그녀를 으스러지도록 껴안았다.

바람에 풀잎이 흔들렸다. 들꽃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아름다웠다. 이렇게 예쁜 것들이 지천이다. 그녀는 손끝으로 들꽃들을 어루만지며 걸었다.

 

대지는 점점 황금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급히 달려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으므로 나는 차를 느릿느릿 운전해 나갔다.

털털털털 차창 밖으로 경운기 한 대가 나타났다. 경운기에는 대여섯 명의 아낙이 타고 있었다. 모두 볕에 까맣게 탄 얼굴들이었다. 아낙들의 앞에는 각자 서너 개씩의 커다란 비닐봉지들이 놓여 있었다. 반짝거리는 세 발 자전거도 눈에 들어왔다. 장을 보고 오는 길인 것 같았다. 이삼 초 동안 내 눈에 비친 얼굴들. 그만큼이 지상에서 인연의 전부인 사람들. 경운기가 이내 뒤로 사라졌다.

마을이 나타났다. 텃밭의 상추를 뜯어 집으로 들어가는 아낙 모습이 보였다. 그 집 마루에는 소박하면서도 풍성한 저녁상이 차려져 있을 것이다. 나도 은영과 그렇게 살고 싶었다. 아무도 모르는 깊은 산골에서, 소리소문 없이, 옛날 이야기 주인공들처럼 살아볼 수 있는 데까지 원없이 사랑하며…….

길가의 작은 슈퍼 앞에서 잠깐 차를 세웠다. 가게 앞에 피크닉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우리는 음료수와 과자를 사들고 나와 피크닉 테이블에 앉았다.

들녘에 캄캄한 땅거미에 먹혀들면서 마을에 하나 둘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불빛들이 말할 수 없이 정겹게 보였다 어두워지면 집집마다 하나둘 창문에 불이 켜진다. 아이들의 재롱, 식탁에 둘러앉아 소곤대는 일상의 행복, 나날이 풀처럼 자라나는 아이들 바라보는 기쁨, 뻔하디 뻔한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며 오고가는 대화…… 가정이란 밤이면 불을 밝히고 사랑하는 사람끼리 저렇게들 모여서 사는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였던가,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났다고 말한 것은.

언제 목을 자를 도끼가 올지 모르는 그 지독한 󰡔1984년󰡕의 오세아니아에서도 윈스턴과 줄리아는 채링턴 씨의 고물상 다락방을 얻어 사랑을 나눈다. 창밖에서는 암말처럼 풍만한 엉덩이를 한 여인이 ‘하염없는 꿈이었네, 사월의 꽃처럼 스러졌네……’ 하고 노래를 부른다.

“은영아.”

그녀를 불렀다.

“우리 이렇게 막연히 돌아다니지 말고 어디 경치 좋은 곳에서 편하게 보내자. 지리산 오지 마을에 숨어 살자. 우리가 연락을 끊으면 적어도 몇 년은 조용히 살 수 있을 거야.”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안 돼. 자기 인생 다 망가져.”

“너와 함께 있다면 인생 같은 거 다 망가져도 좋아. 원래 인생은 망가지라고 있는 거야. 상처 없는 몸, 상처 없는 영혼, 그런 거 없어.”

“아직은 안 망가졌어.”

“난 이미 수배자의 도피를 돕고 있어.”

“자긴 내가 수배자인지 몰라. 그냥 철없는 애인이 여행하자고 졸라 함께 여행하는 거야.”

“……?”

“늦으면 늦을수록 동생이 위험해. 난 다 정리됐어.”

“무슨 말이야?”

“내가 죽으면 공소권이 없어지고, 살인죄도 같이 없어져.”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낡은 시골버스가 지나갔다.

“그러니까…… 나더러 너 자살하는 걸 보고만 있으라는 거니? 아무런 대책도 없이?”

“……미안해. 힘들겠으면 우리 여기서 헤어져.”

그녀가 내 시선을 피하며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괜찮아. 그래도 나 자기 조금도 원망하지 않아. 나도 알고 있어. 어려운 부탁이라는 거. 말도 안 되는 부탁이라는 거.”

그녀는 자신의 결심을 바꿀 의사가 조금도 없어 보였다.

나는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시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과연 이 방법밖에 없는가? 피할 수 없는가?

궁지에 몰리면 육체는 괴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정신은 오히려 한계에 갇혀 차분한 상태라면 가지 않아도 될 어리석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졌고, 동생을 감옥에 넣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자신이 살인했다고 경찰에 자수할 만한 배짱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벌써부터 위증이 밝혀질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마치 잠자리와도 같은 무력감이 나를 엄습했다. 언젠가 산란경호를 하는 수컷 잠자리의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다.

혼인비행이 끝나면 암컷은 수컷의 영역 내에서 배 끝을 물 표면에 스치며 알을 낳는다. 이때 수컷은 암컷이 알을 다 낳을 때까지 다른 수컷이 산란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경호 비행을 한다. 다른 수컷이 출현하면 가차없이 달려들어 자신의 영역 밖으로 내쫓아버린다. 그러나 잠자리 수컷은 다른 잠자리 수컷으로부터 자신의 암컷을 보호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람이나 다른 동물이 나타나면 수컷은 아무 역할도 못하고 혼비백산하여 암컷과 함께 도망치기에 바쁘다. 그것은 제아무리 용감한 수컷이라 할지라도 어쩌지 못하는 천재지변인 것이다. 사람 역시, 남자는 다른 남자로부터 자기 여자를 보호할 수 있을 뿐이다.

세상에 목숨 걸어서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목숨을 거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고, 세상에는 목숨만 걸어서는 풀리지 않는 일이 부지기수로 많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방법이 보이지 않을 땐 그냥 감정에 충실하면서 시간이 흘러가게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다. 땅거미 내리는 들녘에 가없이 길게 뻗은 검은 아스팔트가 보였다. 우리가 머물 수 있는 곳은 그곳뿐인 것 같았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우리는 길 위에 있고, 우리 앞에 또 길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길…… 영원한 길…… 세상에 왔다간 많은 불안한 영혼들이 보금자리를 펴야 했던 비운의 길.

“……이제 그만 가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잠깐 말없이 나를 바라보더니, 내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자살하겠다는 그녀를 혼자 모른 척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뭐가 옳고 뭐가 그른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것 하나는 분명했다. 끝까지 그녀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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