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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한 천사를 사랑했네> 22회 카르페 디엠, 현재를 즐겨라②
이군산  |  kj.lee@finom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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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7.18  14:5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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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훔쳤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언제? 어디서?”

“이십일 년 전 교회에서 여주로 수련회 간 적 있었지? 거기서 훔쳤어.”

“……맞아. 거기서 잃어버렸어. 믿어지지 않아. 그럼 그때 날 봤단 말이야?”

“응.”

“왜 훔쳤어?”

은영은 아직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뻔하지. 네가 이뻐서 어떻게 해보려고. 선녀와 나무꾼 얘기도 있잖아.”

“누구였는데? 우리 교회 다녔어?”

“아니. 친구들하고 거기 캠핑 갔다가 우연히 널 봤어. 그때 하천에 텐트 치고 놀던 고등학생들 기억 안 나?”

“몰라. 기억 안 나.”

나는 약간 서운했다.

“아, 말도 안 돼. 이십일 년 전부터…… 그러니까 이십일 년 전부터 날 알고 있었단 말이잖아. 그런데 왜 말을 안 했어?”

“그냥…… 언젠가 말하려고 했는데 그럴 기회가 없었어. 그리고 사실은 순간순간 너도 그 사실을 알고 있고, 우리가 그때부터 사귀기 시작한 것으로 착각하기도 했었어.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그래, 그렇게 나는 나 자신이 만든 환상에 속았고, 속아서 행복했다.

“참 신기해…… 신기해…….”

은영은 하모니카에서 눈을 떼지 않고 한동안 이리저리 문지르고 쓰다듬으며 만지작거렸다. 마치 이십일 년 전 자신의 흔적을 찾으려는 듯이. 그녀의 얼굴 너머로, 논 위에 참새들을 쫓기 위해 쳐놓은 비닐 테이프들이 작은 바람에도 펄렁거리며 번쩍번쩍 빛을 퉁겨내고 있었다.

“예전에 난 하모니카를 불 때마다 항상 하모니카를 불며 길 떠나는 멋진 소년나그네를 떠올리곤 했는데…….”

그녀가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작은 악기에는 어떤 자유, 낭만, 방랑자의 향수 같은 게 있었거든. 그런데 이제 하모니카는 낡고 조잡한 악기 취급을 받아. 가버린 우리 청춘처럼.”

하긴. 그러고 보니 뒷집 여자애는 클라리넷, 피콜로, 단소, 플루트 그리고 오카리나까지 그토록 다양한 악기를 지겹게 불어대면서도 하모니카는 불어본 적이 한번도 없다. 우리는 아마 하모니카를 청춘의 악기로 기억하게 되는 마지막 세대인지도 모른다.

“미안해. 그때 이거 잃어버려서 많이 속상했지?”

“새삼스럽게 무슨. 다 잊었어.”

“미안해. 지금 너한테 하는 말이 아니라 열다섯 살 황은영한테 하는 말이야. 열다섯 살 황은영한테, 그때 내가 많이 미안해했다고 말 전해줄래?”

“아이구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은영이 웃으며 내 가슴을 탁 쳤다.

“알았어. 전해줄게.”

바람이 시원하게 한쪽 창으로 들어와 다른 쪽 창으로 나갔다.

은영이 다시 말했다.

“이 하모니카는 우리는 아무것도 완전히 소유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해줬어. 우리가 뭔가를 소유한다는 건 그것이 잠시동안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는 뜻일 뿐이야. 이런 반지, 옷, 신발, 모두 시간이 지나면 우리 곁을 떠나가. 머리칼도, 손톱도, 심지어는 피부도…….”

너무 심각해지는 것 같아 나는 그녀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돌아왔잖아.”

“그래, 돌아왔어.”

맴맴맴맴 처르르르르…… 갑자기 가까운 나무 위에서 매미가 울었다. 매미 울음소리가 시원한 바람처럼 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런데…… 그럼 칠 년 전에 나 알아보고 말 건 거야?”

“당연하지. 이 하모니카가 계속 내 곁에 있었는데. 솔직히 이게 없었으면 다시 만나지 못했을걸. 아마 이름도 잊어먹었겠지…… 사람들이 첫사랑 얘기를 하면 나는 강변에서 하모니카 불던 황은영이라는 여학생을 떠올렸어. 더 웃긴 건, 그 후 아무리 예쁜 여자를 봐도 그 여자 이름이 황은영이 아니라는 이유로 내 마음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는 거야.”

“말도 안 돼. 황은영이란 이름이 어디 그렇게 흔한가?”

“흔하지 않지. 그리고 하모니카를 불 줄 알고, 장난치기 좋아하고, 착하고…… 턱 밑 요기에 흐릿하게 넘어져 다친 흉터가 남은 황은영이라는 여자는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지. 나는 바로 이 여자를 기다린 거야. 이 여자가 내 가슴속에 들어앉아 십 년 동안, 아니 이십일 년 동안 나가질 않고 버티는데 어쩌라구.”

나는 그녀의 볼을 장난스럽게 쥐어뜯었다.

그녀가 풀풀 웃으며 하모니카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입술을 오므려 취주구에 대고 몇 번 불더니, 맑은 소리가 나오자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십일 년이나 지났는데 소리가 잘 나오네?”

“일 년에 한두 번밖에 안 불고, 그때마다 꼬박꼬박 청소를 했거든.”

“자기도 하모니카 불 줄 알아?”

“그럼.”

그녀가 하모니카를 나에게 내밀었다.

“불어줘.”

나는 하모니카를 받아들고 그녀가 좋아하는 <헤이 쥬드>를 불었다. 그녀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이기도 했다. Hey Jude, don't make it bad. Take a sad song and make it better……♩♬~~♪♩♪~~~♩♩♬♪~~♩♬♪…… 이봐 쥬드, 그렇게 나쁘게 받아들이지 마. 슬픈 노래는 더 좋게 만들어봐. 네 가슴속에 그녀를 받아들이는 걸 잊지 마. 그러면 좋게 시작할 수 있을 거야…… 그녀가 하모니카 소리에 맞춰 나직하게 노래를 불렀다.

차에서 내려 그녀와 함께 손잡고 논둑길을 걸었다. 그녀는 계속 <헤이 쥬드>를 콧노래로 흥얼거렸다. 지하철 환승역에서 꾸역꾸역 밀려나오는 사람들, 수시로 바뀌는 대형 전광판의 속보, 과중한 업무, 끝없이 울리는 전화벨, 원하지 않아도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는 술자리, 가면을 쓴 얼굴들…… 서울에서의 모든 일들이 전생처럼 멀게 느껴졌다.

서(西)를 보아도 벌판, 남(南)을 보아도 벌판, 북(北)을 보아도 벌판, 아󰠏󰠏󰠏 이 벌판은 어쩌자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 놓였을꼬?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먹었노?

폐결핵에 걸린 댄디보이 이상(李箱)의 권태로운 절규가 떠올랐다. 나는 이상이 이해되면서 이해되지 않았다. 20세기 경성 촌뜨기 이상을 답답하게 했던 ‘한없이 늘어진 초록’은 반대로 21세기 메트로폴리스 서울시민인 나의 가슴을 트이게 해주고, 위안해주었다.

논둑길 잡초 사이사이로 나팔꽃들이 보였다. 제 주변의 잡초들을 닥치는 대로 감고 올라와 내일 피울 꽃봉오리들을 파란 꽃받침 사이로 삐죽삐죽 내밀고 있는 ‘아침의 영광’들. 나팔꽃은 하루살이 꽃으로 아침에 피고 저녁이면 시든다. 여름이 끝날 때까지 잘 자란 나팔꽃에서는 백 송이 정도의 꽃이 피었다가 진다. ‘허무한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정절을 지키려는 미망인이나 수절하는 과부들은 나팔꽃의 바람둥이 기질이 눈에 거슬려 심지 않았다고 했던가.

잠자리 몇 마리가 우리를 따라다니며 날았다. 나비가 날았다. 개구리가 뛰고 메뚜기가 뛰었다. 그녀는 얼마나 오래 살 것인가. 저 잠자리만큼? 메뚜기만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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