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나보니 방 안에 햇빛이 가득했다. 나는 물을 몇 모금 마시고 창문을 열었다. 풍경이 어제와 달랐다. 똑같은 물건이,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풍경이 문득 다른 질감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별안간 낯설어지는 것이다. 나는 반쯤 죽음의 세계에 발을 담근 기분이었다. 세상의 가치판단이 그대로 적용될 수 없는 어떤 특별한 세계. 풍경이야 물론 그대로일 테지만 달라진 내 시각 때문에 무엇 하나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모든 친숙하고 낯익은 것들이 아주 빠르게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은영은 오래 전부터 그 무섭도록 쓸쓸한 풍경 속을 혼자 털레털레 걸어왔을 것이다.

모텔을 나와 눈에 띄는 첫 번째 식당으로 들어갔다.

은영이 말없이 뒤따라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금방 청소를 끝냈는지 깨끗한 바닥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테이블도 깨끗했다. 종업원이 주문을 받는데도 은영은 멀뚱멀뚱 유리문 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뭐 먹을래?” 내가 물었다.

“……아무거나.”

“‘아무거나’라는 음식은 없어.”

그제야 그녀가 식당 안을 두리번거리며 메뉴판을 찾았다.

“……산채비빔밥.”

“산채비빔밥 둘요.”

종업원이 머쓱하게 웃으며 돌아갔다.

손님이라곤 계속 우리 둘밖에 없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우리는 내내 말이 없었다. 맛있는 나물들은 섬유질을 씹는 맛이었고, 밥은 모래알 같았다. 나는 서너 숟갈 뜨다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녀도 입맛이 없는지 형식적으로 이것저것 떠먹다가 슬그머니 나를 따라 수저를 내려놓았다.

“다 먹은 거야?”

“……응.”

지갑을 꺼내 계산을 치르고 식당을 나왔다. 은영이 말없이 뒤따라 나왔다.

자동차에 올라타 시동을 켜고 천천히 가속페달을 밟았다. 밤새 내린 비로 거리 곳곳에 물이 괴어 있었고, 그 물은 파란 하늘을 비쳐주었다. 그래서 대지는 곳곳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보였다.

“고마워.”

은영이 문득 말했다.

“뭐가?”

나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가능하면 따뜻하게 대해주고 싶은데, 잘 되지 않았다. 오히려 울화가 치밀었다.

“그냥…… 그냥…….” 그녀가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우물거렸다. 그녀의 머리칼에서 햇빛이 부서져 튀었다.

나는 묵묵히 운전을 계속했다.

나는 이제 갈 데까지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내가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그 방법밖에 없었다. 2 더하기 2는 꼭 4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5가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7이 되기도 한다. 그게 인생이다.

나는 지리산을 넘을까 하다가 남원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자동차가 하천을 끼고 들길을 달렸다. 가로수 그림자들이 시원스레 차창을 지나갔다.

창밖의 풍경은 미치도록 아름다웠다. 지난밤 흠뻑 물먹은 들판은 한결 싱그러운 초록을 자랑하고 있었다. 작렬하는 태양, 벼들이 싱싱하게 자란 들녘, 맑은 물 흐르는 하천, 풋풋한 숲, 벼포기 사이에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백로들…… 은영은 팔짱을 낀 채 고개 돌려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반쯤 돌려진 그녀의 어깨가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어제 오후부터 우리는 서로 열 마디도 나누지 못한 상태였다.

계속 그렇게 황금 같은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물리적 우주의 시간은 멈추지 않고 계속 같은 속도로 흐른다. 그녀는 모든 가능성을 박탈당하고, 그래도 사랑이라고 마지막으로 나를 찾아온 것이다. 그녀를 외롭게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함께 가기로 했으면 빨리 분위기를 바꾸자. 조금이라도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자. 죽음이 아니라 삶을 살게 하자. 삶은 움직이는 것이다. 넘쳐흐르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끌기 위해 헛기침을 하고 큰소리로 쾌활하게 노래부르기 시작했다.

“내 두 눈 밤이면 별이 되지. 나의 집은 뒷골목 달과 별이 뜨지요…… 두 번 다시 생선가겐 털지 않아. 서럽게 울던 날들 나는 외톨이라네…… 이젠 바다로 떠날 거예요. 거미로 그물쳐서 물고기 잡으러…… 나는 낭만 고양이, 슬픈 도시를 비추는 작은 별빛…… 나는 낭만 고양이이이…… 홀로 떠나가 버린 깊고 슬픈 나의 바다여어어어…….”

장난스럽게 고래고래 노래부르는 나를 힐끔거리며 은영이 비죽 웃었다. 그녀의 밝아진 모습이 나를 환하게 했다.

“뭐야 이 기분 나쁜 웃음은.”

“자긴 정말 노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못 부른다. 어떻게 음정 박자 하나도 맞는 게 없어.”

“참내. 이젠 콩깍지가 다 벗겨졌다 이거지.”

“삼 년 이상 가는 콩깍지가 어딨냐? 뭐 그래도 <짱가>는 들을 만했어. 그땐 정말 감동 먹었어.”

“오우 짱가.” 나는 오른손으로 핸들을 탁 쳤다. “어디선가, 누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짜짜짜짜짱가 엄청난 기운이, 틀림없이 틀림없이 생겨난다, 지구는 작은 세계 우주를 누벼어라. 짱가, 짱가, 우리들의 짜앙가! 짱가, 짱가!”

씻긴 듯 푸른 들판이 그녀의 뒤로 휙휙 지나갔다. 들녘은 온통 푸른 기운으로 충만되어 있었다.

그래. 우리는 모두 시간 속에 갇힌 유한한 존재. 과거는 가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사랑할 수 있는 건 오직 현재뿐이다.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해야 한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지금-여기(here and now)’에 장미가 있다. ‘지금-여기’에서 춤추자.

 

야트막한 언덕을 넘자 작은 리 단위 마을이 나왔다. 초등학교가 보이고, 농협 연쇄점이 보이고, 공터가 보이고, 파출소가 보이고, 식당과 노래방이 보이고…… 그리고 마을이 끝났다. 다시 들판이 나오고 하천이 나왔다. 하천을 옆에 끼고 달렸다. ‘오리고기 전문식당’ ‘영양탕’ 등 화살표를 단 간판들이 지나갔다.

멀리 작은 뜸마을이 보였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에 숲처럼 무성한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눈길을 끌었다.

나는 속도를 줄이고 차도에서 벗어나 그 길로 들어섰다. 길 한쪽에 차를 세우고 양쪽 창문을 활짝 열었다. 바람에 비비적거리는 잡초, 벼들이 익어가는 너른 들판, 바로 옆으로 아스팔트 도로를 쌩쌩거리며 자동차들이 달리고 있었지만 그 길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한적했다.

나는 콘솔박스에서 하모니카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웬 하모니카야?” 은영이 물었다.

“뭔지 모르겠어?” 나는 쑥스럽게 웃었다. “네 하모니카야.”

“그게 무슨 말이야?”

은영이 하모니카를 넘겨받았다. 나무 그림자가 자동차 앞유리창에서 소리없이 일렁였다.

“어, 어…….” 굳게 닫힌 기억의 문이 열리듯 그녀의 표정이 변했다. “세상에. 이거 내 이름…… 뭐야, 정말 내 하모니카잖아! 이걸 어떻게 자기가 가지고 있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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