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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한 천사를 사랑했네> 16회 바다가 보이는 휴게소, 비창①
이군산  |  kj.lee@finom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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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4.18  09:3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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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이라도 비가 쏟아 부을 듯 날이 흐렸다. 해남이었다. 주택가의 구불구불 이어진 야트막한 돌담들이 예쁜 소도시. 남쪽, 따뜻한 곳, 달마산, 어란, 땅끝…… 해남에는 치과를 개업한 친구가 살고 있다. 아내와 자식들도 함께 내려와 살고 있다.

읍내의 식당에서 늦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은영이 화장실에 간 사이, 전화기를 켰다. 몇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나는 전화번호부에서 해남에 사는 친구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녀만 괜찮다면 친구의 가족들과 함께 땅끝마을에 가서 싱싱한 생선회에 술을 마실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전화로 인해 여행은 완전히 다른 국면을 맞았다.

“너 전화기 끄고 행방불명 됐더라.” 친구는 대뜸 말했다.

벌써 해남까지 소문이 났나?

나는 후후 웃으며 “그렇게 됐다.” 하고 말했다.

“경찰이 너 찾는 것 같던데.”

“경찰이 왜 나를 찾아? 잘못 알고 있는 거겠지.”

“정말이야. 네가 아는 어떤 여자가 죄를 지었나봐. 잘은 모르겠다.”

종업원이 빈 그릇들을 치우고 식탁을 행주로 닦았다.

“……어떤 여자? 이름이 뭔데?”

“잘 모른다니까. 아무튼 해남이면 보자.”

“아니, 여긴 진안이야. 가면서 시간 나면 들를게.”

본능적으로 거짓말이 나왔다. 잘은 모르지만 은영과 함께 그를 만나면 유쾌하지 못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아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친구가 말하는 ‘어떤 여자’가 은영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었다.

은영이 화장실에서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지 않고 얼른 전화기를 껐다. 그리고 그녀가 돌아오자마자 “나가자.”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을 나와 자동차에 올라타자마자 곧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자동차가 해남 읍내를 벗어나 땅끝마을을 향해 달렸다.

 

찌뿌둥한 날씨 탓인지 친구의 전화가 계속 신경 쓰였다.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여자들을 떠올려보았다. 그러나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여자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고󰠏나는 어떤 종류의 인간관계든 소수정예를 선호하는 편이다󰠏 누구도 친구가 말한 ‘어떤 여자’와 연결되지 않았다. 남은 여자라곤 은영이밖에 없었다. 불시에 내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첫날 안동에서 그토록 말이 안 통한 것도 이상하고, 그렇게 나를 보내놓고 나서 전화를 걸어 대뜸 여행하자고 한 것도 돌이켜 생각하면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또 그러고 보니 그녀는 정말 전화기가 없는지 그날 나에게 공중전화로 걸었다. 그녀는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 게다가 나는 지난 오 년 동안의 그녀에 대해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죄라니? 거기서 생각이 막혔다.

터미널 같은 데서 본 현상수배 벽보가 머릿속을 스쳐갔다. 어처구니없어 웃음이 나왔다.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미담(美談)이라면 모를까, 은영은 어떤 범죄와도 연관이 될 수 없는 여자였다. 혹시 외국인노동자 관련 일로 시국사범이 된 것 아닐까 하는 의문이 잠깐 들었으나 지금이 서슬 퍼런 공안정국 시절도 아니고, 그럴 가능성 역시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 말고 또 다른 ‘내가 아는 어떤 여자’는…… 없었다.

화산 삼거리 지나 어디쯤에선가 잠깐 차를 세우고 구멍가게에서 담배를 한 갑 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창 밖으로 바다가 보였다. 은영이 “와, 바다다.”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녀는 바다 구경에 여념이 없었고, 나는 나대로 생각에 잠겨 계속 해안도로를 운전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땅끝마을을 지나쳐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나는 차를 돌리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어떤 여자, 네가 아는 어떤 여자…… 범죄……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렇게 얼마쯤 달렸을까, 바닷가 옆에 작은 휴게소가 나왔다. 우회전 등을 켜고 휴게소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았다. 나도 모르는 동안 오래 참았는지 소변이 많이 나왔다. 그리고 캔 음료 두 개를 사들고 자동차로 돌아왔다.

캔 뚜껑을 따 그녀에게 내밀고, 나도 내 몫의 캔을 몇 모금 마셨다. 나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 상태로는 도저히 계속 웃으며 여행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궁금해서 그러는데…… 왜 갑자기 여행을 하자고 한 거야?”

그녀가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말했잖아. 그냥 자기랑 여행하고 싶었다니까? 자긴 그럴 때 없어?”

내 망설임이 무색할 정도로 그녀의 대답은 너무도 쉽고 간단했다.

“난 알고 싶어. 왜 말도 없이 연락을 끊었는지, 오 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그리고…… 왜 갑자기 나타나 여행을 하자는 건지.”

“나중에 말할게. 지금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 지금은 머리 비우고, 그냥 이대로 돌아다니고 싶어.”

분명히 뭔가가 있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경찰이 날 찾고 있대.”

“……그게 무슨 말이야? 어디 전화했었어?”

금방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짧은 순간 그녀의 얼굴을 스쳐간 당황의 빛을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 경찰이 왜 자길 찾아? 무슨 벌금 안 낸 거 있어?”

그녀가 과장스런 동작으로 캔 음료를 벌컥벌컥 소리내어 마시고 이리저리 FM 사이클 맞추는 시늉을 했다. 딴전을 피우는 것이었다. 정말 죄를 짓고 쫓기는 중이란 말인가?

“은영아.” 나는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 속이는 거 싫어. 더 이상 날 바보로 만들지 마.”

한동안 차안에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그녀의 뒤로 바람 없는 날의 바다가 보였다. 아수라를 감춘 바다.

“……얼만큼 아는 거야?”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사실인 모양이었다. 갑자기 심장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몰라. 내가 아는 어떤 여자가 경찰에 쫓기고 있다는 사실밖엔.”

그녀가 체념한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다 말할게…… 다 말할게. 이제 와서 숨길 게 뭐가 있겠어…….”

나는 창문을 열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나도 모르게 손이 떨렸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한 집안 망하려니까 정말 엄청나게 빨리, 무섭게 빠져나가더라. 아빠 수술비로 집 팔고, 차 팔고, 적금 날아갔는데……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게 하나 남았는데, 그 가게 보증금마저 사기를 당했어. 아빠 친구한테. 하루 막을 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이틀만 빌려주면 이자도 섭섭잖게 준다고 해서…… 엄마가… 아빠친구니까 그래도 믿고 빌려줬는데…… 그냥 사라진 거야. 엄마는 화병으로 앓아눕고, 동생은 졸업반인데도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를 했어.”

“아버지 친구가?”

“나중에 알아보니 아빠 사고 당하시기 전에 서로 사이가 안 좋았대. 연락처 아는 사람도 없었고…… 엄마는 그것도 모르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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