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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한 천사를 사랑했네> 14회 들에 핀 백합을 보라②
이군산  |  kj.lee@finom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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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4.04  1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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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때까지 켜져 있던 텔레비전을 끄고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모로 누워 마치 기도하듯 양손을 모아 얼굴 앞에 둔 채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아랫배가 가볍게 오르락내리락하며 규칙적인 숨소리를 냈다. 투명하게 빛나는 손톱, 흰 뺨, 아름답게 흐트러진 머리칼, 가느다란 어깨…… 색색거리며 잠든 해맑은 얼굴이 속세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사라지는 꿈은 아닐까 싶어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져 보았다. 그녀는 약간 몸을 뒤챘을 뿐 잠에서 깨지 않았다.

은영아.

나는 잠든 그녀를 향해 속삭였다.

네가 없는 지난 오 년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니?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뭔가 조금만 특별한 날이면 네가 그리워서 견딜 수 없었어.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내 마음속에는 늘 네가 들어 있었어. 너 비슷한 사람을 보면 하루 종일 아무 일도 못 했어……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괜찮아, 네가 다시 나에게 왔고, 그거면 난 됐어…… 이제 다신 내 앞에서 말없이 사라지지 마. 나 너무 아프게 하지 마…….

언제 잠들었는지 모른다. 눈을 떠보니 은영이 옆에 쪼그려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TV 화면 오른편에 10:15라고 시간이 적혀 있었다. 그녀도 금방 일어났는지 흐트러진 머리매무새만 만지고 세수는 안 한 얼굴이었다. 나는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일어났어?”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응”

손바닥에 힘을 주자 살큼, 그녀의 살이 잡혔다. 순간 손바닥으로부터 온몸으로 물결처럼 번져나가는 쾌감…… 꿈이 아니었다. 이 감촉, 이 향기. 아아, 아침마다 이렇게 널 얼마나 안고 싶었는지.

연남동 ‘우리 집’이 아니라는 사실이 조금 쓸쓸했지만, 그래도 그녀가 흐트러진 모습으로 편안하게 내 앞에 앉아 있으므로 행복했다. 그녀가 다시 ‘내 여자’로 돌아온 것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커튼을 젖히자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푸른 들판이 보였다. 은영이 침대에서 내려와 내 옆으로 왔다. 그리고 뒤에서 나를 안았다. 그녀의 뺨이 가만히 내 어깨에 닿았다.

그때 갑자기 탁자 위에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은영이 화들짝 놀라 포옹을 풀었다.

회사에서 온 전화였다.

여직원이 왜 아직 출근하지 않는 거냐고 물었다.

나는 엉겁결에 상가집에 와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둘도 없는 친구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면서, 아무래도 내가 자리를 비우면 안 될 것 같으니 휴가를 앞당겨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여직원은 편집장에게 전화기를 돌렸다. 나는 여직원에게 했던 거짓말을 되풀이했다. 그나마 마감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은 상태라 다행이었다.

얼굴에 웃음기를 띠고 전화 통화하는 나를 지켜보던 은영이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편집장이 얼마나 걸리겠느냐고 물었다. 일주일은 걸리겠다고 하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슨 일로 일주일씩이나 있어야 하느냐고 추궁하더니, 내가 계속 머뭇거리며 답을 못하자 한숨을 쉬며 다음 달 기사나 차질 없도록 하라면서 전화를 끊었다.

나는 예, 예,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는 말만 되풀이했다. 간신히 휴가를 허락받고 다시 며칠 후 인터뷰 약속이 잡혀 있는 여성작가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막연히 딜레이시켰다. 작가는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시큰둥하게 편하신 대로 하라고 했다. 나로서는 처음 하는 어려운 부탁들이라 그 두 통화만에 힘이 쭉 빠졌다.

 

“전화 다 했어?”

욕실에서 나오며 은영이 물었다.

“응.”

“그럼 이제 전화기 꺼. 우리 둘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어.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창밖으로 파란 하늘에 몇 점의 구름이 미끄러지듯 유유히 흘러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 인생은 때로 이런 파격도 필요한 것이다.

나는 메일과 문자들을 확인하고 전화기를 껐다.

“미안해.” 하고 은영이 말했다.

“뭐가?”

“나 이기적인 사람 아닌데, 자기한테는 한없이 이기적이야. 미안해.”

내 표정이 조금 심각해 보였나보다. 나는 환하게 웃어보였다.

“미안하긴. 그래서 내가 행복한데. 나한텐 한없이 이기적이어도 돼.”

“아니야…… 정말…… 미안해…….”

“바보. 미안하면 앞으로 평생 내 옆에 딱 붙어 있어.”

모텔을 나왔을 때는 거의 열한 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우리는 모텔 옆의 식당에 들어가 매운탕으로 요기를 했다. 그런 다음 식당을 나와 슈퍼에서 담배 한 갑과 생수, 과자 두 봉지를 사들고 다시 자동차에 올라탔다. 나는 시동을 걸고 물었다.

“가고 싶은 곳 다 말해. 데려다줄게.”

“그냥 아무 데로나 가. 길이 있는 데면 아무 데로나.”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맑고 투명한 미소.

“그래도 특별히 가고 싶은 데가 있을 거 야냐.”

“없어. 그냥 특별한 목적지 없이 떠돌면서 저기 가 볼까? 저기 가 볼까? 그러면서 여행하고 싶어.”

“흠.” 하고 나는 빙긋 웃었다.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브르통이었던가. 아름다움은 발작적인 것이라고 말한 사람은.

“오우케이. 레츠고!”

액셀을 밟았다. 부웅, 경쾌한 소리를 내며 자동차가 앞으로 튕겨나갔다.

이과 출신의 내 친구 하나는 사랑을 일종의 감정조절장애 질병이라고 했다.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질병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매혹적인 질병 한 번 걸리지 않는 돌덩이 같은 심장으로 세상을 살고 싶은 마음 추호도 없는 사람이다.

맑게 개인 하늘, 상쾌한 바람, 그렇게 멋진 여행이 시작되었다. 막연히 남쪽으로 향했다. 논길 밭길 구릉을 따라 길은 끊임없이 이어져 마을과 마을, 도시와 도시들을 연결시키고 있었다.

분명히 지난 오 년 그녀에게는 말못할 심각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다 끝났다고 했지만 과거는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늘 그림자를 남긴다. 어떤 식으로든 현재의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우리는 오 년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그녀가 다시 사라지지 않는다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녀만 내 옆에 붙어 떠나지 않는다면, 우리 둘이 해결 못할 일이라는 게 있을 수 없었다.

 

자동차가 앞으로 밀려가면서 끝없이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마주 오는 차 앞유리창에서 부서지는 투명한 햇살, 초록이 절정에 달한 여름 들녘, 일제히 화르르 날아오르는 참새들, 먼 산의 숲, 신호등, 길가의 웃자란 잡초들, 들꽃들, 하찮은 모든 것들이 스스로 충만한 의미를 지니고 자신의 존재를 자랑하고 있었다. 심지어 유리창에 낀 작은 티끌마저도 우주의 광채를 반영하고 있는 듯했다. 모든 것이 다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이 부셨고 행복했다. 생애 최고의 휴가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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