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만나지 못한 지난 오 년 동안, 나는 아무쪼록 그녀가 행복하게 지내고 있기만을 바랐다. 가능하면 결혼하지 않았기를 바랐고, 건강하게 살며 이따금 나를 기억해주고 있기를 바랐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었다.

“어디예요?”

서안동 IC를 빠져나올 때 그녀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목소리에 조바심이 실려 있었다.

“다 왔어. 안동시내로 들어가는 중이야.”

“아까 내린 데 거기 있을 게요.”

“응. 조금만 기다려.”

셔터 내린 상점들, 나트륨 등만 싸늘하게 빛나는 텅 빈 거리, 풍경들이 빠르게 뒤로 밀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 안동역이 보였다. 나는 속도를 늦추고 바깥차선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오른쪽 방향등을 켜고 광장 한 끝에 차를 세웠다. 차량통행이 드물어 뒤에서 클랙슨을 울리는 자동차는 없었다. 나는 유리창을 내리고 담배를 피워물었다. 낮에 붐비던 광장은 텅 비어 있었다. 담배 한 개비가 다 탔을 때쯤, 어디선가 은영이 나타나 자동차 옆으로 다가왔다. 화장기 없는 얼굴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하얗게 떠올랐다.

손짓을 하고 조수석 문을 열어주자 그녀가 앞을 돌아 머쓱하게 웃으며 자동차에 올라탔다. 나는 방향등을 켜고 백미러를 보면서 액셀을 밟았다.

 

사거리에서 U턴을 하고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시내를 빠져나와 34번 국도를 탔다. 숨바꼭질을 하듯 구름 속으로 달이 흘러가고 있었다. 예천을 지나 문경으로 갔다. 그리고 문경에서 다시 상주 방면으로 갔다. 운전을 하면서 간간이 오른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손을 빼지 않았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어두운 언덕, 어두운 숲, 어두운 들판…… 멀리 드문드문 불빛, 그로테스크하게 서 있는 송전탑, 하늘의 별…… 주위에 아무 불빛도 없는 곳을 달릴 때는 자동차가 마치 우주공간을 날아가는 것 같았다. 하늘에 빛나는 무수한 별들처럼, 지구 역시 하나의 작은 별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작은 별 안에 또 먼지처럼 작은 존재인 우리 두 사람이 밤길을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어디쯤인가 휴게소 불빛을 만났다. 자동차 속도를 줄이고 휴게소 앞으로 갔다.

“출출하지 않아?”

“……조금.”

“뭐 좀 먹자.”

차에서 내리자 그녀가 쭈뼛쭈뼛 따라 내렸다.

그녀의 등을 살짝 밀며 휴게소로 들어가 우동 두 그릇을 주문했다. 더운 날이지만 한밤중 휴게소에서는 우동을 먹어줘야 한다. 휴게소 간판으로 날벌레들이 어지럽게 날아들었다.

은영은 후후 불며 말없이 우동 그릇을 비웠다. 짧은 순간, 나는 우리가 남녀사이라기보다는 그녀가 가출한 여동생이고 나는 그런 여동생을 마침내 붙잡아 밥을 사 먹이는 오빠 같다는 착각에 빠졌다.

“한 그릇 더 시킬까?”

“아니…… 됐어.”

휴게소를 나올 때는 은영이 옛날처럼 살그머니 내 팔을 잡았다. 먼 숲에서 매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차를 타고 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천 옆에 불 밝힌 모텔건물을 만났다. 낮에는 주변 경치가 더없이 좋을 것 같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여기 어떠냐는 의미로 그녀의 얼굴을 보자 그녀가 말없이 숄더백을 챙기고 차문을 열었다.

프론트에서 키를 받아들고 키에 적힌 번호대로 3층 객실을 찾아 들어갔다. 창에 연분홍 빛깔의 얇은 커튼이 쳐진 정갈한 방이었다. 침대 위에 개인 이불과 베개 두 개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은영은 방 안을 둘러보더니 가방을 내려놓고 테이블 앞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랫배에서 작은 일렁임이 느껴졌다. 이제 우리는 이 방에서 함께 밤을 보낼 것이다. 팔을 뻗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가 내 손에 자기 손을 가져다 댔다. 그녀의 겨드랑이에 팔을 넣고 일으켜 세워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나는 어깨를 안고 있던 손을 허리 쪽으로 내려 셔츠 속으로 집어넣었다. 매끄러운 속살이 손바닥에 와 닿았다. 그녀가 웃으며 나를 밀어냈다.

“씻고 싶어. 끈적거려.”

그녀가 가방을 들고 거울 앞으로 갔다. 그리고 뒷머리를 모아 올리더니, 가방에서 머리고무줄을 꺼내 머리채를 고정시켜 묶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모습. 요리를 할 때 그녀는 늘 그렇게 머리를 뒤로 묶었다. 나는 속옷 차림의 그녀에게서보다도 그 모습에 더 가슴 설레곤 했었다. 대충 틀어올려 핀을 지르거나 고무줄로 묶은 것일 뿐인데, 그리 고와보일 수 없었다. 그것은 색정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머리카락에 가려졌던 하얀 목덜미의 아름다운 노출, 위로 쓸어올려진 머리카락들과 양어깨로 흘러내리는 목덜미의 흑백에 가까운 대비, 미(美)가 거기에 있다.

그녀가 욕실로 들어가고, 나는 텔레비전을 켜고 에어컨을 켰다. 타일 바닥으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은영이 목욕수건으로 몸을 가리고 욕실에서 나왔다.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은 젖무덤, 잘록한 허리…… 확실히 그녀의 몸은 이전보다 많이 야위어 있었다. 힘주어 안으면 그대로 부서질 것 같은 몸이었다. 그녀가 춥다고 했다. 나는 에어컨을 끄고 대신 창문을 조금 열었다.

이번에는 내가 욕실에 들어가 몸을 씻었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이를 닦고 나오자 그녀가 홑이불을 덮고 침대 머리맡에 등 기대고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침대로 올라가 그녀 옆에 누웠다. 나의 속살이 고스란히 그녀의 속살에 닿았다. 가만히 손을 뻗어 어깨를 잡아당겼다. 그녀가 나에게로 넘어져왔다. 그녀의 몸에서 엷게 비누 냄새가 났다. 익숙한 몸, 그러나 아직은 눈앞에 있어도 아득하기만 했다. 그녀를 안았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

“몸이 좀 아팠어.”

“왜 연락을 끊었어? 왜 전화하지 않았어? 오 년 동안 뭐 하고 지낸 거야?”

나는 참지 못하고 한꺼번에 질문을 퍼부었다.

“닦달하지 마. 지금 만났잖아.” 그녀가 인상쓰며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많이 힘들고 복잡했는데, 이제 다 끝났어.”

 

내 품에 안겨 짜증내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비로소 그녀가 예전의 그녀로 돌아온 것 같은 안도감이 느껴졌다. 거기에는 한때 함께 살 섞고 살았던 여자의 응석이 들어 있었다. 정말 돌아왔구나……. 우리는 이제 삼십대 후반, 얼마든지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다. 어차피 이제 나와 함께 있기로 했으므로, 나는 일단 모든 궁금증을 뒤로 미루기로 했다.

그녀의 뺨을 싸쥐고 입을 맞추었다. 그녀가 너무 약해져 있어 나는 그녀를 부드럽게 다루어야 했다. 내 손길이 닿을 때마다 그녀가 악기처럼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몸을 떨었다. 그녀의 몸이 서서히 달아오르고 숨소리가 커졌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가 발갛게 홍조 띤 얼굴로 내 등을 잡아당기며 몇 번인가 “아, 행복해. 너무 행복해. 죽어도 좋아……” 하고 뜨거운 탄식을 내뱉었다.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어깨에, 가슴에, 땀이 배어 나오면서 살꽃들이 아름답게 피었다. 머릿속으로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열풍이 불고…… 절절 끓는 바다가 펼쳐졌다…… 아주 가끔 멀리서 자동차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탈진한 듯 가늘고 긴 숨을 토해냈다.

피곤했는지 그녀는 욕실에 다녀오자마자 이내 색색거리며 잠이 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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