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여성지 기자가 되었다. 주로 쓰는 것은 연예인, 자동차 판매왕, 베스트셀러 작가, 성공한 여성 등 화제인물 인터뷰 기사다. 조폭 두목의 아내를 인터뷰한 적도 있다.

내 기사는 튀었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제목, 아름다우면서 발랄한 문체, 결론을 도출하는 방법의 독창성󰠏󰠏󰠏 이상이 내 기사에 대한 대체적인 평이다. 그러기 위해 나는 부단히 노력을 해왔다. 기자를 꿈꾸던 대학시절부터 정치인, 경제인, 작가, 연예인, 스포츠 스타 등 각계각층을 상대할 수 있는 잡학을 쌓아왔고, 기자가 되고 나서도 그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매번 인터뷰 상대자를 만날 때마다 꼼꼼히 사전지식 챙기는 일을 잊지 않았으며, 기사는 마음에 들 때까지 몇 번이고 고쳐 썼다. 밤도 많이 새웠다.

 

2008년 9월 중순, 문래동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 센터를 찾았다. 센터의 대표인 여성 인권운동가를 인터뷰하기 위해서였다. 센터의 주력사업은 노동상담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이 월급을 받지 못하거나 산업재해를 당하고도 보상받지 못할 때 도와주고 있었다. 그밖에 의료지원, 한국어 교습 등의 일을 하고 보름에 한 번씩 나눔장터를 열기도 했다. 참고로 내가 인터뷰한 센터 대표는 유명한 진보정당 정치인의 여동생이었다.

그곳에서 한 여자를 보았다. 상근 간사라고 했다. 화장을 안 하고 청바지에 남방을 걸친 수수한 차림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자주 눈이 갔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지만 생각나지는 않았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는 대표의 사진을 찍고, 사무실 풍경도 여러 장 찍었다. 당연히 상근 간사의 얼굴도 사무실 풍경 속에 들어 있었다. 그녀의 책상 옆 보드에는 일정표와 중요한 메모가 적힌 포스트잇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동남아 이주 노동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도 몇 장 붙어 있었다.

며칠 후 그곳에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전화를 받아 활발하고 붙임성 있는 목소리로 대표님은 자리에 안 계시다고 말했다. 물론 나는 대표가 자리에 없다는 것을 알고 전화한 것이었다. 나는 이러이러한 문제로 전화 왔었다는 말을 대표에게 전해달라면서 “실례지만 전화 받는 분 성함이 어떻게 되죠?” 하고 물었다.

“저요? 황은영이라고 합니다.”

황, 은, 영. 내 가슴이 툭 하고 한 계단 내려앉았다. 황은영. 고등학교 이 학년 여름방학 이후 한번도 잊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그래. 어쩐지 낯익은 얼굴이라 했더니…… 내 어설픈 첫사랑, 바로 그녀였다.

 

다음 날, 퇴근시간에 맞춰 문래동으로 갔다. 다시 만나게 된 게 신의 뜻이라면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내 존재를 알려줘야 했다. 가을비 내리는 저녁이었다. 나는 센터 사무실 근처 빌딩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붉은 낙엽들이 거리 이곳저곳에서 비바람에 파득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나타났다. 청바지에 운동화, 위에는 가을 스웨터에 어깨에 숄더백을 멘 차림이었다. 그녀는 우산 없이 빠른 걸음으로 내 앞을 지나쳐갔다.

그녀에게 달려가 우산을 씌워주었다. 그녀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아, 이 얼굴. 이 얼굴의 무엇이 그토록 오랜 세월 내 마음을 붙들어놓은 걸까.

그녀는 약간 당황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나를 알아보고 어쩐 일이시냐고 물었다. 나는 일이 있어서 온 건 아니고 근처에서 지인과 헤어지고 빗길을 걷고 싶어 걷다보니 아는 길이라 그런지 이쪽까지 오게 됐노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쯤 걷다 술 생각이 나는 날씨라면서 ‘괜찮다면 같이 한잔’ 하지 않겠느냐고 공손하게 물었다. 그녀가 걸음을 멈추더니 아하, 그런 거였구나, 하는 표정으로 쓰윽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를 한꺼번에 스캔하듯 바라보았다. 다행히 나를 아무 여자에게나 찝쩍거리는 막돼먹은 인간으로 보는 시선은 아니었다.

“왜죠?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를 세 가지만 대봐요.”

테베의 길목을 지키고 있던 스핑크스처럼, 그녀가 정색하고 물었다. 이 관문을 통과해야만 그녀의 사적 영역에 발을 디딜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내 제의를 묵살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반은 승낙한 셈으로 봐도 좋았다. 나는 자신감을 얻었다.

“첫째, 술 생각이 나는 순간 제 옆에 당신이 있는 겁니다. 마치 ‘둘이 함께 술을 마셔라’라는 하늘의 계시처럼.”

“그건 그쪽 입장이죠.”

그건 그렇다. 그게 그녀가 나와 술을 마셔야 하는 이유는 되지 못한다. 나는 그래도 밀어붙였다.

“둘째, 비가 오네요.”

“그게 이유가 되나요?”

“됩니다. 그리고 셋째. 이게 핵심인데, 당신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오늘 그냥 돌아가면 나는 아마 평생 후회하게 될 겁니다.”

웃었다. 그녀가 웃었다.

그녀가 내 대답에 만족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긴장을 푼 것만은 분명했다.

다시 길을 가다 버스정류장 근처에서 걸음을 멈추고 지하 호프집을 가리켰다. 그녀는 거절하지 않았다.

술을 앞에 두고, 형식적으로 몇 마디 업무 얘기를 하고는 곧장 화제를 개인적인 대화로 옮겼다.

나는 오리아나 팔라치와 오프라 윈프리 얘기를 하고, 세상에 카파이즘이라는 말을 생기게 한 전설적인 종군기자 로버트 카파 얘기를 하고, 우리시대의 가장 막강한 예술 장르인 영화 이야기를 했다. 서른넷 젊은 나이에 영양실조로 죽어간 아름다운 여자 시몬느 베이유를 좋아한다는 말도 했던 것 같다.

그녀도 내가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는지 자연스럽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지직거리며 돌아가는 LP소리가 야릇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펠리니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고 기형도와 산울림, 비틀즈를 좋아한다고 했다. 대학에서는 사회복지를 전공했고, 종교복지시설에 자원봉사를 많이 다녔다고 했다. 중학교 때부터 배구를 했는데 선수로 뛰어본 적은 없다는 말도 했다. 하모니카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말하는 도중 그녀는 간간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뭔가 무한한 것을 찾는 듯한 눈빛이었다. 가족들은 어디 사느냐고 묻자, 오 년 전 고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가 정년퇴직하신 후 고향 합천에 중저가 브랜드의 옷가게를 차렸는데 함께 이사했지만 그 사이 언니가 출가하고 남동생이 군에 입대해 현재 합천에는 부모님 두 분밖에 안 계신다고 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합천에 따라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니까 자취생활이 오 년째 접어든 셈이다. 센터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이 년 되었고, 현재는 당산동에서 작은 옥탑방을 하나 전세로 얻어 살고 있다. 치맥을 좋아하고, 프라이드치킨보다는 바비큐치킨을, 양식보다는 한식을, 특히 매운 음식들을 좋아한다.

 

나는 짧은 시간 정말 많은 정보를 끄집어냈다.

기자가 되어 내가 터득한 것 중 가장 좋은 것은 ‘듣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고 싶어하지 않은 타인의 비밀을 끌어내는 기술. 잘 들어주면서 드문드문 웃는 얼굴로 문을 두드려 열어주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기술. 자기 성질을 죽이고 타인의 기분을 잘 맞춘다는 면에서 아부의 일종인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그 기술로 나는 인터뷰이들로부터 내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끄집어낸다. 물론 적당한 선에서 멈추는 기교도 배웠다.

 

호프집을 나와 마을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 앞에서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다음에 또 찾아와도 오늘처럼 만나주실 거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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