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희용 내외정책홍보원 원장.
권희용 내외정책홍보원 원장.

동서고금을 가릴 것 없이 빈곤은 인류와 가장 오래도록 싸워온 적이다. 인류의 역사가 바로 이 가난이라는 적과의 전쟁을 기록한 것이라고도 한다.

아직도 세계도처에서 가난과 치열한 투쟁을 벌이는 곳이 많다. 굶어죽는 현장이 바로 인간과 가난이 생존을 놓고 벌이는 현장이다. 멀리도 아닌 한반도 북녘이 바고 그곳이다.

그곳에서의 생존이 불가능해서 남쪽으로 도피한 사람들이 무려 3만하고도 5천여명에 이른다. 일컬어 정치적인 압박을 피해서 혹은 자유를 찾아왔다고도 한다. 그러나 궁극적인 이유는 그 땅에서는 생존이 불가능해서 피해온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그들을 품어줘야 할 지도자들이 책임을 방기한 때문이다. 그래서 난민이 날로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국경을 틀어막아도 소용이 없다. 목숨을 내놓고 먹기 위해, 먹을 곳이 있는 곳으로 넘어오는 사람들을 막을 길은 없다.

그들이 체제불만 때문에 나고 자란 자신의 나라를 등지고 사투에 뛰어든 것이 아니다. 오직 먹고 살기위해서다. 그들이 버린 땅에 지금이라도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이라도 갖춰진다면 굳이 목숨을 건 탈북은 없을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이 오늘과 같은 가난과의 전쟁에서 연패의 늪에 빠져 허덕이는 까닭은 뻔하다. 이제는 헌신짝만도 못한 이념놀음에 빠져 어언 1세기 가까이 허우적거리고 있어서다. 그런데도 그들은 한줌도 되지 않는 독재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빛에 바래고 거의 부러진 깃대에 너널거리는 사회주의 깃 폭을 여전히 떠받들고 있는 형국이다. 그것마저 놓아버리면 그들은 곧 죽음이라는 상상을 하고 있다.

동구권사회주의의 몰락을 그들은 지켜보아 안다. 또 이락, 남미 등 독재국가의 수뇌들의 패망을 눈뜨고 지켜본 것이다. 그들은 지금 헐벗은 사회주의 탈에 흉기를 들고 세계인을 향해 행패를 부리는 꼴이다.

그들이 어쩌다 이런 꼴이 되었을까. 발단은 ‘똑같이 벌어 똑같이 나누어 먹고 살자’고 한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인간본성에 대한 통찰이 부족해서였다는 근원적인 진단이 내려진지 오래다. 집권자의 도덕성이 무뎌진 까닭이라는 처방도 진부하다. 단하나, 인간은 그 체제를 지속적으로 굴러가게 할 존재가 못 된다는 결론이 보다 정확하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라’는 경구는 인간 삶의 지속화를 위한 핵심이다. 저들은 이 경구를 한때 소홀하게 여긴 것이다. 처음에는 나누어주고 먹었다. 그러다가 생산량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일을 하기 싫어서다. 일을 하지 않아도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지배층의 노예가 되었고 그리고 굶어 죽거나 살기위해 탈출을 해야 했다. 최고지도자라는 자들은 채찍과 흉기로 무장을 하고 자신들만의 성체에서 노예들을 향해 온갖 압박을 가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이제라고 알량한 이념을 버릴 엄두를 낼 용기도 없어 보인다. 거의 80여 년간 쏟아 낸 거짓말더미에 스스로 깔려 죽을 것 같아서다.

사실 그들은 노동 없이 노동자들을 부려먹었다. 그러면서 노동자들의 근로의욕을 북돋기는커녕 인간본성의 갈등구조를 이용한 감시체제만을 강화했다. 그러다가 경제는 말라갔고, 삶은 피폐해 졌다.

일을 안 해도 먹고사는 경제논리는 없다. 하늘도 이제는 만나를 내려주지 않는다. 일자리가 없는 청년들에게 매달 돈을 주겠다거나, 세금으로 최저임금을 보전해주겠는 경제대책은 대책이 아니다. 나라를 망쳐 버리겠다고 독약을 뿌리는 것이나 다르지 않다.

나고 자란 땅을 등진 이들의 행로를 보면서, 내년도에 실시하겠다는 유래 없는 경제정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종잡을 수 없다. 이유 없는(?) 선심을 쓰겠다는 말의 본뜻을 묻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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