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항우와 유방②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大行不顧細謹 大禮不辭小讓 
대행불고세근 대례불사소양
큰 일을 할 때는 자잘한 절차에 매이지 않고, 큰 예의는 작은 허물을 따지지 않는다 
번쾌가 패공에게, 위기를 벗어나야 할 때 하직인사 따위는 중요치 않다며(항우본기)

이튿날 아침 일찍 패공은 약속대로 항우의 진영을 찾아갔다. 백여 기의 수행원만이 뒤를 따랐다. “신이 본의 아니게 관중에 먼저 진입하여 진군을 무찌르고 이곳에서 다시 장군을 뵈올 수 있게 되었는데, 지금 소인배의 참언으로 하여 장군과 신 사이에 틈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공손히 사죄하자 항왕은 누그러졌다. “공의 좌사마인 조무상이 그리 말한 것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화를 냈겠소.” 그리고는 함께 술을 마시자며 패공을 붙잡았다.

“죽음도 두렵지 않은데 술 한 잔쯤이야”

항우의 전략가로 범증(范增)이 있었다. 항우는 그를 아부(亞父)라 부르며 존중했는데, 범증은 일찍부터 패공 유방의 범상치 않음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항우가 패공을 공격하려 했을 때 범증은 “패공의 용모는 용과 범의 기세로서 오색찬연하니 천자의 기세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반드시 그를 없애야만 합니다”라고 부추겼으며, 패공이 찾아온다는 말을 듣고는 다시 한 번 기회를 놓치지 말고 그를 처치하라고 다짐을 두었다.

낮부터 주연이 시작되었다. 술이 몇 순배 돌았을 때 범증이 항우에게 눈짓을 보냈으나 항우는 세 차례나 이를 무시하고 묵묵히 술만 들었다. 답답해진 범증은 잠시 일어나 밖으로 나가서는 항우의 사촌이며 장수인 항장을 불러 말했다.

“군왕의 사람됨이 모질지 못하시니, 아무래도 그대가 나서야겠네. 곧 들어가서 두 사람에게 축수를 올리고 검무를 추게나. 그러다가 기회를 보아 패공을 앉은자리에서 쳐 죽여야 하네. 지금 그리하지 않으면 장차 그대들은 모두 패공에게 포로가 될 것이야.”

항장이 들어가 검을 뽑아들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의도를 눈치 챈 항백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춤은 어우러져야 제 맛이지”하고는 자신도 검을 빼들고 춤을 추었다. 항장이 패공에게 다가갈 때마다 항백이 그 사이에 끼어들어 항장은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상황이 위급해지자 장량이 잠시 밖으로 나가 군문 앞에 기다리고 있던 번쾌를 만났다. 
“상황이 위급하다. 지금 항장이 검을 뽑아들고 춤을 추는데 그 의도는 오로지 패공을 해치는 데 있다.” 

말을 듣자마자 번쾌는 “신이 들어가 주군과 생사를 같이 하겠습니다”하고는 즉시 일어나 군문으로 들어갔다. 막아서는 경비병을 방패로 밀어붙이자 경비병은 땅에 엎어졌다. 

번쾌가 장막을 들치고 들어가 맞은편에 앉아 있던 항우를 부릅뜬 눈으로 노려보는데, 머리카락은 위로 곤두서고 눈꼬리는 찢어질대로 찢어져 있었다. 항우가 급히 한쪽 무릎을 세우고 손으로 검을 잡으면서 “그대는 무엇하는 자인가?”하니 장량이 얼른 “패공의 참승 번쾌라는 자입니다”하고 소개했다. 항우가 안심하며 “장사로다. 그에게 술을 한잔 내려라” 하니 즉시 큰 잔에 술이 주어졌다. 번쾌는 감사의 절을 하고 일어나 단숨에 마셔버렸다. 항우가 다시 “그에게 돼지 다리를 주어라”하자 익히지 않은 돼지 다리가 주어졌다. 번쾌는 방패를 땅에 엎어놓고 그 위에 돼지 다리를 올려놓은 뒤 검을 빼서 잘라 먹었다.

항우가 “장사로다. 더 마실 수 있겠는가?”하자 번쾌는 “신은 죽음도 피하지 않는 사람인데 술 한 잔이야 어찌 사양하겠습니까.”하고는 유방을 위하여 짧게 변증하여 말했다.

“지금 패공께서는 먼저 진군을 무찌르고 함양에 진입했으면서도 터럭만한 작은 물건 하나 감히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궁실 문을 굳게 닫아두고 패상으로 물러나 대왕께서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 봉후의 상을 내리지는 못할망정 소인배들의 쓸데없는 말을 들으시고 죽이려 하신다면 이는 멸망한 진나라를 잇는 꼴이 될 뿐입니다. 대왕을 위하여 그리하지 않는 것이 옳으신 줄 압니다.”

항우는 그에 대해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고 다만 ‘앉으라’고 자리를 권했다. 

“장차 권력을 빼앗을 자는 패공이다”

항우는 술에 취해가고 있었다. 번쾌가 장량과 함께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패공이 측간에 가는 척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두 사람이 뒤를 따랐다. 이미 날이 어두웠다.

“지금 하직인사도 하지 않고 잠깐 나왔는데, 어찌하면 좋겠는가?” 
번쾌가 대답했다. “큰일을 할 때는 자질구레한 예절쯤은 신경 쓰지 않는 법입니다. 지금 바야흐로 저들이 칼과 도마가 되고 우리는 그 위에 놓인 물고기가 된 지경에 무슨 인사말이 그리 중하십니까.” 

두 사람의 의견에 따라 패공은 항우와 범증을 위해 가져온 패물을 장량에게 맡기고 그곳을 빠져나갔다. 항우의 부하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샛길로 빠져나가느라 수레와 말을 놓아둔 채, 번쾌 하우영 근강 기신 등이 칼과 방패만 든 채 걸어서 패공을 호위했다. 겨우 끌고나온 말 한 필에 패공이 올라앉았다. 항우의 진영에서 패상 군진까지 40리길. 패공 일행이 샛길을 따라 빠른 걸음으로 본진에 다다른 무렵에야 장량은 안으로 들어갔다. 

“패공은 어디 있는가?” 정신을 가다듬어 묻는 항왕에게 장량이 대답했다. “패공께서는 술을 이기지 못하여 먼저 떠나셨는데, 이미 군영에 당도했을 것입니다. 대신 신에게 가져온 선물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항우는 구슬을 받아 곁에 두었는데, 범증은 받은 패물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검을 뽑아 쳐서 깨뜨리며 역정을 터뜨렸다. “에잇, 어린아이와는 더불어 대사를 도모할 수가 없도다. 이런 기회를 놓치다니. 장차 항왕의 천하를 빼앗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패공일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의 포로가 될 것이다.” 

한편 무사히 본진에 도달한 패공은 즉시 조무상을 끌어내 목을 베었다.

“큰일을 할 때는 자질구레한 예절쯤은 신경 쓰지 않는 법입니다. 지금 바야흐로 저들이 칼과 도마가 되고 우리는 그 위에 놓인 물고기가 된 지경에 무슨 인사말이 그리 중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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