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천하통일(6) - 자객 형가③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相樂也 已而相泣 상락야 이이상읍
서로 즐거워하고 서로 울기도 하다 <刺客列傳>  
형가와 고점리가 축을 타고 노래 부르며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나타낸 말          

진나라에 도착한 형가는 천금이나 되는 예물을 진왕의 총신 몽가에게 건네주었다. 몽가가 연나라를 위해 말을 잘 해주었으므로 형가는 진왕에게 직접 선물을 바칠 기회를 얻었다. 

빗나간 형가의 비수 

함양궁에서 격식을 갖춘 증정의식이 열렸다. 형가가 번오기의 머리가 담긴 함을 받들고 어전으로 나아갔다. 형가를 수행한 조수 진무양이 지도를 들고 그 뒤를 따랐다. 진무양은 13세에 사람을 죽였을 정도로 대담하여 사람들이 감히 마주 보지 못한다는 청년이었는데, 진왕 어전의 계단 밑에 이르자 겁에 질려 안색이 변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곁에 있던 신하들이 이상히 여기자 형가는 무양을 돌아보며 씩 웃고 나서 사죄하여 말했다.  

“북방 오랑캐 땅에서 살던 자라 여태껏 천자를 뵌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떨며 두려워하는 것이오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무례를 용서하소서.”  

그러자 진왕이 형가에게 말했다. “진무양이 들고 있는 지도를 가지고 올라오라.”

우연스럽게도 형가는 곧바로 진왕의 면전까지 근접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형가가 지도를 들고 올라가 왕에게 바치니, 진왕이 손수 지도를 받아 펼쳐보았다. 두루마리로 된 지도가 다 펼쳐지는 순간, 그 안에 감춰두었던 비수가 드러났다. 형가는 순식간에 왼손으로 진왕의 옷소매를 붙들고 오른손으로 비수를 잡아 진왕을 위협하려 했다. 그러나 진왕이 순간적으로 몸을 당겨 일어나는 바람에 비수가 옷소매를 자르고 진왕은 몸을 피할 수 있었다. 왕이 놀라서 얼른 곁에 있던 칼집을 잡고 장검을 뽑으려 했으나 칼이 뽑히지 않았다. 장검이 너무 길고 칼집에 너무 굳게 꽂혀있었던 것이다. 

몸을 피하는 진왕에게 형가가 달려들었다. 왕은 급한대로 기둥을 끼고 돌며 달아났다. 

밑에 있던 군신들이 모두 놀라 일어났으나, 졸지에 일어난 일이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진나라 법에 의해 왕좌 아래서 왕을 모시는 신하들은 아무리 조그만 무기라도 몸에 지닐 수 없었다. 

무기를 들고 왕을 지키는 낭중(郎中)들은 문밖 전하(殿下)에 있었으며, 왕이 부를 때에만 전상에 올라설 수 있었다. 왕이 다급하여 그들을 부를 틈이 없었으므로 형가만이 왕을 쫓아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무기가 없는 대신들은 급한 마음에 맨손으로 달려들어야 했다. 시의(侍醫) 하무저가 마침 약주머니를 들고 있다가 그것을 형가에게 집어던졌다. 형가가 주춤하는 틈에 신하들이 왕에게 외쳤다. “칼을 등에 지십시오.” 진왕이 그제야 칼집을 등에 지고 칼을 뽑았다. 손에 비수 한 자루뿐인 형가는 진왕이 휘두른 칼에 왼쪽다리가 끊어졌다. 쓰러지면서 비수를 진왕에게 던졌으나 빗나가 구리기둥에 맞았을 뿐이다. 

진왕의 칼이 형가의 몸에 여덟 군데 상처를 입혔으며, 곧 좌우의 신하들이 쓰러진 형가에게 달려들었다.  

고점리의 마지막 일격 

진나라의 보복공격은 예상된 일이었다. 진왕은 원정군을 증파하여 연을 공격하니 연나라 왕과 태자 등은 정예병을 이끌고 요동(遼東)으로 달아났다. 진나라 군대가 그 뒤를 좇았다. 

“연나라가 추격을 받는 이유는 태자 단 때문입니다. 그를 죽여 목을 진왕에게 바친다면 진왕의 노여움이 풀릴 터이니 연나라의 수명이 연장되어 사직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변 제후들이 충고했다. 단은 강 가운데 있는 작은 섬으로 달아나 몸을 숨겼으나, 연왕은 그를 찾아 목을 베어 진나라로 보냈다. 그러나 이즈음 진나라의 목표는 단순한 보복이나 패권다툼이 아니라 천하통일이었다. 진왕을 달래놓고 숨을 돌린 것도 잠시, 진나라는 이미 모든 제후국들을 제압한 상태에서 다시 군대를 보냈다. 5년 뒤에 연나라는 멸망했다.

진나라는 이즈음까지 명맥이 붙어있던 초(楚) 조(趙) 연(燕)나라를 차례로 병합했다. BC 222년의 일이다. 진왕이 스스로를 황제(皇帝)라 부르며 중국 천하에 유일한 제왕이라 선포한 것은 이듬해였다. 진시황(秦始皇)이란 명칭은 이때 생겼다. 

자객 형가의 일은 두고두고 당대와 후대까지 되새김되고 있다. 

그를 태자에게 추천하고 자결한 전광(田光)이나 단지 그 의리를 따라 아무런 조건 없이 자기 목숨을 던진 형가의 일은 이후 많은 무림 협객들의 귀감이 되었다. 진시황은 목숨을 건진 직후 전상에서 자신을 보호하려 맨손으로 달려든 대신들을 공로에 따라 치하했다. 약주머니를 던진 하무저가 황금 200일(鎰)로 가장 큰 포상을 받았다.  

예전에 조나라에서 형가를 얕보고 시비를 벌여 위협한 적이 있는 갑섭과 노구천은 형가의 무용담을 듣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노구천은 형가의 실패를 안타까워하면서 “내가 그를 몰라보고 함부로 꾸짖었구나. 그때 내가 얼마나 같잖게 보였을까”라고 중얼거렸다. 

한편 형가가 죽은 뒤에 성명을 바꾸고 머슴으로 떠돌던 고점리, 진시황 앞에서 축을 타던 고점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자객 형가의 절친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즉결처분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고점리의 축 타는 솜씨는 신기(神技)에 가까웠다. 진시황은 그를 죽이는 대신 눈만 멀게 해서 계속 음악을 연주하도록 했다. 

시력을 잃은 고점리는 오랫동안 진시황 앞에서 축을 연주했다. 이제는 옛 원한을 잊고 연주에만 몰입하는 듯도 했다. 진시황이 그를 점점 가까이 하게 되었을 때, 고점리는 납덩어리를 축 속에 감추어두고 있다가 어느날 느닷없이 진시황을 겨냥하여 축을 내리쳤다. 

그러나 하늘이 시키지 않는 한, 앞 못 보는 악사의 공격이 성공했을 리 없다. 진시황은 결국 고점리를 죽이고, 다시는 피점령국 출신의 사람들을 가까이 오게 하지 않았다. 

지난 2002년 중국에서 만들어진 ‘영웅’이란 영화(장예모 감독)는 자객 형가의 일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든 또 하나의 되새김이다. 줄지은 자객들의 공격에서도 진시황은 매번 운 좋게 살아남았다. 영화에 ‘천명(天命)’이란 말이 나온다. ‘지존’이란 권력은 과연 하늘에서 내는 것인가. 

지도 속에서 비수가 드러나는 순간 형가는 재빨리 비수를 잡아 찌르려 했다. 진왕이 순간적으로 몸을 피하며 장검을 뽑으려 했으나 칼이 뽑히지 않았다. 달아나는 왕을 형가가 뒤쫓았다. 

저작권자 © 현대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