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천하통일(4) - 자객 형가①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行危欲求安 造禍而求福 행위욕구안 조화이구복
위험한 짓 하면서 안전하기 바라고, 화를 만들면서 복을 구하다 <刺客列傳>  
진(秦)을 계속 거스르면서도 안전할 방도를 묻는 연 태자에게 방도가 없다며  

송자(宋子)라는 고을에 한 부자가 음악을 좋아하였다. 지나는 과객 중에 악기를 가진 사람이면 누구라도 들러서 연주를 들려주고 대접을 받았다. 

때는 천하가 진(秦)나라에 복속되던 무렵이다. 여러 제후국들이 멸망하였으므로 과거 신분을 감추고 떠도는 망국(亡國)의 유민들이 흔했다. 부자의 집에도 어디선가 흘러들어와 머슴으로 몸을 붙이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그런데 사내는 유독 과객들이 악기를 연주할 때마다 일손을 멈추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저으면서 알아듣는 체를 했다. 당시의 악기는 축(筑)이라는 현악기로, 오늘날 거문고의 원조라고 말할 수 있다. 

떠돌이 머슴이 축을 타다  

“자네가 무얼 좀 아나?” 다른 하인들이 물으면 사내는 태연한 표정으로 ‘이 사람의 소리는 이런 점이 좋은데, 이런 점은 좀 아쉽소’하는 식으로 제법 평을 하는 것이었다. 

하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은 주인이 사내를 불러 축을 연주하게 하자 사내는 곧 연주를 시작했다. 예사 솜씨가 아니었다. 모두 경탄하며 술을 권했다. 

사내는 더 이상 숨어살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머슴이 아니라 주인의 상객이 되어 많은 선비들 사이에서 축을 연주했다. 그의 연주에 감동 받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고을의 유력가들이 돌아가며 그를 초대하여 연주를 들었다. 여전히 그의 정체는 알 수 없었으나 천하제일의 축 솜씨가 소문이 나면서 마침내 진시황까지 그 소문을 듣게 되었다. 사내는 궁으로 초빙되었다. 그 과정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어쨌든, 사내는 황제 앞에 불려가 축을 연주했다. 그제야 사내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이 자는 고점리(高漸離)라는 자입니다.” “그게 누군가?”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멸망한 연나라의 자객 형가(荊軻)와 친했던 자입니다.”

“뭐라?” 진시황이 짧게 탄식했다. 황제도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형가는 누구인가. 

형가는 위(衛)나라 사람이었다. 본래 제나라 출신인데, 위나라로 가면서 성을 형(荊)으로 바꾸면서 ‘형경’이라 불렸다. 독서와 검술을 좋아하며 위나라 원군에게 유세했으나 위나라가 진에 멸망하는 바람에 기회를 놓치고 여러 나라를 떠돌았다. 조나라를 떠돌 적에 몇 사람이 그를 떠돌이로 얕잡아보고 모욕했으나 그는 매번 맞서 싸우지 않고 떠나버렸으므로 그의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떠돌아 연나라로 들어간 뒤에야 형가는 참된 벗을 얻었다. 그 벗이 바로 시장에서 개를 잡는 고점리였다. 두 사람은 늘 어울려 술을 마셨는데 술이 얼큰해져서 고점리가 축을 타면 형가는 그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부르다가 부둥켜안고 울기도 했다. 이럴 때는 옆에 사람이 있거나 없거나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워낙 고점리의 축 솜씨가 뛰어나고 형가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신중하며 박학하였으므로 두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 없었다. 형가와 사귀는 사람들은 모두 현인이거나 호걸이었다. 연나라에서는 은사(隱士)로 유명한 전광(田光) 선생이 그를 대우하였다. 

망명객 번오기를 숨겨주다  

불행히도 연나라는 위태로운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연나라 태자 단(丹)은 일찍이 조나라에 인질로 가서 살 때에 진(秦)나라 인질 자초의 아들 정(政)과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 때는 그들이 모두 어리고 처지도 같았으므로 서로 친구로 지냈다. 후일 그들이 해후한 것은 진나라에서였다. 정은 진나라가 강해져서 본국으로 돌아가 태자가 되었으나, 연나라는 여전히 약소하였으므로 단은 또다시 인질 신분으로 진나라에 가게 되었던 것이다. 두 사람 관계가 예전 같을 수는 없었다. 단은 정의 홀대에 앙심을 품고 탈출해 본국으로 돌아왔다. 

진나라는 야금야금 영토를 넓혀서 진나라 군의 위세가 연의 영토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복종할 것인가 대항할 것인가. 결정적 선택을 피할 수 없었다. 그 때마다 태자 단은 무모한 선택을 계속했다. 때마침 진나라 장군 번오기가 진왕에게 죄를 짓고 연나라로 도망쳐오자 단은 번오기를 감춰 보호해주었다.

태자의 사부 국무(鞠武)가 진나라 왕의 역린을 건드려선 안 된다고 충고했다.  

“저 흉포한 진나라 왕이 연나라에 원한을 쌓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서늘한데, 하물며 번 장군이 연에 있다는 소문이 들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는 호랑이 다니는 길목에 고기를 던져놓는 것과 같아서 화를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를 속히 흉노에게 보내 흉노와 친교를 맺은 뒤 제나라 초나라와 손을 잡도록 하십시오. 그런 뒤에라야 진나라에 대한 대책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단은 의리를 내세우며 듣지 않았다.   

“번 장군은 천하에 몸 둘 곳을 잃고 나에게 몸을 기탁하였소. 나는 저 강포한 진나라의 협박을 두려워하여 슬프고 가련한 친구를 저버릴 수가 없소. 다른 대책을 좀 마련해보시오.” 

“무릇 위태로운 일을 행하면서 안전을 구하거나, 화를 자초하면서 복을 구한다면(行危欲求安 造禍而求福) 계책은 얕아지고 원망은 깊어지는 법입니다. 친구 한 사람을 구하려고 국가의 큰 피해를 돌보지 않는다면, 이른바 원한을 쌓고 재앙을 조장하는 격이지요. 기러기의 깃털을 숯불 위에 올려놓으면 한순간에 타서 없어지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단이 끝내 듣지 않자 국무는 현자인 전광을 단에게 소개하고 물러났다. 

태자가 찾는다는 말을 듣고 전광은 거절하지 못하면서 말했다. 

“준마는 기운이 왕성할 때에야 하루에 천리를 달리지만, 노쇠하면 둔한 말보다도 못합니다. 제가 왕성할 때의 일만 들으시고 의견을 구하시는데 저는 감히 국사를 도모하기 어렵습니다. 다행히 신에게 쓸 만한 친구가 있으니 한번 만나보십시오.” 

전광이 태자에게 소개한 인물이 바로 형가였다. 

“진나라 왕이 벼른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서늘한데, 번 장군을 보호한다는 소문이 들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호랑이 다니는 길목에 고기를 던져놓은 것 같아서 화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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