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영웅시대(9)-범수 上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庸主 賞所愛而罰所惡 용주 상소애이벌소오
어리석은 왕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상주고 싫어하는 사람을 벌준다 <범수채택열전>
어리석은 군주는 잘잘못과 관계없이 개인적 감정에 따라 상과 벌을 남발한다는 뜻 

진(秦)나라의 무장으로서 연전연승 상승가도를 달리던 무안군 백기를 주저앉힌 또 다른 실력자 응후(應侯)의 본명은 범수다. 왕을 능가할만한 부와 권력을 한 몸에 쥐고 중원을 주물렀다. 주군인 진 소왕은 범수와 자신의 관계를 주나라 문왕과 태공망 여상, 제 환공과 관중의 관계에 비유하며 극진히 아꼈다. 그러나 본래부터 귀한 신분은 아니었다.

고문으로 죽은 척하여 목숨 건지다

범수는 본래 위나라 사람으로 젊어서 각국에 유세하다가 본국으로 돌아와 중대부인 수고(須賈)라는 사람을 섬겼다. 집이 가난하여 아직 자립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때 위나라 소왕이 수고를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범수도 주인을 수행하여 따라갔다. 그러나 제왕으로부터 만족할 답변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수고는 몇 달이나 제나라 객관에 머물러야 했다.

제나라 양왕은 범수가 현명하고 말재주도 좋은 것을 보고는 사람을 보내 황금 열 근과 소고기를 따로 챙겨주었다. 범수는 이를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수고는 불쾌감을 느꼈다. 제나라 왕이 자신을 제쳐두고 수하인 범수에게 따로 선물을 보낸 것은 혹 범수가 위나라의 기밀을 은밀히 제공했기 때문 아닌가 의심이 일었던 것이다.

위나라로 돌아온 뒤 수고는 이런 생각을 재상에게 고하여 처벌을 받게 하였다. 재상인 공자 위제(魏齊)가 격노하여 범수를 끌어다가 매를 때리고 고문까지 하니 범수는 갈비뼈와 이빨이 부러지고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범수가 정신이 들고도 죽은 척하며 쓰러져 있자 위제는 그를 대자리로 말아 변소 곁에 두게 하고 연회의 취객들로 하여금 그 위에 오줌을 누게 하였다.

범수가 대자리에 싸인 채로 자신을 지키는 간수에게 은밀히 “나를 나가게만 해준다면 반드시 그대에게 후한 사례를 하겠다”고 말했다. 여흥이 무르익은 뒤 간수는 눈치껏 위제에게 다가가 대자리 속의 죄인이 죽었으니 내다버리겠다고 말했다. 술에 취한 위제가 무의식중에 허락하니 간수는 대자리를 메고 나가 범수가 달아날 수 있게 하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위제가 시신을 찾게 하였으나 범수는 이미 몸을 숨긴 뒤였다. 정안평이란 사람이 범수를 숨겨주었다가 함께 탈출하여 숨어살았는데, 범수는 이때부터 이름을 장록(長祿)이라 바꾸어 살았다.

얼마 뒤 진나라 소왕(昭王)의 사신이 위나라에 왔는데, 정안평이 포졸로 위장하여 사신의 시중을 들다가 “장록 선생이란 은자가 당신을 뵙고 천하의 대사를 논하고 싶어합니다”라고 소개하여 다리를 만들었다. 진나라 사신 왕계는 그날 밤 정안평과 같이 범수를 만나보았다. 범수가 진나라의 실정을 꿰뚫어보고 “진나라는 위태하기가 계란을 쌓아놓은 것보다 급하니(累卵之危) 나를 임용하여 벗어나야 합니다”라고 말하자 왕계는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보았다. 범수로 하여금 성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는 귀국할 때 은밀히 수레에 태워 진나라로 데리고 갔다.

“진나라에 왕이 있었더냐?”

처음에 진 소왕은 범수를 소개받고도 후대하지 않았다. 일찍이 상앙이 반역죄로 죽고 장의(張儀)가 외국으로 망명한 후 진나라에서는 타지에서 온 유세객을 불신하고 배척하는 기류가 강했다. 사실 이러한 배타성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소왕은 초나라 출신 선태후의 아들로 효자였는데, 19세에 왕위에 오르자 선태후가 실권을 쥐고 국정을 주도했다. 선태후는 자신의 동생들인 양후와 화양군을 중용하고 소왕의 동생들인 경양군과 고릉군을 감싸 함께 정치에 관여하게 하였다. 정작 소왕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제대로 힘을 써보지 못한 채 36년의 세월이 흘렀다. 진나라 정치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바로 인척들의 세도정치였다. 밖에서 오는 세객들이 하나같이 이 점을 지적했을 것이므로, 이들 실세들은 외국의 유세객이 왕에게 접근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경계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재상 양후의 전횡이 극심하였다. 왕의 재가를 구하지도 않고 마음대로 군사를 움직여 이웃나라를 정벌하거나 국고를 열고 닫으며 사리사욕을 채웠다. 그의 개인 재산은 왕실의 재산보다 많았다.

진나라로 들어온 뒤 1년 동안이나 불러주기를 기다리며 소일하던 범수는 양후가 또 하나의 침략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양후 개인의 봉지를 확장하기 위해 멀리 제나라 영역까지 쳐들어간다는 것이었다. 범수가 급히 왕에게 상소했다.

“옛말에 ‘어리석은 군주는 그가 총애하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고 미워하는 사람에게 벌을 준다. 반면 영명한 군주는 반드시 공이 있는 사람에게 상을 주고 죄를 지은 자에게만 벌을 준다’고 했습니다. 지금 저는 아무 자격도 없는 사람인데 어찌 어설픈 말로 대왕을 시험하려 하겠습니까. 저를 아무리 하찮게 여기실지라도 나라를 위해 드리려는 말씀을 한번은 듣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마디라도 쓸데없는 말이 있다면, 사형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왕이 사람을 보내 범수를 이궁으로 데려오게 했다. 범수가 수레에서 내려 접견실로 향하면서 짐짓 길을 잘못 든 척 후궁들이 왕래하는 영항을 거쳐 들어갔는데, 그때 마침 왕이 도착했다. 환관이 낯선 사람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내몰면서 “대왕께서 행차하셨다. 어서 물러서거라!”하니 범수가 함부로 대꾸하여 “진나라에 무슨 왕이 있느냐? 진나라에서는 단지 태후와 양후가 지존이라던데”라고 소리쳤다. 다투는 소리를 소왕이 들었다. 왕은 곧 범수에게 사과하면서 안으로 이끌었다. “과인이 일찍이 가르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과인이 어리석고 영민하지 못하니, 삼가 주객의 예로써 가르침을 받게 해주십시오.”라고 인사하자 범수가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왕은 비로소 주변을 물리치고 범수와 독대해 마주 앉았다.

“저를 아무리 하찮게 여기실지라도, 나라를 위하여 드리는 말씀을 한번은 듣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마디라도 쓸데없는 말이 있다면, 사형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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