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영웅시대(7)-白起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聖人甚禍無故之利 성인심화무고지리
성인은 이유 없는 이익을 재앙으로 여긴다. <趙世家>
상당사람들이 조(趙)왕에게 귀순을 요청하자, 평양군이 장차 화근이 될 거라며  

진(秦)나라 장수 백기(白起)가 조나라 군사 40만을 생매장해 죽인 장평전투는 전국시대 최후의 세계대전과도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하면서 시작된 싸움이 조나라로 번지고, 조나라가 항복 조건을 지키지 않으면서 한단전투로 이어졌다. 조나라가 초나라와 위나라에 도움을 청하면서 전쟁은 수많은 일화를 낳으며 중원에서 변방으로 번져갔다. 그 후유증도 컸다. 많은 영웅들이 죽거나 승리했으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장평전투의 시말을 한번 살펴보자.

‘뜨거운 감자’를 취한 조 효성왕

이야기는 진나라의 명장 백기가 승승장구 하면서 중원을 휩쓸던 때로부터 시작된다.

진 소왕의 장수였던 백기는 젊어서 한(韓)과 위(魏) 두 나라를 한꺼번에 공격하여 24만 명의 포로를 참수하고 다섯 개의 성을 빼앗았다. 뒤이어 한나라 영토를 침범하여 땅을 넓히고 위나라를 공격해 61개 성읍을 복속시켰다. 5년 뒤에는 조(趙)나라의 성을 빼앗고, 7년 뒤에는 초나라의 성 다섯 개를 함락시켰다. 다음해에 다시 공격해 초나라 수도 언영을 공략하니 초나라 경양왕이 선조들의 묘를 버려두고 도성을 옮겨갈 지경이었다. 진나라는 언영을 식민지로 삼았으며 백기는 이때부터 무안군(武安君)으로 책봉되었다. 진을 제외한 중국의 6개 나라를 다 털어도 백기를 이길 자가 없었다. 백기는 또 위나라를 공격하여 13만명을 참수하고 조나라를 공격하여 2만명의 대항군을 황하에 수장시켰다. 한나라를 공격하여 5개 성을 함락시키고 5만명을 참수하였다.

한나라를 공격할 때 일이다. 백기가 한나라의 야왕이란 곳을 점령하자 한나라의 상당군(郡)은 본국과 연결통로가 끊어져 고립되고 말았다.
 
상당군수 풍정(馮亭)이 원로와 백성들을 모두 모아놓고 차후 진로를 상의했다.

“상당에서 도성 남정(南鄭)으로 가는 길이 끊어졌으니 본국의 보호를 받을 길이 없게 되었다. 앞으로는 진나라 군대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고, 뒤로는 조나라와 이어져 있을 뿐이다. 이제 진나라에 투항하거나 조나라에 붙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어찌해야 좋겠는가.”

상당 사람들은 진나라 백기에게 항복하기보다 조나라에 붙기를 원했다. 조-한-위 세 나라는 본래 진(晉)나라에서 갈린 것으로 한 나라나 다름이 없지만, 진(秦)은 아무래도 친근감이 덜했다. 게다가 진나라 장수 백기가 잔혹한 사람이라는 것도 이 선택에 영향을 주었다.

풍정의 부하가 조나라로 달려가서 귀순 의사를 전달하자 조나라 효성왕은 측근들을 불러 상의했다. 이때 중신들은 평양군과 평원군이다. 먼저 평양군은 “상당은 곧 진나라의 공격를 받게 될 테인데, 지금 상당을 받아들인다면 득보다 실이 더 클 것입니다.”하고 반대했다. 그러나 평원군은 상당의 귀순을 받아들이자고 했다. “군사를 동원해서 취하려 해도 취하기 어려운 17개의 성을 거저 얻게 되는 것인데 거절할 필요가 있습니까. 받아들입시다.”

이후 한나라의 서쪽을 취한 진의 군대는 예상대로 진로를 바꿔 상당을 공격했다. 조나라는 상당을 취한 댓가로 원하지 않는 전쟁에 휘말려 들게 되었다.

이쯤은 조나라도 예상한 터여서 곧 대군을 일으켜 상당군 길목인 장평에 주둔하면서 쫓겨오는 상당의 피난민을 받아들이는 한편 진나라 군대의 내습에 대비하였다. 조나라의 명장 염파가 출정했다. 처음에 진나라 군의 척후부대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패하자 염파는 성을 굳게 지키며 방어전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진이 이간책을 써서 조나라로 하여금 염파를 해임하고 조괄을 파견하게 만든 것이 이때다. 조괄은 성을 공략하는 진나라군을 가볍게 보고 쫓아 나왔다가 전사하고 상당 사람들을 포함하여 조나라 군사 40만이 전의를 잃고 투항했다. 40만이나 되는 적을 포로로 잡는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상당 사람들은 애당초 한나라로부터 고립되자 진에 투항하지 않고 조나라로 귀순했다. 거기에다 조나라 출신 포로들도 장차 마음을 바꿀 수 있으니, 항복을 받아들인다 해도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 고심하던 백기는 속임수를 써서 투항한 사람들을 모두 매장시켜 죽여버렸다. 전투 중 죽인 수를 합치면 45만을 헤아린다.

질투 부추겨 발목을 잡다

한나라와 조나라는 진나라 군대의 파죽지세를 꺾을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소대(蘇代)를 불러 방책을 의논했다. 소대는 죽은 소진(蘇秦)의 동생이다. 소대가 두 나라의 부탁을 받고 진나라로 갔다. 진나라의 실세라면 무안군 백기와 응후 범수인데, 백기는 전쟁터에 있고 진왕의 곁을 범수가 지키고 있었다.

소대가 범수를 만나 물었다. “무안군이 조괄을 죽였으니 이제 곧 한단(조나라의 도성)을 포위하겠지요?” 범수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소대가 말했다. “무안군이 진나라를 위하여 남으로는 한나라를 평정하고 북으로 조나라 군을 격파하였으니 그 공이 실로 큽니다. 조나라가 망하면 무안군은 반드시 삼공의 대열에 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응후께서는 무안군보다 아랫자리가 될 것입니다. 반면 과연 조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 진에는 얼마나 보탬이 될까요. 천하 사람들이 진나라에 복종하기를 원하지 않으니, 조나라 백성들은 연나라나 제나라로 한, 위나라로 귀부할 터인즉 진이 취할 이득은 텅 빈 땅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느니 차라리 한과 조나라로부터 땅을 일부 할양받고 전쟁을 멈추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전쟁을 계속하는 것이 범수 개인의 이익과, 진나라의 국가 이익에 모두 부합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받아들인 범수는 곧 왕을 찾아가 같은 논리로 왕을 설득했다. 진왕은 한나라와 조나라로부터 몇 개의 성을 할양받는 조건으로 전쟁을 중지시켰다. 백기는 돌아오고 조와 한은 살아남았다. 두 나라의 정복을 목전에 두고 하릴없이 돌아온 백기는 이 휴전이 범수 때문인 것을 알게 되어 서운한 마음을 품었다.

과연 휴전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숨 돌린 조나라가 약속한 땅을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당 사람들은 애당초 진나라를 싫어했다. 장차 마음을 바꿀 수 있으니, 항복을 받아들인다 해도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 백기는 투항한 조나라사람 40만을 매장해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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