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영웅시대(5) 趙奢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若膠柱而鼓瑟耳 약교주이고슬이
거문고의 괘(棵)를 풀로 붙여놓고 거문고를 타는 것과 같다 (廉頗藺相如列傳)
효성왕이 염파를 파면하고 경험 없는 조괄을 대장으로 삼자 인상여가 반대하며

인상여와 염파가 합심하여 지키는 동안 조나라는 흔들림이 없었다.

충신들이 지키는 나라에는 의리 있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법. 혜문왕의 아우 평원군이 많은 선비들을 불러 모아 쓸 만한 인재들을 천거하니 새로운 인물들이 속속 등용되었다.

왕족의 집사를 처형하고 조정에 발탁되다

조사(趙奢)라는 사람은 본래 하급 관청에서 세금을 걷는 관리였는데, 한번은 평원군의 집에서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으려고 하자 법을 엄격하게 집행하여 책임자 9명을 붙잡아 처형해버렸다. 평원군이 진노하여 조사를 죽이려고 하자, 불려온 조사가 말했다.

“공께서는 조나라의 귀족이십니다. 지금 공의 집에서 법을 어기는 것을 그대로 둔다면 국법이 흔들려서 나라가 약해질 것입니다. 나라가 약해지면 제후들이 들고일어날 것이며, 제후들이 반란하면 조나라는 없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공께서 이 같은 부를 누리실 수 있겠습니까. 공과 같은 귀하신 분들이 먼저 법과 원칙을 잘 받들면 위아래가 공평하게 되고, 위아래가 공평하면 나라가 강해져, 공의 권세는 더욱 공고해질 것입니다.”

평원군은 조사를 현명한 사람이라 생각하여 왕에게 추천했다. 왕이 그를 등용하여 국가의 세금을 관장하게 하니 나라의 세금이 매우 공평해졌다. 그에 따라 백성은 부유해지고 국고는 언제나 가득 차게 되었다.

그때 진(秦)나라가 한(韓)나라를 치려고 조나라 땅인 연여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왕이 한나라를 돕기 위해 인상여를 불러 상의했다. “그대가 연여를 구할 수 있겠소?”
인상여가 답했다. “연여는 길이 멀고 험하며 좁은 지역이어서 구원하기가 어렵습니다.”  
왕이 다시 악승을 불러 묻자 악승 역시 어렵다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조사를 불러 물었다. 조사가 대답했다. “그곳은 길이 멀고 험하며 좁은 곳입니다. 그곳에서 싸운다는 것은 마치 쥐 두 마리가 쥐구멍 속에서 싸우는 것과 같으니, 결국은 용감한 자가 이길 것입니다.”

왕은 조사를 장군으로 임명하여 한나라를 구하러 가게 했다. 부대가 한단을 떠나 30리쯤 갔을 때 조사는 군중에 엄명을 내렸다. “지금부터 작전에 대하여 간하는 자가 있으면 사형에 처할 것이다.” 조나라군은 그곳에서 보루를 쌓기 시작했다.

반면 진나라군은 무안이란 곳 옆에 진을 치고서 큰 북을 두드리며 함성을 질러 전의를 과시했다. 무안성의 기왓장이 흔들릴 정도였다. 조나라 척후병이 보고 와서는 조사에게 얼른 무안성을 구하러 가자고 건의하자 조사는 그 자리에서 척후병의 목을 베었다. 오직 보루를 더욱 굳게 하면서 28일 동안이나 진군하지 않고 머물렀다.

진나라에서 보낸 첩자가 붙잡혔다. 조사는 첩자에게 음식을 잘 먹여 돌려보냈다. 보고를 받은 진나라 진영에서는 조사를 비웃었다. “도성에서 출병해서는 겨우 30리 밖에 안 되는 곳에 주둔하여 방벽만 쌓고 있다니 연여는 더 이상 조나라 땅이 아니다.”

그러나 조사는 첩자를 돌려보낸 즉시 군사들의 갑옷을 벗게 하고는 진나라 군 진영을 향해 빠른 속도로 진군하여 일박이일 만에 은밀히 도달했다. 진나라군은 곧 무장병력으로 조군의 보루를 습격했다. 그러나 조사의 군대는 이미 진군 진영 쪽에 와 있었고 최대의 요지인 산 정상에 매복해 있었으므로, 앞뒤로 진군을 공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조사는 이 승리의 공으로 염파 인상여와 같은 상경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전쟁은 이론만으로 이기는 게 아니다 

그로부터 11년 뒤, 혜문왕에 이어 효성왕이 즉위하고 있을 때 진나라와 조나라는 장평(長平)에서 크게 맞붙었다. 조사는 이미 죽고 나이 든 인상여는 중병에 걸려 있어 염파가 방어군을 이끌고 출전했다.

진나라군이 몇 차례나 조군을 공격했으나, 조군은 방벽 안에서 농성할 뿐 나가 싸우지 않았다. 염파의 방벽이 워낙 강고하여 깨뜨릴 방도가 없자 진나라 장수 백기(白起)는 이간책을 썼다. 조나라 도성에 첩자를 들여보내 소문을 퍼뜨렸다. ‘진나라는 겁쟁이 염파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오직 조괄이 출정할까 두려워한다더라.’ 조괄은 죽은 조사의 아들이다.

효성왕은 떠도는 말을 믿고 염파 대신 조괄을 파견하려고 했다. 인상여가 만류했다. “왕께서 조괄의 명성만 믿고 그를 보내려 하시는데, 그것은 거문고의 괘(棵)를 풀로 붙여놓고 거문고를 타려는 것과 같습니다. 조괄은 다만 아버지의 병법서만 읽었을 뿐 실전에서 필요한 임기응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조괄의 모친도 반대했다. “괄의 아비는 대장군이었습니다. 그가 직접 먹여 살리는 자가 수십 명이고 친구는 몇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나라에서 내리는 상은 모두 군리와 사대부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출정명령을 받으면 그 날부터 집안일을 잊었습니다. 그러나 괄은 하루아침에 대장군이 되어 부하들의 문안을 받고 있지만 그를 존경하여 우러러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왕께서 내리신 돈은 집안에 감추어두고 날마다 싸고 좋은 집과 밭이나 둘러보고 사들일 생각만 하니 아비와는 다릅니다. 청컨대 그를 장수로 쓰지 마소서.”

그러나 왕은 자기 뜻을 밀어부쳤다.

조괄은 군영에 부임하자 염파의 군령을 모조리 뜯어고치고 지휘관들을 모두 교체했다.

진나라 장수 백기가 이때를 기다려 싸우는 척하다가 달아나니 조괄은 문을 열고 나가 추적하다 전사했다. 진군에 의해 식량보급로는 차단되고 조군은 진영이 둘로 나뉘어 고립됐다. 끝내 조나라 40만 대군이 싸움을 포기하고 항복하자 백기는 그들을 속여 모두 땅에 묻어버렸다. 전후로 죽은 인원까지 조나라 군사 45만 명이 몰살했다. <사기(史記)>에 등장하는 가장 잔인한 전쟁 중 하나였다.

“괄의 아비는 나라에서 내리는 상은 모두 부하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출정명령을 받으면 그 날부터 집안일을 잊었습니다. 그러나 괄은 돈을 집안에 감추어두고 날마다 싸고 좋은 집과 밭이나 둘러보고 다니니 장수로 쓰지 마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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