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희용 내외정책홍보원 원장
권희용 내외정책홍보원 원장

1997년 겨울은 이 시대를 살아온 한국인이라면 쉽게 잊을 수 없는 계절이리라. 전대미문이라 할 외환위기라는 국난을 당했던 바로 그 시기였다.

마침 정권교체기와 맞물린 혼란의 시기여서 국민은 혼란에 빠진 채 갈 길을 몰라 황망했다. 말로만 듣던 IMF가 뭘 하는 곳인지 많은 국민은 이때 알았다. 엄청난 고금리(25%)로 돈 장사를 하는 국제적인 사채(?)기관이라 걸. 게다가 채무국을 향해 이래라 저래라 한도 끝도 없는 참견을 해대는 무시무시한 권력기관이라는 것도 이때 알았다.    

'빚진 죄인'이라지만 IMF의 행태는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는 부당한 요구를 해댔다. 우선 엄청난 고금리를 챙긴 게 문제였다. 오죽했으면 불과 3개월이 지나자 우리나라에 적용한 고금리가 너무 가혹했다는 국제여론이 비등했다.

한마디로 그들은 나라에 따라 금리를 쥐락펴락했던 것이다. 나라의 위상에 따라 금리적용이 각기 달랐던 것이다. 아시아의 틈바구니에 끼인 코리아에 적용된 금리는 최고수준에 달했던 것이다. 그마저도 받기 싫으면 그만두라는 식으로 배짱을 부리기 일쑤였다. 새로운 그리스 신화를 보는 느낌이다.

돈을 받아쓴 우리는 사실상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그들이 하라는 대로 해야 했으니까. 그 치욕스러운 신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민은 힘을 모았다. 금모으기가 당시의 정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줄도산으로 직장을 잃어버린 근로자들이 거리를 헤맸다. 잘나가던 회사의 사장이 집마저 내놓고 유리걸식하는 신세가 되었다. 남의 일 같지 않은 상황이 일상이 되었던 즈음이었다.

세상은 그런 한국을 비웃었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렸다.'고 손가락질을 해댔다. 겨우 가난에서 벗어나 입에 풀칠이나 할 즈음에 우리나라는 허풍을 떨기 시작했다. 빚 무서운 줄 모르고 외국돈이라면 있는 대로 끌어다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자와 원금을 갚아야 할 시기가 돌아왔다. 기관은 기관대로 기업은 기업대로 빚에 허덕이기 시작했다. 급기야 한국은행 금고도 바닥이 났다. 환란의 시작이었다. 결국 IMF에 의한 본격적인 재정 간섭이 시작되었다. 돌아보면 우리국민은 그 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울화를 다스려야 했다.

지금 그 시절을 떠올리는 것은 근자에 전개되고 있는 그리스의 경제난국을 지켜보면서 이다. 특히 그리스의 처지를 당시 우리와 견줘보면서 너무나 대비되는 몇 가지 사안을 곱씹어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 그 나라나 경제를 그 지경에 빠트린 직접적인 원인은 위정자들이 제공했다는 점에서 다르지 아니하다. 무능한 위정자들에 의해 민생이 도탄에 빠진다는 점은 예나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다르기는 그리스 국민들의 반응이다. 우리가 금모으기까지 하면서 나라경제를 일으켜 세우려고 안간힘을 쓰는 눈물겨운 일을 한 반면 그리스 국민들은 채권자들의 긴축재정요구에 내놓고 반대하는 국민투표결과에 환호작약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배 째라!'는 태도로 채권자들의 주문에 반대하는 그리스 국민들의 후안무치식가 너무나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채무자들도 그런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호랑이 같은 IMF도 30%가까이 빚을 탕감해 줬다. 채권국들도 다투어 유예조치를 베풀었다.

우리 때와는 달라도 엄청나게 다른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똑같은 것도 있다. 난국을 초래하는데 앞장선 위정자들에게는 막강한 채권자들도 어쩌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 나라 국민들이 알아서 할 것이라고 내버려 두는 것이다. 우리가 그러했듯이….

그리스를 보면서 또 한 번 느끼는 감정이 있다. 그것은 두려움이다. 그리스의 처지가 남의 일이 아니라는 느낌 때문이다. 비슷한 시간에 우리는 바닥에 깔린 내수경기를 살리기 위해 추경을 포함한 22조원을 편성하기로 했다. 적어도 3%대의 경제성장을 고수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뜻대로 될지는 모른다. 나라형편이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위정자들)은 한 결 같이 권력투쟁에 매몰돼 있었으니까. 지금 이 순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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