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위(衛)나라의 몰락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君子於其所不知 蓋闕如也 군자어기소부지 개궐여야
군자는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論語> 子路)
자로가 위나라 출공을 위해 출사하면서 조언을 구할 때 공자의 훈계

4년 뒤에 공자(孔子)가 다시 위나라로 왔다. 제후국 어디로 가나 공자의 제자들이 있었는데, 위나라는 자로(子路)의 고향이다. 자로와 자고가 출사하여 위나라 대부가 됐다.

공어는 망명객인 죽은 영공의 사위이며, 괴외의 처남이다. 괴외의 누이인 백희는 공어에게서 아들 공회를 낳았다. 하루는 공어가 공자를 찾아가 병법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공자는 병법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며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다. 자로에게 ‘군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君子於其所不知 蓋闕如也)고 이른 것도 무렵이다.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갔다.

얼마 뒤 공어가 죽자 부인 백희는 노비 혼양부와 정을 통했다. 백희는 장차 괴외를 다시 불러들일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혼양부를 괴외에게 보냈다. 괴외가 말했다.

“내가 귀국하여 복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그대에게 크게 보답을 하겠노라. 대부로 삼아 높은 수레를 탈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죽을죄를 지어도 세 번까지 용서할 것이며, 누이인 백희와 정식으로 혼례도 시켜주겠다.”

혼양부는 괴외와 함께 위나라 도성으로 잠입했다. 공씨집 주변 숲에 숨어 있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여자들의 옷을 두른 다음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공씨 집으로 들어갔다. 공씨집 가신인 난영이 보고 누구냐고 묻자 수레를 끌던 내시가 친척집 부인이 공부인을 뵈러 왔다고 둘러댔다. 수레는 곧바로 백희의 처소로 들어갔다.

저녁을 먹은 뒤, 백희는 손수 창을 들고 앞장 섰다. 그 뒤를 태자와 갑옷 입은 다섯 명의 장정이 수퇘지 한 마리를 둘러메고 따라갔다. 백희가 아들 공회를 측간으로 불러 맹세에 참여하도록 강요한 뒤, 또한 협박하여 누대로 올라가 위나라의 여러 대신들을 소집하게 했다.

가신 난영은 술을 마시려고 고기를 굽던 참이었다. 고기가 채 익기도 전에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중유(仲由=자로)에게 알리도록 급히 사람을 보냈다. 대부 소호가 급히 출공을 대피시켰다. 그들은 병거가 아닌 민간인의 수레를 타고 술잔을 기울이며 노나라로 향했다. 어디에 반군이 있을지 모르므로 민간인으로 위장했던 것 같다.

자로가 공씨 집에 거의 도달하여 자고와 마주쳤다. “문이 이미 닫혔으니 피신합시다.” 자고가 막아섰으나 자로는 “내가 가서 봐야겠네.”하면서 자고를 밀치고 공씨 집으로 향했다. “이미 끝난 일이야. 괜히 가서 피만 볼 거야.” 자고의 만류도 소용없었다.

자로가 문 앞에 당도하자 문을 지키고 있던 대부가 소리 질러 그를 막았다. “들어오지 말아. 이미 제후도 달아났는데, 이제 들어와서 뭘하려고 그래?” 자로가 대꾸했다. “공손, 자네 봉록을 받는 사람이 군주의 재난을 모른 척하다니, 나는 그렇지 않아. 그의 봉록을 먹는 이상, 반드시 그를 구하고 말겠어.” 마침 한 심부름꾼이 문을 빼꼼 열고 나오는 것을 보고 자로가 밀치고 들어갔다.

누대에는 공회를 사로잡은 괴외가 혼양부 등과 함께 대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태자는 공회를 사로잡아 무얼 하시렵니까. 설령 그를 죽인다 해도 반드시 누군가는 당신을 공격할 것이니 소용없는 짓입니다.”

괴외의 무장 두 사람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창을 휘두르니 자로의 갓끈이 잘려나갔다. “잠깐 기다려라. 군자는 죽을 때 죽더라도 갓을 벗지는 않는 법이다.” 자로는 갓을 주워 쓰고 끈을 다시 여미고는 반란군의 칼을 받았다. 노나라에서 난리 소식을 들은 공자가 말했다. “자고는 돌아오겠지만, 자로는 이제 죽고 말겠구나.”

공회가 마지못해 태자 괴외를 군주로 옹립하니 그가 장공(莊公)이다.

이야기 PLUS 용의 역린(逆鱗)

태자 괴외의 반란은 위(衛)나라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다. 그의 아버지 영공 때만 해도 위나라는 주요 제후국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괴외가 자기 아들을 몰아내고 군주가 된 뒤 얼마 안가 위나라는 갓 떠오른 조(趙)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우선 장공은 제후가 된 뒤에 그동안 자신을 외면했던 대부들과 친척들을 주살하려 했는데, 대부들이 반발하여 실패했다. 이로써 군주의 권위는 크게 약화되었다.

2년 후 장공이 국경 밖을 바라보며 그곳이 모두 이민족의(戎) 땅임을 아쉬워했다. 이 소문을 들은 융주 사람들이 조 간자에게 탄원하여 보호를 청하였다. 본래 조 간자는 위나라와 융족의 땅을 모두 차지할 속셈이었다. 융족들은 이미 조나라에 굴복한 뒤였으므로 조 간자는 곧 위나라를 포위했다. 장공이 국외로 달아나자 위나라가 양공의 손자인 반사를 군주로 옹립했다. 이번에는 제나라가 위를 정벌하여 반사를 잡아가고 영공의 아들 회기를 군주로 세웠다. 그러나 회기 또한 대부들의 공격을 받고 제나라로 달아났다.

그제야 노나라로 망명했던 출공이 돌아와 정치는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위나라는 더 이상 강국이 아니었다. 더구나 출공이 죽은 직후 숙부 검이 출공의 아들을 몰아내고 제후 자리를 차지하니 위나라의 위계는 다시 혼란해졌다. 이 무렵 삼진(三晋)은 강성하여 공국이 되었다. 위나라는 오히려 후(侯)로 강등되어 조나라의 지배 아래 들어갔고 다시는 세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괴외의 반란으로부터 1백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들어오지 말아. 이미 제후도 달아났는데 뭘 하겠다는 거야?”
“공손, 자네 봉록을 받는 사람이 군주의 재난을 모른 척하다니, 나는 그렇지 않아. 반드시 그를 구하고 말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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