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오자서의 복수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安求其事 難而逃之 안구기사 난이도지
나라가 안정돼있을 때는 벼슬을 구하다가 난리가 터지면 달아난다 (<左氏傳> 정공4년) 
초나라 영윤 자상이 오나라 군의 공격을 받고 달아나려 하자 사황이 비판하며  


초나라에서 아직 평왕이 살아있을 때, 초나라의 간신 비무기가 자신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던 극완과 백주리를 음해하여 주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백주리의 아들 백비(伯嚭)가 오나라로 망명해 왔다.

평왕이 죽은 직후에는 오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했는데, 이 틈을 타 도성에서 공자 광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났으므로 초를 공격하던 오나라 요왕의 형제들은 모두 초나라에 투항했다.

초나라의 도망자들이 오나라의 대부가 되고, 오나라의 공자들은 초나라에 귀순하였으니 두 나라 사이에 긴장이 한층 고조될 것은 말할 나위 없다. 초나라는 간신 비무기의 전횡으로 국력이 기울었던 반면 오나라는 무림의 고수들이 모여들어 기세가 등등했다. 야망이 큰 합려왕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합려는 집권 3년째에 오자서 손무와 백비를 거느리고 친히 초나라로 영지로 들어가 오나라에서 망명한 공자들이 있는 서(徐)를 점령하고 망명자들을 죽였다. 합려는 여세를 몰아 초나라의 도성인 영도까지 치고 올라가려 했으나 장군 손무가 만류했다. “지금 백성들은 너무 피곤하여 영도까지 도모하기 어려우니 다음 기회를 기다리십시오.” 합려왕은 그 말을 받아들여 회군했으나 이듬해 다시 초나라 국경지역을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했다. 2년 뒤에는 초나라가 먼저 공격해오므로 이에 맞서 반격하면서 초나라 땅을 더 빼앗았다. 두 나라가 싸우지 않은 해가 없었고, 오나라는 연전연승이었다.

합려왕 9년. 왕은 오자서 손무의 권고에 따라 당(唐)과 채(蔡)나라와 먼저 화친한 뒤 이들과 연합하여 마침내 초나라에 대공세를 폈다. 국경인 한수(漢水)에 이르러 양쪽 군대가 서로 마주보고 대치하고 있을 때 합려왕의 동생 부개가 빨리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왕이 좀 더 기다리라고 하자 부개는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위치에 있는데 무얼 기다린단 말입니까”하고는 자신이 이끌던 5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멋대로 강을 건너 공격하기 시작했다. 계획에는 없던 일이었지만 두고 볼 수만도 없었다. 합려왕의 주력부대는 부개의 뒤를 따라 강 건너 초군 진영으로 밀물처럼 돌진해 들어갔다.

전쟁이란 군사들의 사기에서 먼저 승부가 나는 법이다. 초나라군은 기세 오른 오나라 군의 상대가 못되었다. 싸울 때마다 초군은 무너지고 흩어졌다. 초나라 영윤 자상(子常)이 나라를 버리고 달아나려 했다. 대부 사황이 비판했다. “나라가 안정돼 있을 때는 정치를 하다가 난리가 나자 도망치다니, 장차 어디로 갈수 있을 것 같소(安求其事 難而逃之 將何所入). 당신이 여기서 죽지 않으면 그 죄를 씻기 어려울 것이오(子必死之 初罪必盡說)”

오나라군은 초군과 다섯 번 싸워 다섯 번을 이겼다. 그 사이에 초나라 소왕은 도성을 비우고 운현이란 고을로 피신했다. 공교롭게도 운현의 옛 현령이 소왕의 아버지 평왕에게 살해당한 일이 있었다. 운현 사람들이 소왕을 죽이려 했다. 그러자 죽은 현령의 아들이 이를 막으려고 소왕을 호송하여 국경너머 수(隨)나라로 달아났다.

추격해온 오나라군이 수나라를 압박하자 수나라 사람들 또한 소공을 죽이려 했다.
한편 영도를 점령한 오자서와 백비는 죽은 초 평왕의 무덤을 헤치고 시신을 끌어내어 채찍질을 가했다. 평왕은 군주였지만 간신의 꾐에 빠져 너무나 많은 충신들을 죽였다. 한을 품고 망명했던 충신의 아들들이 돌아와 죽은 시신이나마 꺼내 매를 가하니 부관참시(剖棺斬屍)가 따로 없다. 그 뿐인가. 생시에 평왕의 가혹함은 주변에 많은 적국을 만들어 그의 아들 소공은 난리를 만나고도 피난할 곳조차 없었다. 모두 가혹한 군주와 그에 아첨한 간신 비무기가 심어놓은 원한 때문이었다.


이야기 PLUS   나라를 구한 7일간의 통곡

신포서(申包胥)는 오자서가 초나라에 있을 때 친구였다. 오자서가 망명할 때 “나는 반드시 돌아와 초나라를 뒤엎고 말겠다”고 하자 포서는 “나는 반드시 초나라를 보존시킬 것이다”라고 말했다. 오나라 군대가 영도를 점령했을 때 포서는 피란중이었는데, 오자서가 평왕의 묘를 파헤쳤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 “일찍이 평왕을 섬겼던 그대가 지금 그 시신을 욕되게 하다니 하늘의 뜻을 거스른 것일세”하고 질책했다. 오자서가 그를 통해 답을 보냈다. “신포서에게는 미안한 일이오. 그러나 해는 지고 갈 길은 멀어 도리에 어긋난 짓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전해주시오(吾日莫途遠 吾故倒行而逆施之).”

달리 방도가 없음을 안 신포서는 진(秦)나라로 달려가 구원을 청했다. 초나라를 동정하는 나라는 없었다. 진나라가 신포서의 호소를 묵살하자 포서는 마당에 엎드려 7일 밤낮을 통곡했다. 진 애공(哀公)은 “초나라가 비록 무도하지만 저런 충신이 있으니 어찌 망하게 둘 수 있겠는가(楚雖無道 有臣若是 可無存乎)”하며 전차 500승을 지원해 주었다.

진나라 기병대가 초나라 잔병들과 함께 반격해오자 오나라군은 처음으로 패배했다. 그러자 합려왕의 동생 부개는 재빨리 본국으로 돌아가 스스로 왕이 되었다고 선언했다. 초 소왕을 찾고 있던 합려왕의 주력부대는 초나라 정복을 눈앞에 두고 서둘러 오나라로 돌아가야 했다. 부개는 합려왕을 이기지 못하고 초나라로 달아났다.


오자서는 죽은 평왕의 시신을 파내 채찍질로 복수했다. 친구였던 신포서가 사람을 보내 비난하니 오자서가 답했다. “해는 지고 갈 길은 멀어(日暮途遠) 도리에 어긋난 짓을 할 수 밖에 없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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