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위(衛)헌공과 손문자

정해용 시인ㆍ상임논설위원
정해용 시인ㆍ상임논설위원

巧言如簧 顔之厚矣 교언여황 안지후의
피리의 서처럼 간드러진 말이라니, 놈의 낯가죽은 두껍기도 하구나 (<詩經>小雅)
말만 소란하며 속은 비겁한 사람을 꾸짖는 말로, 위나라 악사가 헌공을 빗대어 부름  
 


위(衛)나라 헌공은 성공의 증손으로, 목공 정공을 거쳐 대를 이었다. 좀 포악한 군주였다.
음악을 좋아하여 악사로 하여금 궁첩에게 거문고를 가르치게 했다. 그런데 악사 조(曹)가 궁녀를 가르치다가 제대로 배우려고 하지 않자 곤장으로 벌을 주었다. 궁녀가 헌공에게 이르면서 악담을 하자 헌공은 그녀의 말만 듣고는 조를 불러 곤장을 3백대나 때려 보복했다.

놀기를 좋아하고 행동은 제멋대로였다. 한번은 대부인 손문자(孫文子)와 영혜자에게 아침을 같이 먹자고 하여 궁으로 들어오게 했다. 두 사람이 일찍 들어와 헌공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으나 정작 헌공은 늦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뒷산에 올라가 기러기 사냥을 하느라 약속을 무시해버렸던 것이다. 대부들이 사냥하는 곳으로 찾아가자 헌공은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건성으로 그들을 맞았다. 말에 신의가 없었을 뿐 아니라, 나라의 원로인 대부들에 대한 예의도 아니었다. 대부들은 그곳을 떠나버렸다.

손문자의 아들이 관직에 남아있었는데, 몇 차례 헌공의 술자리에 함께 했다. 한번은 헌공이 악사 조를 불러 ‘교언(巧言)’을 부르게 했다. <시경>에 전해오는 노래로, 말만 뻔지르르한 것을 비꼬면서 조롱하는 내용이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이라는 말도 여기서 파생한 말이다.

조는 헌공에게 억울하게 매 맞은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절절한 감정으로 불렀다.

‘뱀의 간교가 가득한 말 입에서 나오는구나(蛇蛇碩言 出自口矣). 피리의 서처럼 간드러진 말이라니 낯가죽이 두껍기도 하구나(巧言如簧 顔之厚矣). … 주먹도 없고 용기도 없으면서 분란만 쌓아올린다. 숨겨온 상처들이 부풀어 오를 텐데 너의 용기 무슨 소용. 아무리 속임수를 쓴다 해도, 너를 따를 자 얼마나 되리오’(시경 小雅편 204번째 노래).

헌공이 간교한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었지만, 그렇더라도 그를 공격하자면 따져봐야 할 것이 많다. 아무리 큰 원한을 가진 자라도 상대가 군주인 한 망설이지 않을 수 없다. 악사 조는 그것을 간파했다. 실권을 쥐고 있는 대부들이 헌공에게 반감이 크다는 것을 알고는 “간교한 자가 큰소리를 치고 있지만 실은 힘도 없고 용기도 없으며 아무리 허풍을 친다 해도 그를 따를 사람은 없다”라는 메시지를 노래를 통해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과연 조의 노래가 효과가 있었던지 손문자는 마침내 결심을 굳히고 또 다른 대부 거백옥을 찾아가 의견을 떠봤다. “군주가 포악하여 나라가 망할 지경이니 장차 어찌하면 좋겠소.” 거백옥은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소”라고 답했다. 거사에 가담할 용기는 없지만 굳이 보호할 생각도 없다는 뜻이 아닌가. 손문자는 가까운 국경관문으로 나가 군사들을 불러 모았다. 헌공이 협상을 위해 사자를 보내자 손문자는 이들을 죽여버렸다. 남은 신하들이 달아나고 헌공 또한 제나라로 달아났다. 손문자와 영혜자가 선군인 정공의 아우를 새 군주로 옹립하니 그가 상공(殤公)이다(BC 559년). 

그런데 결과는 좀 뜻밖이었다. 다른 제후국들이 위 헌공의 부덕함과 위나라에서 새로운 제후가 곧 즉위한 것을 알고는 이 모반을 모두 눈감아 주었으나, 헌공은 제나라 땅에 움츠리고 있다가 12년 뒤 복귀하는 데 성공한다. 이것은 상공을 옹립한 손문자와 영혜자가 공을 다투느라 서로 원한을 품고 싸웠기 때문이다. 영혜자가 상공의 총애를 등에 업고 손문자를 치려고 하자 손문자는 진나라로 달아났다. 그리고는 제나라에 가있던 헌공의 복위를 명분으로 진과 제나라의 지지를 얻어 반격했다. 손문자는 헌공을 앞세워 위나라를 되찾고 영혜자를 처단해버렸다. 이로써 손문자는 군주를 두 번이나 자기 손으로 갈아치운 대부가 되었으며, 정치에서 물러나 숙읍이란 곳의 영주로 살던 중에 연릉계자의 방문을 받았던 것이다.


이야기 PLUS         

연릉계자 계찰은 위나라를 돌아보고 ‘현능한 대부들이 많으니 나라에 문제가 없다’고 진단했다. 손문자에게 자숙할 것을 권했지만 그 또한 심각한 경고는 아니었다. 그 해에 영공이 죽고 아들 양공이 제후가 됐다. 

위나라에서 벌어진 반란을 두고 제후국들은 의견을 나누었다. 맹주인 진(晉)의 도공이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여러 사람에게 묻자 중행헌자가 대답했다.
“위나라 스스로 새 군주를 정했으니 이 정도에서 수습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굳이 정벌하려고 하면 뜻을 달성하기도 어렵고 중원이 어지럽기만 할 것입니다. 옛날 탕왕 때 재상 중훼가 말하기를 ‘망하는 자는 무시하고, 어지럽히는 자를 잡아라(亡者侮之 亂者取之)’고 했습니다. 또 ‘망한 자는 무너뜨리고 살아남는 자를 지켜주는 것이 나라의 길이다(推亡固存 國之道也)’라고 했으니 주군께서는 위나라가 안정되도록 놓아두면서 때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진 도공이 이를 따라 곧 회맹을 주재하고 위나라의 새 정권을 추인하여 안정시켜 주었다. 옳고 그름을 근원까지 따지자면 한이 없다. 이긴 자가 왕이 되고 패한 자는 역적이 된다는 것은 세상을 빨리 안정시키는 데 가장 효율적인 논리일 것이다. 

처음에 헌공이 도망할 때 곡(穀)이라는 사람이 엉겁결에 따라나섰다가 공이 제나라로 가는 것을 보고 돌아왔다. 반란군이 그를 발견하고 죽이려 하자 곡이 외쳤다. “내가 군주를 호위하여 따라나선 것은 사실이지만 그를 좋아서 따라갔던 것은 아니오. 부득이 따라갔지만 내 마음도 당신들과 같아서 되돌아왔소. 마치 여우가죽 옷에서 소매만 양가죽이 된 것과 같단 말이오(余狐裘而羔袖).” 그래서 반란군은 곡을 살려주었다.

헌공이 악사 조를 불러 ‘교언’을 노래하게 하자 조는 헌공에게 매 맞던 일을 기억하며 절절한 감정으로 노래했다. ‘뱀처럼 간교한 말 입에서 나오는구나. 아무리 속임수를 쓴들, 너를 따를 자가 얼마나 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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