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삼진(三晋)의 호걸들 2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非我族類 其心必異 비아족류 기심필이
우리의 동족이 아니라면 그 마음도 반드시 다르다. (<左傳> 성공 4년)
초나라를 믿고 진(晉)과의 동맹을 파기하려는 노(魯)성공에게 계문자가 만류하며

진(晉)나라 극극의 군사들이 노나라를 대신하여 제나라 군을 물리친 여름에, 노나라 성공(成公)은 진나라를 방문했다. 진 경공은 성공을 홀대했다. 만날 때마다 무례하여 함부로 대하자 성공을 수행했던 대부 계문자(季文子)가 분개하여 “진후는 필경 천수대로 살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성공은 자기나라로 돌아간 후 당장 진나라를 버리고 초나라와 동맹하고자 했다.

그러나 계문자가 만류했다.

“진나라가 비록 무도하다 해도 아직 배반하기는 이릅니다. 진나라는 크고 신하들이 잘 화목합니다. 우리 노나라와는 가까이 있는데다 다른 제후국들도 지금은 진을 따르고 있으니 아직 배반하면 안 됩니다. 사일(史佚)이란 기록에 ‘우리와 동족이 아니라면 그 마음도 반드시 다르다(非我族類 其心必異)’라고 하였습니다. 초나라가 비록 큰 나라라 해도 우리 동족이 아닌데 얼마나 우리를 중히 여기겠습니까.”

강한 나라와의 동맹은 그 나라의 힘이 된다. 노나라가 비록 연약하지만 강대국인 초나라와 동맹을 맺으면 진과 겨루는 것도 결코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성공은 강대국인 초나라를 끌어들여 바로 옆에 있는 강국 진에 대항할 수 있다는 전략을 짠 것이다.

그러나 계문자의 만류는 현명하다. 아무리 동맹이라 하더라도 만일 자기 나라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자기 일을 먼저 챙겨야 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바로 옆에 있고 아직 기상이 쇠하지 않은 진나라를 원수로 만들었다가 전쟁이라도 터지면 어찌할 것인가. 과연 어떤 경우에도 초나라가 와서 물리쳐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때로는 친형제에게 위난이 닥쳐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할 때가 있다. 하물며 서로 다른 나라 사이에 저마다 자기 이해관계를 먼저 따질 것은 정해진 이치. 옛 역사는 바로 그 점을 깨우쳐주는 있는 것이다.

‘역사적 우애’니 ‘백년 혈맹’이니 하는 말들은 듣기 그럴싸하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나라’일 뿐이다. 스스로의 안보능력을 갖추기도 전에 멀리 있는 다른 나라를 믿고 함부로 이웃나라를 이미 이겨놓은 것처럼 깔보며 적대감을 높이는 것처럼 무책임한 일도 없다.

노 성공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을 바꾸었다.

진나라 경공은 그로부터 8년 뒤에 병들어 악몽에 시달리다 죽었다.

계문자는 노나라에서 강성해지고 있던 삼환(三桓)의 일족 계(季)씨의 일원이다. 노 장공 때에 그 형제들이며 환공의 아들들인 경보 숙아 계우에게서 비롯된 맹손 숙손 계손, 세 가문이 바로 삼환이다. 이들은 성공 때에 이르러 이들의 힘은 제후의 후계를 결정할 정도로 막강해졌다. 삼환은 선공 때에 크게 견제를 받았지만 선공이 죽고 아들 성공이 즉위한 후 세력을 회복했다. 선공을 배경으로 삼환을 공격했던 대부 공손귀보는 그 바람에 고국을 떠나 제나라로 달아나야 했다.

노나라에서 삼환의 지위는, 제후의 입장에서는 ‘팔뚝보다 굵은 손가락’과 같이 거추장스러운 것이었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노나라를 지탱하는 세 기둥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힘을 잘 유지하면서 동시에 서로 협력하여 제후를 지지하거나 견제했다.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서도 그들은 노나라의 실질적 주인 역할을 했다. 제나라로 망명한 공손귀보가 계문자에게 보복하려고 진(晉)나라의 동의를 구했지만 진나라는 계문자가 의리 있는 사람이라며 반대했다.
삼환을 무너뜨리려는 제후도 있었지만 그들은 이미 노나라의 법이나 마찬가지였다. 한참 뒤에 사마와 대사구를 지낸 공자(孔子) 역시 실권자가 되었을 때 삼환을 견제하려고 많은 애를 쓰지만, 그 역시 삼환인 계씨 휘하에서 관직을 시작했고 결국은 삼환과 협력의 필요성을 받아들였다. 삼환 자체가 국가나 다름없음을 인정한 것일까.

이야기 PLUS

성왕이 죽고 나이 3세의 양공이 즉위한 뒤 5년째가 되어 계문자가 죽었다. 그 때 계문자의 집에는 비단옷 입는 여자가 없었고 금은보화 같은 것도 없었다. 마굿간에는 곡식을 먹는 말이 없었다고 한다. 일찍이 선공 때로부터 3대에 걸쳐 군주를 보좌했던 사람으로서는 매우 검소하고 청렴한 살림이었다. 이 때문에 계문자는 후대까지도 청렴한 충신이라 불렸다.

후일 공자는 계문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계문자는 세 번 생각한 후에 행동했다. 공자가 듣고 말했다. 두 번이면 충분했다(季文子 三思而後行 子聞之 曰 再斯可矣).” (논어 공야장편)

공자의 말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있다. ‘두 번 생각해도 신중한 것인데 세 번을 생각하고 행동에 옮겼으니 (훌륭하다)’라는 칭송의 의미로 볼 수도 있으나 ‘두 번만 생각하면 충분할 것을 너무 많이 생각했다’라는 완곡한 비판의 의미로 보기도 하는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후대의 학자들은 이렇게 풀이하기도 했다. ‘두 번 생각하면 신중한 것인데, 한 번 더 생각하니 사심이 생긴 것을 지적한 것이다.’(程子) 계문자가 청렴 강직한 충신이었으면서도 노나라를 전횡한 삼환의 핵심이었음을 꼬집는 비판이라 하겠다.

삼환(三桓)을 제거하려다 밀려나 제나라로 망명한 공손귀보가 계문자에게 보복하려고 진(晉)나라에 동의를 구했다. 그러나 진나라는 계문자가 의리 있는 사람이라며 허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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