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희용 내외정책홍보원 원장
권희용 내외정책홍보원 원장
지난 중순경 64년 전, 6.25 전쟁 중 전사한 학도의용군추모제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자그마한 언덕에 세워진 낡은 추모탑 앞에 지금은 여든을 훨씬 넘긴 역전의 동지들 1백여 명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 들었다.

마이크도 없이 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큰길가에 자리 잡고 있는 곳이 어서 사회자가 하는 말이 거의 들리지 않았다. 더구나 이제는 귀마저  온전치 못한 노병인지라 추모제는 온갖 소음 속에서 치러지고 있었다.

이곳은 학도병 48명의 영령이 봉안돼 있는 추모탑이었다. 이들은 전쟁이 나자 학업을 포기하고 오직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전쟁터로 나간 것이다.

당시 중학교 4~5학년, 지금의 고등학교 2~3년생들이었다. 그들은 육군 3사단에 배속되어 포항까지 밀렸다가 그곳에서 공산군과 전투 중에 유명을 달리한 학도병이다. 그들에게는 군번도 없었다. 변변한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다. 무기도 제대로 지급 받지 못했다. 입은 옷(학생복)그대로 적과 맞닥뜨렸다. 그리고 피 흘려 싸우다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추모제는 학우이며 동지들의 분향과 헌화를 끝으로 엄숙한 가운데 막을 내렸다. 늙은 동지들은 숙연했다. 주름진 얼굴을 부비며 눈시울을 적시는 학우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어서 준비한 소찬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자연스레 작금에 화두가 되어버린 세월호 수습과 연관된 이야기가 공통된 주제로 떠올랐다. 기다릴 것도 없이 동지들의 얼굴에는 노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특히 사고로 죽은 학생들을 의사자로 선정해야 한다는 말이 사실인 냥 떠도는 것과 관련된 이야기와 함께 비분강개하기 시작했다.

물론 근거 없는 소문이었다고는 해도 노병들은 울화가 치미는 듯했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참전 군인으로서의 인정도 받지 못했다. 당국도 학도병의 참전공로가 크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입증할 법적 근거가 마땅치 않아 훨씬 뒤에서야 초라하지만 이들에 대한 예우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전쟁에 참가했다가 펴보지도 못한 채 이름 모를 초야에 묻힌 학우들 생각에 살아있는 노병들은 아직도 가슴이 메어지는 것이다. 놀러가다가 사고를 당한 같은 나이또래들에게 의사자라는 영예를 달라고 하는 사람들의 심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회식자리에 퍼졌다.

돈이 아까워서도 아니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 해도 이건 아니라는 것이다. 모르긴 해도 어쩌면 대한민국을 분열시키자는 불순분자들이 아니고서는 이런 유언비어를 퍼트릴 리가 없다는 소리가 낭자하다.

노병들은 세월호 침몰로 사망한 학생들과 일반인들의 희생은 안타깝고, 애석하고, 슬프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언제까지 나라 전체가 함몰되어 서로 삿대질을 하면서 보내야 하는가를 걱정했다. 그러기에는 나라의 미래가 어둡다는 우려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추모제에 다녀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노병들의 우려가 현실로 닥아 왔다. 세월호 사건 수습을 국회에서 알아서 해줄 것이라 믿었던 국민들은 크게 실망했다. 여야의 정쟁으로 비화돼 심각한 민생돌보기는 한참 뒷전이 되고만 것이다. 결국 정부가 국회에 민생관련 법안을 통과시켜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더 이상 법안이 지연될 경우 40만 명의 서민들이 고통을 받는 절체절명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당장 여야가 입법을 서둘러야 할 민생법안으로 9개를 적시해서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우리경제는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조짐은 여러 곳에서 감지된 지 오래다. 아시아 여러 나라도 우리보다 성장세가 앞서고 있다. 우리 국민이 안고 있는 가계부채도 위험수위를 넘고 있다. 청년실업 문제가 도를 더해가고 있다.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가 서민, 민생의 최대화두가 된지 오래다. 오직 정치인들만 세월호에 빠져 싸우고 있다. 민생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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