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楚 장왕-陳을 치다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民之多辟 無自立辟 민지다벽 무자립벽
사람들 사이에 간사함이 많으면 홀로 법도를 바로 세울 수 없다. <詩經>
진(陳)나라 영공이 대부들과 함께 음란해진 것을 성토하다 죽은 설야를 떠올리며

초 장왕이 진(陳)나라를 정벌했다. 진 영공이 하징서라는 젊은 대부에게 시해되어 패자의 권한으로 그 죄를 묻기 위해서였다.

진 영공은 음란한 군주였다. 몇 사람의 대부들과 어울려 다니며 향락을 좇는 것이 마치 저자의 한량들과 같았다. 결정적인 사건은 그들이 엄연한 대부의 미망인과 통정한 일이다.

예전에 진나라의 대부였던 하어숙이란 사람이 정(鄭)나라 목공의 딸을 부인으로 얻었는데, 먼저 기력이 쇠하여 젊은 부인을 남겨두고 죽었다. 부인의 이름은 하희(夏姬)다.

어숙이 없는 집에 공녕, 의행보 등 대부들이 자주 드나들더니 마침내 영공도 그들을 따라 드나들기 시작했다. 여자가 특별히 요염했던 모양으로, 한 여인을 두고 세 남자가 공공연히 정을 통하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어느 날은 아침 조회 자리에서 세 사람이 하희의 속옷 얻어 입은 것을 자랑하며 시시덕거렸다. 차마 제후나 대신이라 부르기가 민망스러운 광경이었다.

설야라는 대부가 참다못해 영공에게 간언했다.

“군주와 신하가 음란한 짓을 일삼아서야 어찌 백성들의 순종을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영공은 그 말에 가책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괘씸하게 생각해 공녕과 의행보에게 일러주었다. 두 사람이 발끈해서 영공에게 말했다.

“감히 군주를 꾸짖다니요. 이런 건방진 자를 놓아두고는 국가의 기강이 바로 설 수 없을 것입니다. 저희가 알아서 처리할 터이니 주군께서는 모른 척하십시오.”

백성들에게 국가의 영이 서지 않고 관리들의 기강이 무너지고 있었다. 과연 혼미한 군주와 간신들 탓인가, 그러한 군주에게 직언하는 올곧은 관리 때문인가. 어쨌든 이 음란한 대부들은 자신들을 비웃는 사람들에게 본때를 보이기라도 하려는 듯 설야를 은밀히 살해했다.

후일 공자(孔子)가 <시경>의 한 대목을 읊다가 설야의 죽음을 떠올렸다. ‘백성들 사이에 간사한 자들이 많으면 혼자서는 법도를 바로잡을 수 없다네(民之多辟 無自立辟).’

음란무도한 군주가 언제까지 무사할 수는 없었다. 운명의 순간이 다가왔지만 그들은 여전히 음행에 젖어 있었다. 하루는 영공과 두 대부가 역시 하씨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늠름하게 자란 하희의 젊은 아들 징서를 앞에 두고 농을 나눴다.

“징서가 당신을 닮았구려. 아니 당신을 닮은 것 같기도 하구.” 영공이 농을 걸자 대부들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아닙니다. 주군을 닮은 것 같습니다.”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이 혈기 방장한 징서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감히 맞받을 수는 없지만 얼굴빛이 변하며 물러나온 젊은이는 이 순간 깊은 분노와 원한을 품었다. 하어숙의 아들 징서는 이제 막 성년이 되어 아버지의 대부 벼슬까지 물려받은 참이었다.

영공이 술자리를 물리고 나올 때 징서가 활을 쏘아 영공을 죽였다. 공녕과 의행보는 간신히 몸을 피한 후 초나라로 도망쳤고 양공의 태자 오(午)는 진(晉)나라로 달아났다. 다른 기록으로 보면 대부 징서는 치밀한 계획을 짜서 이들을 제거했다.

초나라 장왕은 예전에도 진(陳)을 공격한 적이 있었다. 마침 두 대부들이 피신해 와서 영공이 시해된 사실을 고했으므로 장왕은 즉시 정벌에 나섰다. 하징서를 잡아 죽이고는 진나라를 초에 합병하여 현으로 격하시키고자 했다.

여러 신하들이 이구동성으로 왕을 공적을 치하하는 가운데, 마침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대부 신숙시는 아무런 하례도 하지 않았다. 신숙시는 초나라의 현자며 충신이다.
장왕은 섭섭한 기분이 들어 그 이유를 묻자 신숙시가 대답했다.

“소를 끌고 남의 밭을 짓밟으니 밭주인이 소를 빼앗아버렸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의 밭을 짓밟은 소 주인도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를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은 더욱 큰 잘못입니다. 제후들이 초나라를 따른 것은 징서의 죄를 묻는다는 명분 때문이었는데, 이제 그 나라를 삼켜버리면 남의 재산을 탐낸 것이니 앞으로 제후들이 따르겠습니까.”

장왕이 “내게 진즉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라며 즉시 진나라를 회복시켜 주었다.


이야기 PLUS    

하어숙의 처 하희는 천하의 절색인데다가 요염하여 많은 남자들의 애간장을 태웠다는 말이 전해온다. 소녀적에 기인을 만나 방중술을 배워 정사를 통해 남자를 죽이고 살리는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그 여자 때문에 군주가 죽거나 전쟁이 났지만, 누구도 그녀를 죽이자고 하지 않았다. <열녀전(列女傳)>이라는 고전에 나오는 기록. ‘늙어서도 세 번 젊어지고, 세 번 왕후가 되고, 일곱 번 부인이 되고… 세 명의 남편과 두 명의 군주, 한 명의 아들(三夫二君一子)이 그녀로 인해 죽었다. 하지만 공후(公侯)들은 앞 다투어 그녀를 손에 넣으려고 애썼다.’

저 유명한 그리스 신화속의 미녀 헬레네를 연상케 한다. 그녀가 남편 메넬라오스를 떠나 이웃나라의 왕자를 따라가는 바람에 온 그리스가 10년이나 전쟁(트로이전쟁)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남편에게로 돌아가 왕비로 살았다. 절세의 미녀들은 그 아름다움 자체로 무죄였던 것일까.

“징서가 당신을 닮았구려. 아니 당신을 닮은 것 같기도 하구.” 영공이 농을 걸자 대부들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아닙니다. 주군을 닮은 것 같습니다.”

 

저작권자 © 현대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