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배제고보 시절과 도일

 

16

 

열린 창문으로 소슬한 가을바람이 불어 왔다. 정식이 짐 꾸리기를 마무리하고 한숨을 돌렸다. 가족들의 선물은 돈도 없고 경황도 없어 준비하지 못했다. 다만 며칠 전 학원에 가는 도중 노점에서 아버지의 점퍼와 혁대를 매는 바지나마 하나씩 산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복 바지를 엉덩이에 걸치고 다니는 것이 마음에 걸렸었다. 땅거미가 진 뒤에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배찬경에게 찾아가 작별인사도 건넸다. 다른 이들에게는 인사를 생략하기로 했다. 내일 아침 도쿄역에서 열차를 타고 시모노세키(下關)까지 가서 관부연락선을 탈 작정이다. 관부연락선은 일본의 철도가 경부선과 경의선을 거쳐 남만주철도까지 연결되도록 바닷길을 잇는 교통수단. 거기까지 일본인 패거리들에게 붙잡히지 않고 가야 한다. 출발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근심이 불어났다. 아버지 김성도의 부탁처럼 할 수만 있다면 총이라도 구해 지니고 가고 싶었다. 도미꼬가 군대 간 오빠가 입던 옷이라면서 외출복인 하오리를 가져다 놓았다. 일본인 차림도 꺼림칙한데, 일본군이 입던 옷이라니. 목숨을 보전한답시고 변절한 사람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학생이 아니니 학생복도 없었다. 배찬경을 만나러 갈 때 입어 보았다. 제 옷처럼 딱 맞았다.

정식은 전등을 끄고 누웠다. 멀리서 여객선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상현달이 창문 가까이로 다가와 정식을 내려다보았다. 한층 더 초라하고 처량해진 신세임을 주위 환경이 가르쳐 주고 있었다.

 

‘젊어서 꽃 같은 오늘날로

금의(錦衣)로 환고향(還故鄕)하옵소사.’

객선만 쿵쿵…… 떠나간다.

사면에 백(百) 열 리, 나 어지 갈가.

 

- ‘집 생각’ 일부

 

“들어가도 돼요?”

시상을 떠올리고 있는 중인데, 도미꼬가 응답도 하기 전에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일어나지 마세요. 불도 켜지 마세요.”

도미꼬가 정식이 누운 홑이불을 속으로 들어왔다. 말릴 새도 없는 급작스러운 행동이었다. 부드러운 도미꼬의 슬립이 정식의 몸이 닿았다. 정식이 밀쳐내려고 하자, 도미꼬가 아예 팔을 벌려 정식을 그러안았다. 그리고는 정식의 입을 자신의 입으로 막았다.

“큰소리를 내시지 마세요. 어머니가 이제 막 잠 드셨어요.”

도미꼬는 귀국 준비를 하는 정식을 종일 먼발치로 바라보면서 우수에 잠겨 있었다. 정식은 제 코가 석자인 주제여서 달래 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정식이 버둥거리며 도미꼬를 밀어냈지만, 도미꼬가 팔에 힘을 더욱 세게 주었다. 팔 힘 속에 결심과 각오를 실은 듯했다.

“저를 기억해 주세요. 선생님께 저를 바치겠어요.”

“무슨 소리요? 난 이미 결혼했다니까. 자식까지 두었다고.”

“무슨 상관이에요. 제가 선생님의 일본 아내가 되겠어요. 그래야 제가 선생님을 다시 만날 수 있잖아요.”

도미꼬가 정식의 팔목에서 댕기를 풀었다. 오순과 헤어진 이래 계속 매고 다니던 것이었다. 본래의 붉은 색이 반질반질한 검은 색으로 변했다. 정식이 막았지만, 도미꼬가 완강했다. 댕기의 유래를 들었는가 보았다. 정식은 더는 말리지 못했다. 도미꼬가 댕기를 방 귀퉁이에 있는 쓰레기통을 끌어다가 넣었다. 내 마음도 마침내 변했을까?

“이제 오순 씨로부터 해방되세요.”

정식은 가만히 도미꼬를 올려다보았다.

“오순 씨 자리를 제가 메꿀게요.”

메꾼다고? 잡지 않았어도 잡혔을 뿐. 보냈어도 보내지 않았을 뿐. 세상 사람의 절반이 여자라도 아무나 그 자리로 들어올 수 없었을 뿐.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았을 뿐. 기억 속에서 아스라이 사라지는 듯하다가도 당신 같은 이들이 오순을 기억에 새롭게 힘을 실어 주고 그리워하게 해주었을 뿐, 도미꼬가 정식의 몸 위로 올라왔다. 정식의 몸이 도미꼬 몸의 부드러운 굴곡과 다스한 온기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어머니가 사무에를 한 벌 더 주셨어요. 방금 벽에 걸어 놓았어요. 하오리 안에 입으세요.”

사무에는 일본 남자들의 일상복이었다.

“이러지 마.”

정식이 도미꼬를 밀어내려고 버둥거렸다.

“작별이 이렇게 사무치게 가슴 아플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도미꼬가 다시 정식의 입에 자신의 입을 포갰다. 정식은 험난한 장도(長途)와 소득 없는 귀국을 걱정하고 있는데, 도미꼬는 작별을 슬퍼했다.

 

17

정식은 밤을 새워 달려온 여정 끝에 시모노세키 역에서 내렸다. 주변에서 조선인들의 짧은 일본어들와 조선어가 뒤섞여 들려왔다. 다소간 긴장을 푼 사람들이 아는 사람과 서로 인사를 나누거나, 이제 막 도착한 새 도시의 일본인들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얼굴에는 그늘이 짙었다.

역 광장으로 나왔다.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들렸다. 일본열도 중 혼슈(本州)의 동쪽 끝에 가까운 간토에서 일어난 조선인 학살인데, 서쪽 끝에 속하는 시모노세끼에까지 그 미친 기세가 당도한 것이 분명했다. 열차에서 먼저 내린 사람들이 기다리던 일본청년들한테 폭행을 당하고 있었다. 몇몇이 빼든 일본도가 햇살을 가르는 날카로운 빛이 번쩍였다. 경찰관 두 명은 나무 그늘 아래서 행인들과 한가하게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청년들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 테지만, 조선인을 대상으로 하는 치안 유지는 안중에 없었다.

“방화, 살인자를 가려내겠다. 우리는 죄 없는 자는 처단하지 않는다. 조선인은 줄을 서라.”

열 명 남짓 되는 무리의 청년들 중에서 한 발 앞에 선 청년이 소리쳤다. 청년들은 사무에를 입고 흰 머리띠를 둘렀다. 손에는 저마다 일본도나 목봉을 들었다.

“머저리들, 걸리지 않고 도망칠 줄 알았더냐?”

“똥개는 매로 다스려야 해.”

무리 중에서 누군가 덧붙여 외쳤다. 조선인들은 무리가 있는 광장 가운데를 피해서 슬금슬금 빠져나가려 했다. 일부는 어느새 광장을 벗어나자마자 냅다 내달려서 멀어져 갔다. 뒤따르던 사람들을 광장 가에 있던 청년들이 목봉을 휘두르며 조선인들을 막아섰다. 그리고는 짐승을 몰 듯 광장 가운데의 청년들 무리로 쫓았다. 뒤처지는 여자들에게는 목봉으로 등짝을 후려쳤다.

“우리는 죄가 없다. 너희들이 무슨 자격으로 우리를 조사한다는 거냐? 우리는 너희들의 무차별적인 폭력과 살해를 견디다 못해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거다.”

양복을 차려입은 조선인 한 사람이 나서서 항의했다. 나무 그늘 밑의 경찰들이 들으라는 듯이 제법 큰소리였다.

“대일본제국의 신민 자격이면 충분하지 않느냐?”

“너희가 우리 조선을 합병했으니 우리도 신민인 셈이다.”

“어찌 너희 똥개와 우리를 비교하려고 드느냐?”

양복 입은 조선인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 하는 순간, 무리의 청년들이 우 몰려들어 목봉과 칼자루로 조선인을 패댔다.

“똥개, 마늘, 김치 놈이 짖지 못하도록 늑씬 패라.”

조선인이 쓰러지자 청년들이 둘러쌓고 발로 차며 치고 짓밟았다.

“같은 조상, 같은 뿌리, 같은 황국신민이랄 때는 언제고 똥개라니. 그럼 너희도 똥개족이더냐?”

사람들 속에서 두려움에 떨던 정식이 보다 못해 나섰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목소리가 먼저 튀어나간 것이다.

“똥개가 무엄하게도 우리 옷을 입었구나.”

정식의 일본식 옷차림에 짐짓 노려만 보던 무리 속에서 누군가 외쳤다. 청년들이 또 달려들었다. 정식은 배낭과 짐을 든 채여서 대항하기 어려웠다. 멱살을 잡히고 뺨을 맞았다. 가슴으로 오진 발길이 들어왔다. 엉겁결에 몽을 숙이자 등짝에 목봉 세례가 뒤따랐다. 정식 역시 바닥에 쓰려졌다. 숨이 넘어갈 듯 명치가 아팠다. 잘 달려와 문턱을 넘다가 넘어졌다는 속담이 떠올랐다.

그때 조선말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하지만 정식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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