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배제고보 시절과 도일

 

13

 

바람이 살랑살랑 피부를 간질여 더위를 식혀 주는 회나무 그늘 속. 정식은 도미꼬, 배찬경과 함께 도시락을 가운데 두고 너럭바위 위에 둘러앉았다. 도심의 절 경내면서 많은 묘비들이 가까이 있다고는 하지만, 고즈넉한 숲속 분위기였다. 마침 공휴일이었다. 배찬경이 찾아왔다. 도미꼬의 어머니가 소풍을 권했고, 도시락을 준비했다. 정식이 학원에서 돌아오면 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꼴이 안쓰러웠는가 보았다. 정식은 공부도 공부려니와 나가면 쓰게 되는 돈을 벌충할 방법이 없었다. 군대 간 아들 또래라서일까? 도미꼬의 어머니는 보통 일본인들이 조선사람들을 대하는 것 같지 않았다. 정식이 노랗게 익은 새우튀김을 집어 들었다. 하숙생 입장에서는 특별한 도시락이었다. 배찬경은 생선초밥을 입에 넣었다. 배찬경도 평소 먹어 보기 어려웠던 것이리라. 도미꼬 역시 모처럼 별미를 맛보리라.

“가끔 은은히 들리던 범종 소리의 진원지가 바로 이 절이로군.”

정식이 멀리 전각 밑에 보이는 범종을 가리켰다.

“맞아요.”

마음을 활짝 열어 제친 도미꼬의 대답이 상냥하기 그지없었다.

“도미꼬 양, 정식 군은 사람들의 영혼을 통째로 훔쳐내는 도둑이야. 물론 돌려주기는 하지. 그런데 훔친 그 영혼에 제멋대로 제 시를 새겨 놓는다네. 그래서 도미꼬양도 정식 군의 시에 공감하고 감동하게 되는 것이야. 정식 군이 대단한 시인이라기보다는 대단한 도둑이야. 그렇지 않은가?”

배찬경이 생뚱맞은 말을 도미꼬에게 건넸다.

“찬경이, 그런 말은 여자에게 환심을 살 필요가 있을 때에나 하는 거야.”

정식이 웃으며 반박했다.

“환심을 살 필요가 없다면? 이미 볼장 다 보았다는 건가?”

“그렇고 말고요.”

도미꼬가 정식의 팔을 잡아당겨 제 가슴에 그러안았다.

“어? 합방까지 한 사람들 같아.”

배찬경이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떴다. 도미꼬의 태도가 너무 흔쾌하고 진지해서일 터였다.

“도미꼬 양, 대단한 이 도둑은 고향에 아내가 있다네. 그뿐인가. 자식들도 있어. 그건 알고 있겠지?”

배찬경이 덧붙였다.

“그럼요. 전 일본에 계실 때만 아내가 되겠어요.”

도미꼬가 정식의 팔을 더 바짝 그러안았다. 팔에서 느껴지는 도미꼬의 도톰한 젖가슴이 정식을 숨 가쁘게 했다. 정식의 침 넘어가는 소리를 도미꼬가 들었을 텐데도 아무렇지도 않은지 팔을 풀어 주지 않았다.

“아, 정식 군이 부럽네. 부르면 대답할 오순은 부르지 않고, 부르지 않아도 달려올 아내한테는 눈도 주지 않고, 안 부른 도미꼬는 쪼르르 달려오고. 아, 드디어 정식 군이 외도를 아는 사내다운 사내가 되었도다.”

“에끼, 이 사람아. 아주머니의 정성이 듬뿍 배인 이 맛있는 도시락이나 어서 먹음세.”

세 사람은 하하하, 호호호 웃었다. 웃음소리에 따라 나무가지들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14

 

정식이 밖으로 나가기 위해 뜰로 내려섰다. 아비규환을 방불케 했다는 시가지를 살펴보려던 참이었다.

“당최 밖에 나가지 마세요. 학원에도 가지 마세요. 어머니가 절에 가시면서 여러 차례 당부하셨어요.”

도미꼬가 발걸음 소리를 듣고 나타나 두 팔을 벌려 앞을 가로막았다. 얼굴에 수심을 가득 담았다. 나가면 붙잡을 태세였다. 도미꼬는 일요일이라서 학교에 가지 않았다. 정식이 다니는 학원도 일요일에는 휴강했다. 어제(1923년 9월 1일) 도쿄 일대에 큰 지진이 일어났다고 신문은 전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주택들이 무너지거나 불에 탔다. 와중에 무수한 사람들이 죽었다. 하숙집은 집이 흔들려 소란을 겪긴 했지만, 화분 두 개 깨진 것 빼 놓고는 다른 피해가 없었다.

“왜?”

“조선인을 마구잡이로 잡아다가 죽인대요.”

“무슨 소리?”

“조선인들이 시가지 곳곳에 불을 지르고 다닌대요. 어제 일어난 불도 조선인들이 지른 거래요. 폭탄도 투척했대요. 그래서 우리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잡아 죽이기 시작했대요.”

배찬경처럼 암약하는 독립운동가들이 저지른 일일까? 그런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하지만 재일조선인들이 거사를 일으키고 폭력을 행사할 정도로 조직화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우리 민족은 무고한 백성들에게까지 피해를 입힐 만큼 잔인하지 못해.”

“다른 이들이 모두 그렇게 믿지 않는 게 문제지요.”

그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 집에 조선인이 있소?”

죽창을 들고 머리에 흰 띠를 두른 청년들이 대문 틈에 어른거렸다. 도미꼬가 정식을 방안으로 밀어 넣고 방문을 닫았다.

“우리 집에는 없어요.”

도미꼬가 대문을 향해 소리쳤다.

“시인 한 놈이 산다는 말을 들었는데.”

“맞아요, 며칠 전까진.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겨 갔어요.”

“거짓말하는 건 아니지?”

“예쁜 여학생이 거짓말하는 것 봤어요?”

도미꼬가 성을 내는 척 목소리를 높였다. 여학생치고는 당돌했다.

“시인은 다 불령선인(不逞鮮人)이오. 그놈의 시에 홀딱 넘어가서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오? 일단 문을 여시오.”

“전 시 따위에 넘어갈 만큼 어리석지 않아요.”

 

15

“즉시 귀국 바람. 조부,”

그제부터 할아버지에게서 잇달아 전보가 왔다. 오늘은 오전과 오후 두 통이나 왔다. 모두 같은 내용이었다. 정식은 밖에 나갈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던 터라 아직 답하지 못했다. 할아버지의 전보를 받아 들고 정식의 방에 온 도미꼬가 물러가지 않고 근심스레 정식을 쳐다보았다. 정식이 곧 귀국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여간 서운하지 않은가 보았다.

대지진(關東대지진)으로 한 번도 상상해보지 피해가 났다. 12만 가구가 부서지고 45만 가구가 불에 탔다. 사망자와 행방불명자가 40만 명에 달했다. 일본 정부는 대지진 발생 다음 날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래도 지난 일주일 내내 혼란은 수그러들지 않고 더욱 기승을 부렸다. 재일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일본 정부가 그런 소문을 노골적으로 퍼뜨린다는 소문도 들렸다. 국민의 불안을 이용하여 조선인에게 덤터기를 씌우는 작태였다. 학원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렸다. 그 뒤부터 정식은 학원에 나가지 못했다.

“우유나 신문 배달부들이 배달장소에 남긴 분필 표식을 폭탄을 설치할 장소이거나 독약을 투여할 우물을 알리는 조선인들의 기호라고 주장한다니까.”

어젯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찾아온 배찬경은 정식의 안위를 걱정했다.

“이런 악성 유언비어의 진원지는 미즈노 렌타로 내무대신이란 놈이야. 3·1만세운동 직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지낸 놈.”

“자경단(自警團)이라는 단체가 조직되었다는군. 군경과 공조해서 조선인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고 때리고 죽이고 있어. 죽임을 당한 조선인이 벌써 수천 명에 이른대.”

정식도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로 아는 체를 했다.

“맞아. 조선인사회의 위기의식이 팽배해졌어. 조선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항구로 몰려든다고 해. 나도 귀국할까 고민이 깊어지고 있어.”

배찬경은 같은 대학에 다니는 일본인 친구 집에 일시 몸을 의탁했다고 했다. 안심할 수는 없지만, 인정이 있는 친구라고 했다.

도미꼬가 바짝 다가와 정식의 손을 잡았다.

“신문에 난 지진 사망자 명단에 선생님 이름과 똑같은 조선말로 불리는 이름이 있다고 배찬경 선생님이 어제 말했지요? 할아버지께서도 조선에서 신문을 보셨다면 놀라셨을 게 뻔해요. 전보를 보내 우선 할아버지를 안심시키세요.”

정식도 같은 짐작을 하고 있었다. 사망자 명단에 나왔다는 김정식(金正植)이란 이름이 정식의 이름(金廷湜)과 우리말 발음이 같았다. 물론 오해를 풀어 준다고 해서 할아버지의 염려가 수그러들 리 만무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무도한 학살극 또한 할아버지가 어느 정도 알고 있을 터였다.

“도미꼬 양, 그렇지 않아도 고향에 답신 전보를 치려던 참이야. 내가 외출할 수가 없으니 도미꼬 양이 전신소에 다녀와 줘.”

“선생님과 이별하는 것이 설움일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우리가 숨겨 드릴 테니 여기 머무세요.”

도미꼬가 정식을 잡은 손에 힘을 넣으며 정식의 시구를 빌려서 말했다. 정식의 영어 실력은 모르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가면서 읽고 번역하는 데까지는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아직은 문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막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영어 공부를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 아쉬웠다. 물론 당장 걱정은 조선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는 항구까지 가는 먼 길에 무사할까 하는 점이었다.

“고맙지만 그럴 일이 아니야. 정식 무사. 내일 출발. 전보에 이렇게 써 줘.”

도미꼬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한 눈길로 정식을 올려다보았다. 누군가 보았다면 두 사람을 헤어지기 싫은 연인으로 오해할 것 같았다. 정식은 도미꼬가 잡고 있는 손을 슬며시 뽑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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