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배제고보 시절과 도일

 

10

 

관부연락선(關釜聯絡船) 선미에서 일장기가 펄럭였다. 물안개 속으로 부산항과 그 너머 일본식 집들과 창고가 즐비한 도시와 산들이 멀어지고 있었다. 정식에게는 흔쾌하지만은 않은 여정이었다.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목표는 뚜렷했다. 과연 그럴 수 있을지는 저 도시를 감싼 물안개 너머로 보이는 풍경처럼 불투명했다. 넓은 세계에서 문학을 공부했으면 하는 소망은 이미 접었다. 배찬경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정식은 아버지가 일본 놈에게 당했고, 오산학교라는 민족학교에서 항일을 배웠다. 오산학교가 불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배찬경의 애국적 신념이 자신의 경우에는 논리적 비약, 또는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려는 논리적 억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알았다.

지난 3월(1923년) 정식은 배제고보를 졸업했다. 열네 살에 때 정주 오산학교에 입학하면서 집을 떠난 이래 많은 시간 외지에서 생활했다. 아무리 문화가 다른 일본일지언정 외지생활이 두렵지 않았다. 그래도 이번엔 가슴에 무거운 추를 하나 매단 몸이 됐다.

어느새 뭍이 가뭇없이 사라졌다. 갑판에 나와 있던 승객들도 대부분 선실로 들어갔다. 정식은 푸른 바다 가운데 서서 습기를 머금은 바람을 고스란히 맞았다. 지치지 않고 여객선을 따라오는 시커먼 연기와 하얀 포말을 그런 상태로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포말 속에서 오순이 나타나 손을 흔들었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한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라.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 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 한긋 이렇지요.

‘그리워 살뜰히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지나요?’

 

- ‘못 잊어’ 전문

 

정식은 오순을 잊으려고 모질음을 써 왔다. 이제 나는 멀리 타국으로 떠난다. 그런데 여기까지 따라오다니.

 

11

1923년

일본 도쿄

 

벚꽃이 소리 없는 탄성을 내지르며 하숙집 뜰에 만발했다. 바람이 불자 하얀 꽃비가 날렸다. 화창한 날씨에 비해 정식의 마음은 마냥 무거웠다. 오늘은 도쿄상과대학 합격자 발표 날이었다. 발표를 보러 학교에 가지 않았다. 부탁하지 않았는데 배찬경이 스스로 대신 학교에 갔다. 이미 도쿄에 온 배찬경은 메이지대학 법학과에 합격했다. 정식은 배찬경의 하숙에 임시거처를 마련했다. 정식의 대학 입시 응시 자격에는 흠결이 있었다. 오산학교가 3.1운동으로 불에 타 세 해나 쉬다가 배제고보에 편입한 탓에 수업한 햇수가 대학에서 요구하는 응시자격에 미달했다. 배찬경은 배제고보에 정식보다 한 해 일찍 편입해 문제가 없었다. 정식은 도쿄에 와서야 엄격한 자격을 요구하는 도쿄상과대학 입시요강을 보았다. 요행을 바라는 마음으로 입학시험을 치르긴 했다. 대학을 다니려고 어렵게 일본에 건너온 처지 아닌가. 전 과목에 걸쳐 잘 치른 셈이었다.

마침 배찬경이 목제 대문을 밀고 들어왔다. 마루에 앉아 벚꽃에 한눈을 팔고 있던 정식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그렇게 재간 좋은 자네가, 천재시인이라 칭송받는 자네가…….”

배찬경은 말을 다 맺지 못했다.

“짐작하고 있었어.”

정식도 말끝을 흐렸다.

“자네에게 시를 쓰라는 운명이 주어진 거야. 그따위 상과대학에 입학하지 못한 게 자네 인생에 추호도 문제 될 게 없네. 자네는 이미 훌륭한 시인이 되었으니까.”

일본에 일찍 건너와 정식의 기울어진 집안 사정을 미주알고주알 알지 못하는 배찬경은 엉뚱한 말로 정식을 위로했다. 정식이 상과대학에 진학하려는 것에 대해서도 배찬경은 의아해했었다.

“찬경이, 세상이 끝내 나와 우리 집안을 버리려는 모양이네.”

정식은 배찬경에게 할아버지의 금광경영 실패 사실을 알려 주었다. 배찬경은 놀라는 눈치였지만, 특별히 위로의 말을 전하지는 않았다. 이런 땐 형식적인 위로조차도 서로에게는 번거로운 인사치레에 지나지 않았다. 아픔을 기정사실화하면 실의만 더 깊어질 테니까.

“나가세. 술이나 한잔하면서 다른 방도를 찾아보세.”

배찬경이 정식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런데 말이야. 조선유학생 사회가 심상치 않다네. 유학생들이 주동이 된 2.8독립선언식을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연 이래 일경의 감시가 더욱 심해졌다는군. 자네같이 마음이 여린 사람은 여기 일본 땅에서 견디기 힘들 거야. 불합격이 차라리 잘된 일이지 뭐. 나도 학교를 그만두고 귀국할까 고민 중이네. 자네도 경성에 가서 일자리를 찾아보면 어때?”

대문을 나서면서 배찬경이 말했다. 그 사이에 무슨 짓을 저지르지 않았느냐고 묻는 대신 정식은 배찬경의 표정을 살폈다. 배찬경이 정식의 의중을 눈치 채고 머리를 긁적였다.

“호랑이를 벌써 잡았나?”

“호랑이까진 잡지 못했지만……. 언제는 내 행동을 자네에게 일일이 알렸던가.”

배찬경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의지를 다잡듯 정색하며 중단했다. 정식 또한 배찬경이 하는 일을 일부러 시시콜콜 알고 싶지 않았다. 알면 해가 될 가능성이 클 것이라는 두려움은 크지 않았다. 배찬경과 자신의 서로 다른 목표가 앞길을 이미 뚜렷이 갈라놓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인력거 손잡이 위에 걸터앉아 다리쉼을 하는 인력거꾼을 지나쳐 큰길로 나섰다. 길가에는 부드러운 벚꽃잎이 눈처럼 쌓였지만, 정식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정식은 하늘하늘 낙하는 벚꽃잎을 향해 입을 벌렸다. 벚꽃잎 몇 개가 입안으로 들어왔다. 기분을 추스르고 싶었다. 입을 더 크게 벌렸다. 그때 한 움큼의 이물질이 입 안으로 들어왔다. 정식이 놀라 뱉어내는 모습을 보면서 배찬경이 깔깔 웃었다. 배찬경의 손에는 미처 정식의 입 안에 넣지 못한 꽃잎이 한 주먹 들려 있었다. 길바닥에서 주운 것이었다. 정식도 벚꽃잎을 한 움큼 주어서 배찬경을 향해 던졌다. 꽃잎이 두 사람 사이에서 하얀 눈송이처럼 휘날렸다. 배찬경도 정식을 향해 꽃잎을 던졌다. 두 사람은 서로 낄낄낄 웃으며 낙심을 덜어냈다.

12

 

영어학원과 수학학원을 차례로 거친 정식이 한낮의 땡볕이 내리쬐는 하숙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사설학원에 다니면서 부족한 공부를 보충하기로 했다. 다음 해 입시에 대비할 작정이었다. 거기에 더해 김억처럼 외국어를 잘해서 외국책들을 자유롭게 보면서 신지식을 쌓고 싶었다. 서점에 가보니 눈길을 끄는 제목의 일본어 책뿐 아니라 영어 원서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배찬경이 권유한 대로 귀국을 고려했지만, 어떻게든 대학을 졸업하고 돌아가야 돈을 벌든 취직을 하든 할 수 있을 터였다. 며칠 전에는 우에노공원 앞에서 남산학교 시절 선생님인 서춘을 우연히 만났다. 서춘은 도쿄고등사범학교에 다니는 중이었다. 입학 응시자격이 까다롭지 않은 도쿄고등사범학교라도 들어가 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입학 시기가 이미 지났었다.

더엉, 더엉, 더엉…….

범종 소리가 고즈넉이 들렸다. 가까운 곳에 절이 있었다. 하숙집 주인아주머니는 군대에 나간 아들이 무사히 귀환하기를 기도하기 위해 매일 아침나절에 절에 갔다.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 보았다. 일찍 하교한 고등중학에 다니는 딸 도미꼬가 혼자서 집을 지켰다.

“선생님, 이 시를 일본말로 번역해 주시겠어요? 배찬경 선생님이 이 시가 참 좋다고 칭찬했어요.”

도미꼬가 정식을 보더니 맑은 눈을 빛내며 꽃사슴처럼 깡충깡충 뛰어서 뜰로 내려왔다. 기다리고 있었던가 보았다. 정식에게 《개벽》 5월호를 내밀었다. 경성에서 나빈이 보내온 것을 배찬경이 빌려갔었다. 정식이 없는 사이에 반납한다고 도미꼬에게 준 모양이었다. 《개벽》에는 정식의 시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등 다섯 편의 시가 실렸다.

도미꼬와 함께 뜰에 놓인 의자에 앉은 정식은 자신의 시를 일본어로 번역해 읽어 주었다.

봄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도미꼬는 한 구절씩 노트에 받아 적으며 슬픈 듯 눈빛이 흐려졌다.

“선생님은 정말 훌륭한 시인이시군요.”

도미꼬는 눈물을 훔치며 찬탄했다.

“그저 식민지 출신의 가난한 학생에 지나지 않아.”

정식은 존경하는 듯한 눈빛을 숨기지 않는 도미꼬를 뒤로 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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