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배제고보 시절과 도일

 

7

 

나뭇가지들이 하얗게 치장을 했다. 들새들이 퍼덕거리며 나뭇가지 위에 날개를 접느라 눈가루가 풀풀 날렸다. 나뭇짐을 진 오순 아버지가 오래된 느티나무 밑에 보였다. 남산에 올라가 겨울을 날 땔감을 해 오는가 보았다. 여전히 소작농이었고, 여전히 가난했다. 그래도 오순을 공부시킬 만큼 눈이 트인 사람이었다. 정식은 오순의 아버지와 마주칠까 우려하여 못 본 척 갈밭 사이로 난 길로 걸음을 옮겼다.

누구나 연인에게 ‘옛’자 하나면 앞에 붙이면 잊히는데……. 아, 누이를 보냈지만, 누이는 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일은 누이를 위해 무슨 일인가 해야지 하는 다짐이 아직도 무위에 그치고 있었다.

어젯밤엔 모처럼 오순이 꿈속에 찾아왔다. 칼바람이 부는 맹추위에서도 홑옷을 입었다. 머리칼은 아무렇게나 엉클어졌다. 윗저고리는 찢겨서 맨 가슴이 드러났다. 볼과 입술, 턱, 가슴 위에는 검붉은 깊은 상처들이 났다. 눈 밑에는 마른 눈물자국이 선연했다. 얼른 들어오라는데도 대문밖에 서서 정식을 망연히 쳐다보았다.

“누이, 그놈이 또 때렸어?”

오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누이를 때린 게 누구야?”

정식은 얼른 달려가 헛간에서 낫을 꺼내왔다. 언제 왔는지 오순 뒤에 누더기를 걸친 사내가 서 있었다.

“네 놈이 우리 누이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지. 자, 네 놈을 악귀들의 잔치상에 올리겠다.”

정식이 사내를 향해 낫을 휘둘렀다. 사내의 팔이 잘리고 배가 찢겼다.

“도련님, 나요, 팔복이오.”

쓰러진 사내는 이 한 마디를 남기고 눈을 감았다. 정식은 죄책감에 벌벌 떨었다. 그러다가 꿈속에서의 일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가까스로 눈을 떴다. 깜깜한 밤이었다. 자신은 아랫목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정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 ‘가는 길’

 

8

할아버지가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조악동 금광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나흘 전 조랑말을 타고 집을 나섰는데, 조랑말조차 없이 터벅터벅 걸어 들어왔다. 타고 다니던 말은 두어 달 전 늙고 병들어 죽었다. 말을 타지 않고 나다닐 수 없으니까 값이 헐한 조랑말을 구했다. 동네 사람들은 조랑말을 타고 드나드는 할아버지를 보고는 민망해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리곤 했다. 할아버지의 마른기침 소리를 듣고 마루로 나온 할머니나 어머니가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건너 채에 있다가 마당으로 나온 정식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가족들 중 누구도 조랑말을 어쨌는지 묻지 않았다. 할아버지 또한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꼴이 말하지 않아도 말한 것보다 더 분명하게 지금 처한 상황을 드러낼 터였기 때문이리라. 정주 읍내에서 자전거 판매점을 운영하는 최형호의 빚 독촉이 얼마 전까지 부쩍 심했다. 최형호에게 담보로 잡힌 전답은 이미 최형호 수중으로 들어갔다. 지주 행세하던 시절의 반의 반이나 남았을까. 조랑말조차 광부들의 품삯이나 조악동에 오고가며 들리던 주막의 외상값으로 차압되었으리라.

“따라오너라.”

할아버지는 정식에게 잠시 눈길을 주고는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할머니의 도움을 받으며 두루마기를 벗은 할아버지가 아랫목에 좌정했다. 정식이 서안을 사이에 두고 할아버지 앞에 앉았다.

“가거라.”

갑자기 무슨 말일까? 도쿄 유학을 염두에 두었을까?

“형편이 곤궁한데…….”

“곤궁하니까 가야 된다고 네가 말했지? 헌데 무슨 공부를 할 계획이냐?”

“상과대학에 진학하려고 합니다.”

“모처럼 맘에 드는 대답을 하는구나.”

정식의 셈으로도 문학으로는 생계가 막막했다. 법과로 진학하면 권세에 올라타기가 쉽겠지만, 일제 아래서 복무하기 싫었고 성격과 맞지도 않았다. 상과 역시 적성에 맞는다고 볼 수 없었다. 그래도 돈 버는 방법을 연구하면 장손으로서, 가장으로서 집안을 지키는 역할을 어느 정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시 쓰기를 포기할 의사는 없었다.

“신의주에 가는 사람에게 일본에 갈 네 여행증을 도청에 신청해 두라고 일렀다.”

자식 생기고 나이 들면 당연히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는 듯 할아버지는 모처럼 입가에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할아버지 옆에 앉은 할머니도 모처럼 얼굴이 밝아졌다.

 

9

 

누군가 문고리를 당겼다. 정식이 자는 작은 채의 뒷문이었다. 정식은 느낌이 좋았다.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소망이 간절하면 이루어지는 법이라던가. 그런 일이 정식에게 결코 일어난 적이 없을 것 같았지만, 이번만은 다르리라. 문이 열렸다. 초롱초롱 빛나는 별빛을 배경으로 기대했던 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운 누이, 오순이었다. 정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순을 맞았다. 오순이 미소를 지으며 누가 볼세라 얼른 문을 닫았다. 자석이 서로 다른 극을 끌어당기듯 정식과 오순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 끌어안았다. 정식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안온한 품에 묻혔다.

“아침에 집 앞 미루나무 꼭대기에서 까치가 그악스레 울었어.”

정식이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둘은 이부자리 위로 쓰러졌다. 정식의 손이 오순의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다스한 온기를 지닌 곡선의 감촉이 손을 끝 모를 데로 이끌었다. 등허리에서 가슴으로, 엉덩이로 천천히 옮겨갔다. 그러는 동안 어느 새 입술이 열리고, 혀가 서로를 탐닉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누이는 보고 싶어 미치게 하는 특별한 재주가 있어.”

“나도 미치지 않은 게 다행인 걸. 네가 먼 데로 떠난다니 더욱 가슴이 아려.”

“누이, 내가 다른 여자와 혼인을 해서 미안해.”

“나도 남편이 있는 걸. 하지만 너 빼놓고는 아무도 내 진정한 남편이 될 자격이 없어.”

“나도 마찬가지. 어느 여자라도 누이를 대신할 순 없어.”

말은 이렇게 나누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로의 갈망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정식은 오순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마침내 울었다.

“삶이 있는 한 희망이 있어. 세속적인 삶을 초월한 어떤 것, 그것을 찾으면 우리가 함께 할 공간이 열릴 거야.”

“그런 공간은 현실에서는 없어.”

“찾아보자고.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존재하는 세계로 만드는 게 시인이지. 울지마. 네가 울면 불길한 손님이 찾아와.”

그때 밖에서 정식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문밖이 훤하게 밝았다.

“너 일본 간다지? 가면 총을 하나 사 와라.”

아버지 김성도의 목소리였다. 벌써 마당에 나와 돌아다니고 있는가 보았다. 놀라서 이브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런데 옆에 있어야 할 오순이 온데간데없었다. 비록 꿈일지라도 남편이 지금도 때리느냐고 묻지 못한 것이 가슴을 영 찝찝하게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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