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3.1독립운동과 폐교

  5

  멀리 동쪽 산마루 위로 기러기 떼가 꾸룩꾸룩 울면서 줄지어 날아갔다. 겨울을 난 뒤 북쪽 나라로 터전을 옮기는 모양이었다. 해거름 어스름 속으로 자취를 감추는 기러기 떼를 바라보면서 정식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할아버지는 전처럼 제석산을 넘어가는 길을 택했다. 말을 탄 할아버지는 이번에도 정식을 앞세웠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뒤를 막아섰다. 덜 녹은 눈 때문에 길이 미끄러웠다. 말이 이따금 발을 잘못 디디면서 콧김을 내뿜었다.
  “어?”
  할아버지가 갑자기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저, 저기 불길을 봐라.”
  정식이 멈춰 서서 얼른 뒤쪽을 바라보았다. 저 아래 마을 쪽에서 시커먼 연기와 불기둥이 하늘로 치솟았다. 이미 크게 번졌다. 무엇인가 무너지고 터지는 소음에 섞여 탁한 단속음까지 들려왔다. 총소리일까? 천방지축 움직이는 작은 불빛들도 보였다.
  “오산학교로구나.”
  할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어젯밤에도 오산학교 본관에 불이 났었다. 누군가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발견한 학생이 기숙사에 머무는 학생들을 모두 깨워 크게 번지기 전에 겨우 껐다. 어젯밤 범인이 오늘 다시 학교에 불을 질렀을까? 정식은 학교 쪽을 향해 냅다 뛰었다. 몇 십 보나 내달렸을까. 어느새 말에 채찍을 가해 달려온 할아버지가 정식 앞에 버티고 섰다.
  정식은 달아날 방도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렸다. 말이 히이잉 울면서 두 발을 치켜세웠다. 서슬에 놀랐는지 나뭇가지에 얼어붙은 서리꽃이 우수수 떨어졌다. 할아버지가 말에서 뛰어내려 막 달아나는 정식의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정식은 정말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 꼴인 자신에게 화가 났다.
  “저걸 보면 모르겠느냐? 하마터면 네게까지 화가 미칠 뻔했구나.”
  “놔요. 할아버지는 완전 이기주의자, 보신주의자야.”

  6

  정식은 배찬경과 옥녀봉 냉천터를 향해 나란히 걸었다. 다리를 저는 배찬경은 지팡이를 짚었다. 보름 동안이나 헌병대에 잡혀 있었다.
  “그딴 말도 안 되는 상상일랑 아예 하지 말라우.”
  배찬경은 자신이 헌병에게 잘못했다고 싹싹 빌고 풀려났으리라고 정식이 지레짐작한다고 여겼다. 그것에 대해 스스로 변명하고 화를 냈다. 정식은 전혀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설령 그랬다고 하더라도 위로할 참이었다. 그런데 별안간 배찬경의 지레짐작에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잠깐 스쳐 실없는 농담을 던지는 중이었다.
  “워낙 잡혀온 사람들이 많았어.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까지 적잖으니까 난 피라미에 지나지 않더라고.”
  “다리는 왜 뿌려졌어? 대어를 고문하는데 얼쩡거리지 말라고 분지른 거야?”
  “제발 웃기지 말아 줘. 잡혀가자마자 몽둥이세례를 받았어. 이 대갈통이 박살나지 않은 게 다행이야.”
  배찬경은 앞으로 정식의 말 그대로 대어로 성장해서 가열치게 독립운동을 벌이겠다는 다짐까지 덧붙였다. 정식은 배찬경의 말이 허풍에 머물던 시기에서 진작에 벗어났음을 인정했다. 배찬경에게 염치가 없었다. 배찬경은 잡혀가서 크든 작든 고초를 겪었는데, 자신은 할아버지를 따라 집으로 도망쳤다.
  “난 배제학교로 가기로 했어. 할아버지가 신식 물을 많이 먹으면 사람 버린다고 꿈쩍도 안했는데, 만주 작은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 설득해 줘서 기어코 쟁취했어.”
  배찬경이 말을 이었다.
  “요양이나 잘해.”
  “너도 같이 가자.”
  오산학교는 전소되었다. 헌병대가 불을 질렀음이 밝혀졌다. 언제 다시 재건되어 문을 열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선생님들은 다른 일터를 찾아서 흩어졌다. 사정이 허락되는 학생들에게는 학교를 옮기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김억은 조선 최초의 종합문예지로 창간된 《창조》 동인으로 활동할 것이라고 했다.
  “난 할아버지에게 아무리 사정한다 해도 허락이 안 떨어질 거야. 금광에서 뻔쩍뻔쩍 빛나는 금광석이 와르르 쏟아져 나오기 전에는. 제발 너만이라도 대어의 꿈을 이루길 바라.”
  배찬경은 모처럼 정식에게 우월감을 느끼는 눈치였다. 남산학교에서든 오산학교에서든 공부를 월등하게 잘하고 시까지 잘 짓는 정식을 눌러 본 적이 없었다. 정식의 일본 유학까지 염두에 두었던 할아버지는 했던 말이 금광개발의 성과에 따라서 참말이 되기도 했고 거짓말이 되기도 했다. 큰돈을 투자한 금광은 그만큼 기대를 부풀렸지만, 아직도 기대가 현실이 되지는 않았다.
  정식은 피리를 꺼내서 불었다. 배찬경은 이 생각이 왜 이제야 났지, 라는 투로 눈동자를 키우고 정식을 바라보았다.
  “너도 들었겠지? 오순, 오순이 말이야.”
  정식이 피리 불기를 접었다.
  “또 헛소릴 지껄이려고?”
  그렇지 않아도 생각이 자꾸 오순에게 기울어지던 참이었다. 오순이 사는 강변의 오두막이 가까이 보였다. 눈길이 오순의 자취를 찾아 자꾸 거기로 향했다. 예전엔 피리를 불면 오순이 제꺽 달려왔었다. 이젠 오순을 찾을 핑계거리도 없었고, 찾아서도 안 되었다. 마을에 떠돌다가 만 소문의 불길이 기름을 만난 듯 타올라 오순의 앞길을 망칠 것이 두려웠다. 정식은 그저 손목에 매어 있는 댕기만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결혼 직후 처가에서 지낼 때 아내가 손때가 묻은 걸 빨아 주었다. 사연을 묻지 않았고 가르쳐 주지도 않았지만, 시 쓰는 이 특유의 부적이라고 여기는 눈치였다. 
  “헛소리라니. 그럼 말하지 말아야겠다. 네 가슴이 미어져 폭삭 주저앉는 꼴을 봐야겠구나.”
  “헛소리가 아니면 말해보라우.”
  “오순, 오순이 말이야.”
  배찬경이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어서 말해보래도.”
  “시집갔대.”
  정식은 며칠 전 비슷한 말을 들었다. 머슴 팔복이가 순이가 시집갔다고 정식이 들으라는 듯 옆집 사람과 큰 소리로 떠들었다. 정식은 무심한 척했다. 정식이 집에 돌아왔으니 혹시 오순을 찾아갈까 걱정돼서 하는 거짓말로 여겼다.
  “나 들으라는 말이 네 귀에까지 들어갔구나?”
  “아냐. 혼례식도 없이 이불 하나 달랑 싸 들고 신랑집으로 갔대.”
  이야기가 구체적이었다. 정식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누구랑?”
  “철산에 사는 사람이래.”
  “사실이지?”
  “나이 스물이 넘으면 여자는 시집을 아예 못 갈 수도 있어. 이미 장가간 너를 평생토록 기다렸어야 해? 네가 네 갈 길을 갔듯 순이는 순이 갈 길을 가야지.”
  배찬경의 말에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다. 첫딸 구생이 태어난 소식까지 온 마을에 퍼졌고, 집안 어른들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축하 인사를 받았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될 것이 그렇게 된 것처럼 자신과 무관하게 세상이 뒤틀려 버렸다는 생각을 정식은 떨치지 못했다. 그런 틈으로 오순의 편지가 기억났다. ‘내 사랑의 여정이 정식을 종착점으로 하여 멈추어 버렸소. 혼인 따위가 무슨 대수요. 몸은 가까이 있지 못할지언정 마음이 동거하면 되는 것이오.’ 정식은 완곡한 혼인 승낙으로 해석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식의 간절한 마음을 담은 해석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혼인을 했어도 마음은 당신에게 두겠소, 라는 뜻?
  어느덧 눈앞에 냉천터가 펼쳐졌다.
  “순이 누이!”
  정식이 두 손을 모아서 냉천터를 향해 외쳤다. 절벽에 부딪힌 그 소리가 폭포소리와 함께 메아리로 돌아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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