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거미줄과 잠자리

 

11

 

하현달이 나뭇가지에 걸렸다. 무슨 말인가 정식에게 줄기차게 해 주는 듯했다. 정식은 귀를 바짝 세우고 눈을 깜박여 달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렇게 달을 바라보며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는 중이었다. 눈두덩에 군살이 얹힌 것 같은 이물감이 점점 커져 거북살스러웠다. 동트는 시간이 두려운 새벽 도둑처럼 쫓겨 가는 바람이 거칠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심술궂게 자주 달을 숨겼다.

기숙사 책상 앞에 앉은 정식은 한숨을 토해냈다.

 

봄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시름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전문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자신의 처연한 상황을 돌파할 묘책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억울할 뿐이었다.

 

12

 

주변의 미루나무에서 팔랑팔랑 떨어지는 노란 낙엽들이 허공을 갈랐다. 그 너머로 보이는 말 탄 사람의 모습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논둑길을 타고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 길은 학교로 오는 샛길이었다. 말 탄 사람이 교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모습을 뚜렷이 드러냈다.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 정식 곁에서 햇볕을 쬐며 잡담을 나누던 배찬경이 말 탄 사람에게 달려갔다. 그러다가 멈춰 서서 뒤따라오지 않는 정식을 의아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정식은 배찬경의 눈길을 외면했다. 배찬경이 말 탄 사람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는 마부처럼 앞장서서 정식 앞으로 다가왔다.

“할아비에게 절도 않고, 못된 놈. 앞장서라. 기숙사로 가서 집에 다녀올 채비를 해라.”

할아버지가 정식을 나무랐다. 정식의 괴로운 심사를 감안한 듯 말투는 평소처럼 곰살가웠다. 정식은 대꾸 없이 먼 하늘만 쳐다보았다.

“혼례 이야기는 집에 가서 하자. 서둘러라. 얼마간이라도 해가 있을 때 산길을 타자구나.”

배찬경이 정식의 팔을 잡아끌고 기숙사 쪽으로 향했다.

“선생님한테는 내가 대신 말해 줄게.”

왜 집에 가자는 것일까? 마음을 바꾸셨나? 정식은 못 이기는 척 배찬경에게 끌려갔다. 말을 탄 할아버지가 뒤따랐다.

“여기 오순의 뇌쇄적인 치마꼬리에 실성한 사내가 있으니 이름하여 김정식이렸다. 오순 또한 김정식에게 반한 척 꼬리를 김정식 얼굴 가까이 치켜세웠으니, 아휴 이 향기로운 냄새…….”

배찬경이 작은 목소리로 변사 목소리를 흉내 냈다. 할아버지도 들었는지 큼큼, 잔기침을 했다.

“에잇, 김정식의 다이야몬드 반지가 기렇게 좋더냐?”

정식이 걸음을 멈추고 배찬경을 째려보았다. 배찬경이 헤헤 웃으며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13

 

별들이 총총히 박힌 하늘 아래, 할아버지가 탄 말이 천천히 제석산(帝釋山) 골짜기를 올랐다. 정식은 말 옆이나 뒤를 따라 터벅터벅 걸었다. 하늘이 워낙 넓고 깊어서 지상의 모든 것들이 그 안에 푹 빠진 것 같았다.

“예로부터 혼처는 집안어른이 정해주는 법이야. 기래야 서로 균형을 이룬 가문의 참한 규수를 고를 수 있어. 다시 말하지만, 소작이나 짓는 상놈하고는 우리 집안이 애당초 맞지 않는단 말이다.”

정식은 결국 할아버지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깨달았다.

“백금으로 집을 사고 천금으로 이웃을 산단다. 내가 오랫동안 네 장인 될 홍 영감을 지켜보았지. 근동에서는 드물게 인품이 반듯한 양반이야.”

정식이 돌멩이를 향해 발길을 힘껏 내질렀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돌멩이를 바라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을 모르는 할아버지는 뭐라 계속 중얼거리며 앞서 갔다. 한참을 가서야 인기척이 따르지 않음을 눈치 채고 뒤를 돌아보았다. 정식과 큰 간격이 생긴 것을 알고는 말을 세웠다. 정식이 다시 터벅터벅 뒤따랐다.

“앞 서거라.”

할아버지가 이번에는 정식을 뒤따랐다. 수업기간 중에 별안간 왜 집에 가자고 할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할아버지가 직접 데리러온 이유가 무엇일까? 정식은 가슴 한편에서 설마, 로 시작되는 의혹을 간신히 억누르고 또 눌렀다.

“너희들 나이 또래의 남녀 간 감정이란 착시같이 허무한 거야. 무지개처럼 아름답지만, 큰 함정이 있어. 그걸 경계하여 예로부터 오늘날과 같은 혼인 방식이 생긴 거야.”

할아버지는 정식이 더는 귀 기울이지 않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할아버지의 목소리와 바람소리만이 적막한 밤길에 스산하게 이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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