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거미줄과 잠자리

1

붉고 큰 해가 신미도 삼각산 너머로 사라지는 중이었다. 노을이 지상과 하늘의 경계를 짙게 물들였다. 옥녀봉 냉천터 부근 바위에 앉은 정식이 피리를 불었다. 오순이 옆에 앉아 피리 음률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정식의 시에 오순이 세간에 흘러 다니는 노래를 나름으로 변조한 곡을 붙였다. 오순은 목청이 고와 남산학교 시절 여러 차례 학예회에 뽑혀 나갔다. 그것이 학교에서 노래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스스로도 그때부터 노래에 자부심을 갖는 듯했다.

 

잊힐 듯이 볼 듯이 늘 보던 듯이

그립기도 그리운 참말 그리운

이 나의 맘에 속에 속모를 곳에

늘 있는 그 사람을 내가 압니다.

- ‘맘에 속의 사람’ 일부

 

“그래도 이렇게 수업을 빠지면서 몰래 찾아오면 안 돼.”

노래를 마친 오순이 걱정을 드러냈다.

“보고 싶었어. 내가 미치지 않은 게 다행이야.”

정식이 히쭉 웃었다.

“시간이 흐르다 보면 네 맘속에서 내가 쑥 빠져나가는 순간이 올 거야.”

“내 일생에 그런 순간이 올까?”

“네 할아버지 사업이 잘 돼 가고 있나 봐. 널 일본 유학까지 보낸다는 소문을 들었어. 공부에 전념해야지.”

오순이 ‘나는 너와 안 맞아’라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사실이 분명 그렇더라도 거기까지는 인정하지 않으려는 심사를 정식이 모를 리 없었다. 마음에 드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허무함을 견뎌야 하는 오순을 상상해보노라니 정식 자신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든 우리 두 사람의 사랑이 결실을 맺도록 노력해야 해’라는 말을 오순은 말 없는 말로 정식에게 전하고 있는 셈이었다.

“난 기필코 누이한테 장가 갈 거야.”

“꿈에서는 무슨 일이나 이룰 수 있어. 그러나 현실에서는 꿈이 무척 높은 벽 뒤로 숨지.”

“노력하면 못 이룰 일이 없다고.”

“난 하늘을 나는 개구리를 본 적이 없어. 태생적으로 정해진 운명이 있기 때문이야.”

“피이, 동철이도, 찬경이도 장가를 갔어. 누이 동무 지연이도 시집을 갔고. 나도 갈 테야.”

정식이 입을 씰룩거렸다.

“그 동무들도 모두 자기네 어른들이 배필을 정해 줬어.”

“이젠 자기가 자기 짝을 정하는 시대가 온 거 몰라? 누이는 부모가 정해 주는 사람이면 일본 놈 헌병 닮은 늑대 놈이라도 갈 거야?”

정식은 관습을 이길 확신이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장래와 소망을 훼방하는 관습을 이겨내야 한다는 다짐이 준 확신이 아니었다. 곽산에서는 가장 먼저 상투를 자르고 개화문명을 받아들인 할아버지에게 마땅히 기대를 걸었다.

“난 내가 정할 거야.”

“정말 그러기를 바라.”

정식은 두 팔을 벌리며 오순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오순이 슬그머니 돌아섰다. 미래를 예측하고 미리 그 아픔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오순의 쓸데없는 행동이 안타까웠다. 정식은 멋쩍어 다시 피리를 불었다. 피리 소리에 맞춰 오순이 또 노래를 불렀다.

잊힐 듯이 볼 듯이 늘 보던 듯이

그립기도 그리운 참말 그리운 …….

 

오순의 목소리에 차츰 물기가 끼더니 노래를 마저 하지 못했다. 정식이 그 틈에 오순을 끌어안았다, 오순이 정식의 품에 안겨 속울음을 쏟았다.

2

 

사방 벽이 창문과 출입문을 남기고는 책들로 가득 찼다. 일본서적 등 외국서적들이 대부분이었다. 눈길을 사로잡는 이 많은 신학문 책들이 김억이 경험한 바다 건너 넓은 세상의 깊은 지식을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 정식은 속으로 김억을 흠모해 왔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김억이 더욱 다가가기 어려운 큰 산처럼 여겨졌다. 선 채로 책들을 살피던 김억이 한 권을 뽑아 들었다. 방 가운데 서안(書案) 앞에 앉은 정식에게 책을 건네며 맞은편에 앉았다.

“제가 전혀 다른 세상으로 난 창문 하나를 얻은 것 같습니다.”

정식이 책을 받으며 말했다. 책은 서구 시인들의 시들을 모은 시집이었다.

“아는 것만큼 상상력이 커진다네. 상상의 지평이 넓어지면, 보다 진화된 행동을 하게 된다네. 신문명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두려움이 없어진다네. 근데 뉘한테 시를 지도받은 적이 있었댔나?”

남산학교에 입학하기 전 첫째 작은어머니 계희영은 정식에게 심청전, 흥부전, 임진록, 장화홍련전, 삼국지, 콩쥐팥쥐, 두껍전 등 전래 고전소설들을 읽어 주곤 했다. 하도 많이 들어 어느 부분은 외울 정도였다. 하지만 시나 문학 지도를 받았다고 하기에는 애매했다.

“남산학교 다닐 때 서춘 선생님이 제 글을 유심히 살펴 주시고, 고칠 점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 선생님의 문학책들을 빌려다가 읽기도 했고요.”

그때에도 서춘으로부터 문학을 지도 받는다는 의식은 없었다. 서춘 역시 문학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기초를 세워 주겠다는 의도에 머물렀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일이 문학 지도라면 문학 지도인 셈이었다.

“그게 다인가? 정식 군은 천부적인 소질이 있군. 사실 나도 서춘 선생님이 하시던 것밖에는 당장 달리할 수 있는 게 없네. 시를 쓰면 모았다가 내게 가져와. 부끄러워하지 말고.”

정식은 자신의 글들을 시라고 불러도 될 만하다는 자신감을 확고히 굳혔다. 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노트 속의 습작들을 헤아려 보자니 자신감이 순식간에 열등감으로 바뀌었다.

“정식 군의 시에 깃든 서정성은 우리 민족 고유의 한(恨)에 바탕을 둔 것처럼 보이네. 특히 4, 4조의 민요를 닮은 운율을 택해서 더욱 좋아. 낭송하고 기억하기 쉽거든. 방금 자네에게 준 책은 서구의 시인 로버트 번즈와 에이츠의 시들을 모은 시집이야. 앞으로는 이 시인들 시처럼 7, 5조도 구사해 보면 좋겠네. 그것 역시 낭송하고 기억하기 쉽네.”

“예.”

정식은 대답했지만, 민족 고유의 한이 무슨 뜻인지 알 듯하면서도 뜬구름처럼 명확히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은 옛 책을 읽거나 노래를 부르면서 입에 밴 버릇대로 글을 지었을 뿐이었다.

김억은 요즘 조선문단에 소개하기 위해 프랑스 시를 번역하는 중이라고 했다. 또 직접 쓴 시를 곧 잡지에 발표하여 시인으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예고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렸다.

“언제든지 우리 집에 와서 자네가 보고 싶은 책이 있으면 빌려가도 되네. 보다시피 내가 일본에서 공부하면서 구한 문학 서적들이 이 방에 꽤 있다네.”

정식은 기쁜 한편으로 선생님과 학생 사이의 사적 만남의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다. 또 부인이 누이라고는 하지만, 마을이 달라 기제사 때나 당숙 집에서 얼굴을 마주친 정도인 육촌간이었다. 정식은 김억이 준 시집을 들고 일어섰다. 정식이 돌아가려는 기색에 설거지를 하던 김억의 부인이 부엌에서 쫓아 나왔다.

“자고 가, 나랑 이야기를 나누면서. 너 오기를 퍽 기다렸는데…….”

정식은 누이를 보고 빙긋 웃고는 마당으로 내려섰다.

“정식 군.”

미처 하지 못한 말이 있다는 듯 김억이 정식을 불렀다.

“알고 보니 군이 연모하는 여자가 형편없이 빈한한 소작농의 처자라지? 우리 세태에서는 양가 격차가 커서 혼인은 고사하고 사귀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걸 군이 잘 알겠지? 대신 공부에 매진해서 자네 손자 세대쯤에서는 차별 없이 혼인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보게나. 이광수(春園 李光洙) 선생이 지은 우리 학교 교가에 ‘하늘을 꿰뚫고 땅을 들추어 온가지 진리를 캐고 말련다’라는 구절이 있지? 큰 뜻을 품고 정진 또 정진하게.”

정식이 자신을 어려워하는 심사를 아는지 김억은 붙잡지 않고 마루에 선 채 뜰로 내려서는 정식을 배웅했다. 누이는 배찬경은 김억 선생님 댁에 간다는 말에 연애 시나 끄적거린다고 꾸중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했었다. 정식은 연애에 정신 팔지 말라는 이야기를 그 정도로 해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할아버지에 대한 은근한 믿음을 접을 이유가 없었다. 서운한 기색을 보이는 누이를 뒤로 하고 대문을 나섰다. 벌써 어둠이 짙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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