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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 장편소설] 김소월 전기-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_1장 스승 김억과의 만남(1)
이정  |  leejungmj@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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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09.13  08:4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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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스승 김억과의 만남

 

1

 

1915년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남단동

연초록 산록 구석구석에 진달래꽃이 만발했다. 겨우내 인고의 세월을 견디던 진달래가 사라졌던 것이 결코 아니었다고 함성을 지르는 듯했다. 소년 정식은 석양에 타오르는 꽃들을 바라보며 남산 옥녀봉에 올랐다. 마을사람들이 냉천터라 부르는 폭포가 저만큼 보였다.

“아악, 악!”

젊은 남자의 절규가 아스라이 들렸다. 정식은 소리에 이끌려 그만 산 그림자에 묻힌 아랫마을을 돌아보았다. 소란을 예감하고 소란을 피해서 산으로 온 처지였다. 차츰 부옇게 밝아오는 자신의 집이 마을 가운데에 돋보였다. 좌우에 사랑채와 헛청을 거느린 기와집 앞마당에서 횃불이 하나둘 돋아나고 있었다.

“아악, 악!”

짐승의 단말마처럼 절규가 거칠었다. 절규를 감추려는 듯 북소리가 점점 커졌다. 할아버지 김상주(金相疇)가 아버지 김성도(金性燾)를 밧줄로 사지를 묶어 마당 가운데에 엎드려 놓고 굿을 벌이는 중이었다. 무당의 지시에 따라 머슴들이 아버지 엉덩짝에 몽둥이를 휘두를 터였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 굿이었다. 정식은 머릿속을 차지하는 살풍경을 지우기 위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버지의 병은 이미 만성화되었다. 하지만 계절행사가 된 굿판의 폭력에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할머니도, 어머니 장경숙(張景淑)도, 첫째 작은아버지 김응열(金應悅) 계희영(桂熙永) 부부도 다름없을 터였다. 집에는 3대 10여 명이 함께 살고 있었다. 정식은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쏴아, 폭포수가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정식은 냉천터를 바투 앞에 두고 걸음을 멈추었다. 폭포수가 하얀 명주 자락처럼 휘날렸다. 새봄이 불러온 기운을 감싸 안으려는 듯 정식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 ‘엄마야, 누나야’ 전문

 

집에서 조금 전까지 다듬은 자작시를 읊었다. 마을 강변을 지나다가 떠오른 느낌에다가 가슴에 고여 있던 소망을 얹었다. 정말 금모래 반짝이고 갈잎이 수런수런 노래 부르는 강변에 살면서 집안에 이내처럼 번져 있는 시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가까운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냉천터에 오면 언제나 앉던 자리였다. 포켓에서 피리를 꺼내 불었다. 피리소리가 진달래 숲과 냉천터를 감돌아 옥녀봉 주위로 펴져나갔다. 답답함이 새봄의 환희로 조금씩 바뀌는 듯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인기척을 느낀 정식이 피리 불기를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물줄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다시 쏴아 울려 퍼졌다. 그 속에 낙엽을 밟는, 귀에 익은 소음이 섞여 있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진달래꽃들만 봄바람에 산들거렸다. 일어나서 진달래 숲을 찬찬히 살폈다. 진달래꽃 무더기와 나무들 사이에서 하얀 저고리 위에 붉은 댕기가 치렁거리는 소녀의 윗몸이 눈에 들어왔다.

“순이 누이!”

정식이 확신에 차 불렀다. 댕기머리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났다. 기다리던 오순이었다. 오순이 팔을 벌리고 정식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정식은 오순을 향하여 달려갔다. 그런 기세로 오순에게 안기려했다. 하지만 오순이 팔을 오므리며 몸을 피했다. 정식이 앞으로 고꾸라질 듯 휘청댔다.

“에그, 넘어질라.”

오순이 얼른 정식의 팔을 붙잡았다. 정식은 그 틈에 와락 오순에게 안겼다. 오순도 팔을 벌려 정식을 감싸 안았다. 정식의 몸에 닿은 오순의 가슴이 무척 부드러웠다. 사실 정식은 가슴뿐 아니라 오순의 몸 어디든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촉감을 지녔다고 믿었다. 그것을 느끼고 싶은 갈망이 강변에서 살고 싶은 소망과 어우러지면 들꽃향기 같은 행복감이 온몸에 번졌다.

“곧 떠난다며?”

오순이 팔을 풀며 근심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정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이, 저 진달래꽃을 봐. 봄이 되자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시 피어났어. 나도 방학이 되면 더 늠름한 모습으로 누이 앞에 짜안, 나타날게.”

정식은 꽉 쥔 주먹을 들어 보였다. 그것이 남자다움을 나타내는 방법 중 하나라고 깨닫고 있었다. 팔 근육이 미미하게 볼록거렸다. 하지만 가슴은 아무런 기척을 보이지 않았다.

집안에 먹구름이 짙어질수록 정식은 오순에게 마음을 쏟아 왔다. 남산학교(소학교) 3학년 때 선생님인 서춘(徐椿)은 두 사람을 자기 집으로 불러 동화책을 읽어주곤 했다. 오순을 거기서 처음 만난 이래 어느덧 세 해가 넘었다. 그동안 냉천터가 보이는 이 자리에서 둘만의 비밀의 시간을 늘려 왔다. 함께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읊었다. 손을 맞잡고, 가슴의 콩닥거림을 즐겼다. 오순에 관한 것이라면 오순에게는 쓸데없는 것일지라도 정식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다. 오순이 손을 내저으면 내저을수록 오순은 정식의 마음속에서 쑥쑥 커갔다. 오순은 정식을 붙잡지 않을 것 같은 태도를 취했지만, 정식은 오순에게 꽉 붙잡혔다. 정식은 이제 둘의 만남이 밝은 햇살 아래에서 이루어져도 괜찮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작년에 장가를 간 마을동무 배찬경은 그런 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사랑은 셈하고 약속해서 만들어지기보다는 지순한 감정으로 시작해 들불처럼 번지는 것이라고 제법 삶의 운행법칙을 다 아는 체를 했다.

“네가 아무리 그리 말해도 이제 너는 나를 영영 마주하지 못할 거야. 네가 지금 그런 길로 용감무쌍하게 돌진하고 있는 거야.”

오순은 대답은 흔쾌하지 않았다. 정식은 오순의 부정적 언사 뒤에 숨긴 뜻을 알았다. 네 할아버지 명을 너는 거역할 수 없어. 혼인은 집안 어른들이 결정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정식은 할아버지는 다르다고 믿었다. 할아버지는 경성(서울)에 내왕하면서 개화문명에 남보다 일찍 눈을 떴다. 곽산 지방에서는 가장 먼저 상투를 잘랐다. 집안 모든 남자들에게 단발을 하도록 했다. 갓 대신 중절모를 쓰고 개화장(開化杖)이라고 불리는 짧은 지팡이를 들고 나다녔다. 농사를 본업으로 삼던 지주지만, 시류에 밝아 많은 돈을 투자해 구성 조악동에서 금광맥을 탐사하는 중이었다. 성공하면 금광경영이 본업이 되리라. 오순은 아주 먼 후일 밤하늘에서 반짝이는 어느 별로 둘 중 하나가 떠날 때까지 동반자가 되어야 할 사람이었다. 사실 두 사람이 혼인에 대해서 말을 나눈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정식의 생각이 저절로 그만큼 발전했을 뿐이었다. 오순 또한 능히 그리 변했으리라 믿었을 뿐이었다.

“자주 온다니깐.”

정식은 자신의 말을 오순이 정말 믿지 못할까 안타까웠다. 오순은 가난한 소작농 집안의 의붓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아래로 동생이 다섯이나 되었다. 그래도 오순이 영민하다 하여 뒤늦게 남산학교에 보냈다. 가난한 소작농이 더구나 딸을 학교에 보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결단이 아니었다. 오순의 나이는 정식보다 한 살 위였지만, 학년은 세 학년 아래였다.

정식의 머릿속에는 오순의 가정형편이 장애물로 자리 잡을 여지가 없었다. 소망이 강력했으므로 소망 이외의 것은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았다. 원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나이에 접어들고 있었지만, 정식은 아직 실감하지 못했다.

정식이 새끼손가락을 펴서 내밀었다. 오순이 장난스럽게 정식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오순의 진심과 근심이 그런 식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정식은 느꼈다.

“누이, 여름방학을 하면 제꺽 달려올게. 학교를 졸업할 때쯤에는 우리가 한 지붕 밑에서 한 가족으로 사는 거야.”

“공부를 열심히 해야 돼.”

오순이 댕기를 하나 풀어 정식의 손목에 매주었다. 정식은 계면쩍었지만, 오순이 말하지 않은 말을 들은 듯해서 기분이 한결 펴졌다.

남산학교를 졸업하고 두 해나 쉰 정식은 정주 오산면에 있는 4년제 중등과정인 오산학교로 진학하기로 했다. 할아버지는 탐사현장에서 금광맥이 설핏설핏 이어지자 희망에 차 있었다. 성공이 기지개를 켤 때가 되었다고 믿고 정식을 객지로 유학 보내기로 결정했다. 오산학교는 1907년 독립운동가 이승훈(南岡 李昇薰)이 민족 인재를 기르고자 사재를 털어 설립했다. 정식이 사는 곽산에서 오산학교까지는 산을 사이에 두고 3, 40리나 떨어진 거리였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

정식이 목소리를 키워 다시 한 번 자작시를 읊조렸다. 사그라져 가는 붉은 낙조 사이로 서해에 떠 있는 신미도의 삼각산이 실루엣으로 보였다. 정식의 목소리가 먼 바다로 퍼져나갔다. 오순이 정식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아아, 악!”

잠시 관심 밖으로 밀려났던 아버지의 절규가 다시 불쑥 돋아났다. 정식의 집안 사정을 잘 아는 오순이 정식을 감싸 안았다. 정식은 오순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귀를 막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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