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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 장편소설] 김소월 전기-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
이정  |  leejungmj@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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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09.07  10:3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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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국경’, ‘압록강블루’와 단편소설집 ‘그 여름의 두만강’을 집필한 이정 작가가 국민애송시로 널리 알려진 소월의 시를 소설로 재해석했다. 김영삼 시인의 소월 정전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보탰다. 애송시 대부분의 주제가 되는 그리움에 초점을 맞춰 그 재미를 더했다. [편집자주]

◆ 작가의 말

재작년 여름 영화 일을 하는 지명혁 교수로부터 소월의 삶을 소제로 하는 영화 시나리오를 부탁받았다. 기억 속에 막연히 걸려 있던 소월을 구체적으로 탐색하기 시작했다. 민족의 보편적 정서를 노래해 국민 애송시로 널리 알려진 소월의 시가 한둘이 아닌데, 소월의 삶을 전기형식으로 다룬 책들은 뜻밖에 거의 없었다. 의외였다. 시인 김영삼이 지은 '소월 정전'(성문각, 1961)과 소월의 작은어머니 계희영이 지은 약산 진달래는 우련 붉어라(김소월의 생애)'(문학세계사, 1982)가 그 중 돋보이는 정도였다. 그나마 출간된 지 오래돼 구하기 어려운 이 저작들을 전거로 삼아 시나리오를 썼다. 내킨 김에 소설로 다뤄 보기로 했다.

소월의 발자취에는 여러 이설들이 따른다. 소월 사후 가장 먼저 쓰였고 많은 가족과 친지를 취재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김영삼의 '소월 정전'을 충실히 참고했다. 거기에다가 나름 선택하고 상상력을 보탰다. 행적을 복원하는 것보다는 인물을 복원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애송시 대부분의 주제가 되는 그리움에 초점을 맞추었다. 자연 소월의 동무 오순과의 연정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 나는 소월의 체취가 어린 북한 지역을 몇 차례 둘러본 적이 있다. 시 ‘진달래꽃’의 소재가 된 영변 약산, 시 ‘산유화’의 소재가 된 묘향산, 소월이 여행 중 들른 구장 용문산, 평양 대동강 주변 등이었다. 오래 체류할 수 없었고, 소월을 설명해 주는 이도 없었다. 소월의 흔적을 쫓는 일은 단지 내 눈과 생각이 일으킨 작용에 지나지 않았다. 이 경험이 소설의 현장 묘사에 도움이 되었다.

소월의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다. 아내와 유가족들이 그곳에서 6.25전쟁 전까지 살았다. 지금 그 후손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 귀국한 뒤로는 처가가 있는 구성에서 살았고, 구성 왕릉산에 묻혔다. 아마 남쪽 땅이었더라면 시비도 세우고 생가도 복원하고 문학관도 지었을 것이다. 안타깝다. 시 ‘접동새’가 80년대 중반까지 북한 인민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었다. 1990년대 초반에 나온 ‘조선문학전집’에도 시들이 실렸다. 북한 문학 출판물에서 간간히 언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내세우는 문학인의 자리에서는 멀리 밀려난 듯하다.

소월의 모교 오산고등학교 교장을 지내신 윤효 시인이 집필하는데 필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셨다. 감사 인사를 올린다.

   
 ▲ 이정 작가

◆ 이정 작가 약력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2010년 《계간문예》로 등단했다. 경향신문에서 기자, 민족네트워크연구소 부소장, 사단법인 공정세상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현재 통일문학포럼 상임이사, 6.15민족문학인남측협회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국경'(문체부 우수교양도서), '압록강블루'(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수혜작) 등과, 단편소설집 '그 여름의 두만강'이 있다.

 

 

 

 

 

 

김소월 전기_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
 

   
 

  프롤로그
  

  1


  1934년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남시

  주막의 창문에서 새어나온 불빛이 거리를 희미하게 밝혔다. 어느 집 지붕에서 뜯겨 나온 이엉 부스러기가 눈보라에 섞여 도깨비처럼 날아다녔다. 큰 나무들과 건물들이 으웅으웅 울었다. 강풍을 동반한 강설로 상점들은 일찍 문을 닫았다.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던 듯 거리는 난폭한 눈보라의 차지가 되었다.
  비틀거리며 걷는 정식(素月 金廷湜)이 불빛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두루마기 옷고름이 풀어져 맹렬히 펄럭였다. 거리가 미끄럽기까지 했다. 정식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장갑도 끼지 않은 손으로 아픈 엉덩이를 문질러댔다. 옆에 있는 이정표에 의지해 일어나려고 손을 뻗었지만, 몇 번이나 헛손질을 했다. 이정표 네 면에 화살표와 함께 쓰인 검은 글자들이 어렴풋이 보였다. 한 면은 ‘의주’라고 쓰였고, 한 면은 ‘정주’라고 쓰였다. 이정표를 부여잡고 기어코 일어섰다.
  “이놈아, 네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돼. 내가 갈 곳은 내가 잘 알아.”
  정식이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두루마기가 줄에 널린 빨래처럼 다시 펄럭였다. 불빛을 채 벗어나지 못하고 또 쭈룩 미끄러졌다. 그때 가까운 곳에서 하얀 빛줄기가 눈발을 헤치며 다가왔다. 주저앉은 채 정식이 멍하니 빛줄기를 바라보았다. 바투 다가온 빛줄기가 정식의 얼굴을 비추었다. 정식은 눈이 부셔 정면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주태배기 씬 줄 알았어. 이젠 길 위에 엉덩이로 시를 쓰나?”
  누군지 알 만 목소리였다. 검은 제모에 외투를 걸치고 허리에 찬 장칼을 덜그럭거리며 거리를 누비는 후지모토였다. 자전거를 놔두고 늦은 귀가를 하는가 보았다. 빛이 정식의 몸을 천천히 훑었다.
  “순사주재소장 나으리, 날 훼방하지 마시오. 편히 쉴 곳을 찾는 중이오.”
  정식이 빈정거렸다.
  “그렇더라도 여기는 아니네. 내일 아침에 양지바른 산기슭을 찾아보는 게 좋겠어.”
  빛이 다시 흔들리더니 정식에게서 멀어졌다. 정식이 이정표를 부여잡고 겨우 일어섰다. 비틀비틀 걸음을 떼었다.
  “똥개 같은 놈. 아냐. 똥개만도 못한 놈.”
  정식이 어둠 속으로 가물가물 사라지는 빛을 향해 뇌까렸다.

 

2

 

  눈발은 줄어들지 않았다. 반쯤 열려진 대문 안으로 정식이 들어섰다. 쿵 소리가 날 정도로 몸을 대문에 세차게 부딪혔다. 안에서는 기척이 없었다. 처마 끝에서 요동치는 풍경만이 마루에 매달린 호롱불에 설핏설핏 비쳤다. 정식은 댓돌에 주저앉다시피 하여 신발을 벗고 마루로 기어 올라갔다.
  “정호(正鎬) 엄마!”
  안방 미닫이문을 열었다. 방 가운데에 켜 놓은 남폿불이 정식을 따라 들어온 바람에 흔들렸다. 아내는 남폿불 아래 벽 쪽에서 잠들었다. 남편을 맞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깡그리 잊은 자태였다. 만약 지금 깨운다면 허구한 날 술 취해 늦게 들어오는 남편을 기다리다가 지친 지 이미 오랜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느냐고 당당히 맞서리라. 막내아들 정호 역시 엄마 팔 안에서 잠들었다. 아내의 저고리가 벙긋 열렸고, 그 사이로 도톰한 젖이 삐져나왔다. 잠들기 전까지 정호가 엄마 젖을 빨았던 모양이었다. 방안으로 기어들어온 정식이 벽을 지탱하고 앉았다.
  “정호 엄마!”
  대꾸가 없을 것을 알면서도 다시 불렀다.
  “내 말 들으오? 모두 나를 떠났단 말이오. 순(吳順)이 누이가 떠나더니 시(詩)도 떠났고, 돈도 떠났소, 내 가장 친한 동무 배찬경(裵讚景)이조차 조국을 되찾겠다며 오늘 조국을 떠났소. 이젠 내가 떠날 차례가 되었구료. 떠나는 것들은 다 이유가 있소. 나 역시 말로는 다 못할 하고많은 이유가 있소.”
  정식이 아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허리를 굽혀 아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듣느냔 말이오. 내가 떠난단 말이오. 편히 쉴 곳을 찾아 떠난단 말이오.”
  눈물이 볼에 길을 내며 흘렀다. 그것이 턱 밑에 방울로 맺혔다.
  “미안하오. 난 당신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처럼 살았소. 고백하건대 난 관습과 의무로 당신과 함께 했소. 돌이켜보면 순이 누이와 한때의 교유가 내가 살며 경험했던 참사랑이었소. 사랑은 달라고 하지 않아도 주는 것이오, 주려고 하지 않아도 받는 것이오. 영원한 이별을 다짐해도 그리움을 남기는 것이오.”
  턱에 맺힌 눈물방울 하나가 아내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내가 당신에게 남겨 줄 거라고는 옛 남편 김정식이란 구차한 이름뿐이군요. 정호 엄마, 그걸 유산으로 끌어안고 혼자서 살겠소? 대답해 보오,”
  정식이 아내의 어깨를 흔들었다. 어깨는 흔들면 흔드는 대로 둔하게 움직일 뿐이었다.
  “그렇게 살겠소? 그럼 내가 먼저 가오. 뒤 따라 오면 다시 만나 우리 함께 삽시다.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던 사랑이, 내 삶의 온갖 오욕들이, 비겁함이 거기선 깡그리 지워질 거요. 관습과 체면을 앞세워 하고 싶은 일 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도 없고, 전전긍긍 밥 빌어먹는 가난도 없을 거요. 식민지 청년의 비애도 없을 거요. 우리 진달래꽃처럼 붉은 사랑을 나누고, 아침 이슬처럼 맑은 영혼을 나누며 삽시다. 내가 오롯이 당신 몫이 되도록, 당신이 오롯이 내 몫이 되도록……. 정호 엄마, 기다리겠소. 꼭 다시 만나오.”
  정식이 두루마기 포켓을 뒤적였다. 흰 종이에 싼 것을 꺼내 펼쳤다. 밤톨만 한 검은 알약 네 개가 나왔다.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자, 세상 사람들이여…….”
  정식은 손바닥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다가 동작을 잠시 멈추었다. 
  “소월 김정식의 시간은 이 순간으로 마감됩니다. 모두, 모두 안녕히!”
  정식이 단숨에 약들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결심이 바뀌지 않도록 질겅질겅 씹었다. 이내 눈빛이 거슴츠레해졌다. 무너지듯 방바닥에 모로 누웠다. 세상사가 모두 끝났다고 다짐하듯 두 눈을 스르르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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