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위원 장석주(시인·문학평론가), 송재학(시인)

심사위원 장석주(시인·문학평론가), 송재학(시인)
심사위원 장석주(시인·문학평론가), 송재학(시인)

세계사의 아슬한 난간을 모든 인류가 함께 붙잡고 있는 상황이 과연 당대의 문학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상상보다 더 끔찍해진 현실이 섬세하고 정치한 질문을 던지는 중이다. 이제까지 그 질문들을 예민한 일부의 사람들만 수용했다면 이번에는 모든 인류가 그 질문을 이해하고 답변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투고작들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변 때문에 시의 행간은 길어지고 시적 경향은 어둡고 다양해졌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주목한 분은 유휘량의 「스케치 – 기린의 생태계」와 추일범의 「영양교환」, 이선락의 「염색공장 아줌마 보세요」 등이다. 
  
  유휘량의 ‘기린’을 발견한 것은 좋은 일이다. 환상과 서정의 플랫폼에서 울림을 구축한 유휘량의 「스케치 – 기린의 생태계」의 ‘기린’은 시적 화자의 그림자 놀이에서 탄생된 발명이다. 불빛에 제 몸을 맡기면 목이 길어지는 그림자/기린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목이 길어진다는 것은 불빛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간절하다는 갈망의 의태이기도 하다. 기린의 파트너로서 ‘새’라는 키워드 역시 그림자 놀이에서 추출된 두 손의 변주이다. 그 새는 그림자/기린의 돌기이면서 또한 외부로 향하는 메신저이기도 하면서 누군가 그림자에게 보낸 메신저이기도 하다. 내부에서 고독사로 향하는 새, 외부로 나가지 않으려는 새를 씹어먹으면서 기린/그림자의 외부는 딱딱한 눈이 내리거나 자꾸 굳은 물감의 세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심지어 새알의 둥지에서는 액체의 금속이 흘러내리는 종말의 세계가 시작된다. 그러니 이제 나를 자아와 겨우 연결된 기린이라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의 삶이 기린을 믿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할까. 
 
  “죽은 고양이를 세 번 봤다 / 로드킬은 빼고”라는 맹렬한 도입부는 추일범의 「영양교환」이다. ‘이런 것도 밥’, ‘이런 것도 몸’, ‘이런 것도 일’을 행사하던 죽은 고양이 세 마리는 우리 생활의 공감각 부분이다. 어쩌면 과거, 현재, 미래를 실천하는 중이기도 할 터이다. 누군가 우리를 사육하고 있고, 더 끔찍한 것은 누군가 우리를 고양이처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고양이의 주검에 휘발성 냉소가 건너가는데, 다시 끔찍한 것은 그게 차라리 비애이기 때문이다. 고양이와 사람의 의무가 있다는, 단호하고 간결한 추일범의 고유성이 눈을 사로잡는 이유이다.  

  이선락의 「염색공장 아줌마 보세요」은 관찰의 측면에서 시의 전범을 드러낸 가편이다. 사물과 사람이 가진 밝음과 어둠, 슬픔과 기쁨이라는 ‘안팎’과 ‘좌우’를 어김없이 추스리면서 다시 사물과 사람에 대해 되돌아오게끔 한다. 게다가 리듬이 시를 잘 부추기고 있다. 시의 이야기라는 측면에 눈을 뜨게 된다면 이선락의 시적 영토가 어디까지 벋어나가게 될지 짐작할 수도 없다.  

  이은경의 「창, 세기」는 사물이 가지는 매혹에 헌신한다. 세계와 나를 연결하는 물질과 영혼으로서의 ‘창(窓)’을 넘나드는 충분한 존재들이 여기 있다. 때로 눈부시고 때로 끔찍한 것들, 그게 같은 인과율인 것을 소스라치게 깨닫는 지점이 돋보인다. 

  최정민의 「껍질에 베인 손」, 김희숙의 「털실로 얼음 들기」에도 우리가 서성거리고 편애했다는 것을 덧붙인다. 

  시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의 응답 사이에서 우리는 유휘량의 「스케치 – 기린의 생태계」를 당선작으로, 추일범의 「영양교환」을 가작으로 선택했다. 당선된 두 분에게 축하를, 여기까지 힘겹게 도착한 분들의 여정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심사위원 장석주(시인·문학평론가), 송재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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