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晉 문공-논공행상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居者社稷之守 行者羈絏之僕 거자사직지수 행자기설지복
남은 사람은 사직을 지켰고, 나간 사람은 말고삐 잡는 고생을 했다 <春秋左氏傳>
피난한 사람만 고생한 공이 있는 게 아니라 남은 사람도 그만큼 공이 있었다는 말

새로운 권력이 들어서면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의 캐릭터를 먼저 보여주게 된다. 어떤 권력자는 백성에게 가혹한 성격을 드러냄으로써 복종시키려 하고, 어떤 권력자는 자비를 베풀어 자발적인 충성을 얻으려 한다. 후일 중원의 패권을 놓고 다툰 초-한 시대를 예로 들어보자.

초나라의 항우는 정복하는 곳마다 그에게 대항하던 사람들을 땅에 묻어 천하에 카리스마를 과시했고, 한나라의 유방은 정복하기 전에 투항을 먼저 유도하여 순순히 투항하는 수령들에게는 자기 사람이 되는 조건으로 그 직책을 유지시켰다. 관용의 캐릭터다. 초기에는 가혹한 카리스마의 승리였다. 항우는 거병한지 3년 만에 천하를 통일하고 진시황의 궁궐을 불태웠다. 그러나 잠시 후에 초나라를 부정하는 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나 중국은 다시 분열되고 겨우 3년 안에 항우는 산골 오지까지 달아나다 목숨을 끊었다. 그를 대신하여 5백년 왕조사를 새로 시작한 사람은 역시 자비의 캐릭터인 유방이다. 

진(晉) 문공은 어떤 캐릭터의 새 권력이었을까.

그는 아무래도 자비로운 군주였다. 어리석고 잔인한 회공을 몰아냈지만 그의 수하에 있던 여성과 극예를 죽이지는 않고 놓아두었다. 물론 그들이 뿌리 깊은 토착세력이기 때문에 함부로 제거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문공에게 운 좋은 일이 되었지만, 바로 그들이 스스로 두려움을 견디지 못해 반란을 일으켰고, 문공은 진(秦)의 도움을 받아 이를 격퇴했다. 그제야 비온 뒤에 굳는 땅처럼 문공의 지위는 비로소 안정을 찾게 된다. 만일 발제에 대한 원한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했다면 문공은 무엇을 해보기도 전에 반란세력에게 살해되었을 지도 모른다.

문공이 원한을 가졌던 또 한사람의 관리가 <춘추 좌전>에 등장한다. 이름은 두수(頭須)였다. 문공이 공자였을 때 두수는 나이 어린 창고지기였는데, 중이가 국외로 도망했을 때 함께 가지 않고 남아서 창고의 재물을 훔쳐내 써버렸다. 다른 기록에는 두수가 중이의 망명 비용을 훔쳐내 써버렸으므로 일행이 크게 고생하여 망명자들이 원한을 가졌다고도 한다.

문공이 돌아온 뒤에 두수가 제 발로 찾아와서 알현을 청하였다. 목욕 중이던 문공이 면회를 거절하자 두수가 시종에게 말했다.

“머리를 감을 때는 머리가 숙여 심장도 거꾸로 뛸 테니 바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沐則心覆 心覆則圖反). 남아있던 사람들은 사직을 지키느라 고생했고, 임금을 따라 국외로 떠돈 사람들은 임금의 말고삐를 잡고 고생한 것인데(居者爲社稷之守 行者爲羈絏之僕), 어째서 남아있던 자들은 죄인취급을 한단 말인가. 군주께서 나 같은 사람을 원수로 여긴다면 군주가 두려워서 떠나야 할 사람은 한둘이 아닐 것이다.”

문공이 그 말을 듣고 급히 두수를 불러들였다. 두수에게 예전처럼 창고 관리를 맡기니, 국내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긴장을 풀고 새 체제를 받아들였다. 그동안 혜공과 회공 치하에서 종사했던 관리들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 문공을 위해 종사했다. 문공은 이밖에도 19년 동안 자신을 따라 외국을 전전했던 수하들에게 공의 크기를 따라 포상하고, 적(狄)과 진(秦)에서 결혼했던 부인들을 맞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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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교체기에는 많은 변화가 생기고 그 와중에 사람마다 희비가 엇갈린다. 특히나 진 문공의 즉위와 같이, 있던 군주를 억지로 몰아내고 권력을 차지하는 정변의 경우는 더욱 혼란스럽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는 마땅히 심판받아야 할 사람이 용케 줄을 잘 바꿔 살아남거나 오히려 공신으로 둔갑하기도 하고, 마땅히 구제되어야 할 사람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거나 벌을 받는 일도 생긴다. 현명한 군주라면 이 가운데서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잘 배려해야 새로운 원망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우리 역사만 해도 일제 식민시대가 지난 직후에 이 같은 혼란을 겪은 경험이 있다.

일찍이 임진왜란 때 피난에서 돌아온 선조 임금은 자신을 의주까지 수행하며 가시거리에서 함께 고생했던 사람들에게는 정승부터 마부와 하인에 이르기까지 봉작을 내렸으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장수와 의병들에게는 보상이 아주 인색했거나 오히려 형벌에 가깝게 책임을 물었다. 오죽하면 사관(士官)은 이런 상벌에 대하여 비판하는 말이 많았다는 말까지 실록에 기록한다. 신민으로 하여금 자신의 충성과 희생을 스스로 후회하게 만드는 논공행상은 원칙 없는 국정을 자초하는 일이다. 1950년의 한국전쟁 때도 같은 일이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곧바로 대전까지 줄행랑치면서 한강다리를 끊어 시민들의 피난을 불가능하게 했던 대통령과 정부가, 서울을 수복한 후에는 서울에 남았던 사람들을 인민군에 부역했다 하여 반역자 취급을 했다. 어리석은 역사는 이렇게 되풀이되는가.

진 문공은 여상과 극예 같은 환원되기 어려운 구악(舊惡)의 뿌리는 엄격히 제거해야 했고, 발제나 두수 같은 관리들은 과감히 끌어안아야 했다. 잘라낼 대상과 끌어안을 대상을 절묘하게 잘 판단했기 때문에 그의 권력은 성공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고 하는 것이다.

“남아서 사직을 지킨 사람이나, 임금의 말고삐를 잡고 국외로 떠돈 사람도 고생한 공은 똑같습니다. 단지 남아있었다는 것만으로 원수처럼 여기신다면 대다수 백성이 원수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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