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晉 문공 중이(3)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子乃拘小禮 忘大醜乎 자내구소례 망대추호
사소한 예의에 얽매여 큰 부끄러움을 잊다 (<史記> 晉世家)
진 회공이 버리고 간 목공의 딸을 취하기를 주저하는 중이에게, 측근의 충고  

중이가 성왕의 후대를 받으며 초나라에 머문 지 몇 달이 안 되어, 섬진(秦)에서 사신이 왔다. 섬진의 목공이 당진(晉)의 군주를 바꾸기 위해 중이를 초청하려는 것이었다.

본래 당진의 태자 어는 섬진에 인질로 와 있었는데, 아버지 혜공이 죽자 말도 없이 자기 나라로 달아나 제후-그가 회공(懷公)이다-가 되었다. 더구나 어가 와있는 동안 목공이 아끼는 딸 희영을 주어 사위로 삼기까지 했는데, 그 처마저도 무책임하게 버려두고 갔으니 목공은 괘씸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목공의 사신을 만나본 초 성왕이 중이에게 말했다. “마침 잘된 일입니다. 우리가 직접 공을 돕고 싶어도 여기서 진(晉)까지 가려면 몇 나라를 거쳐야 하는 까닭에 고민이 있었는데, 마침 당진과 접경하고 있는 섬진에서 당신을 돕기로 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없습니다.”

성왕은 중이에게 무운을 빌어주며 두둑한 선물까지 안겨주었다.

당진의 회공은 겁이 많아서 제후가 된 뒤에도 외국에 있는 중이와 섬진의 목공을 모두 두려워했다. 그래서 중이를 따라간 사람의 가족들을 협박하여 모두 귀국시키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대부 호돌이 이를 거절했다. 호돌은 백성과 중신들 사이에서 신망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자식들이 중이 공자를 따라가 섬긴지 벌써 십년이 넘었는데 이제 와서 주인을 배반하고 돌아오라고 하면 오겠는가.’라며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회공이 호돌을 죽여버렸다. 민심은 자연히 회공에게 등을 돌리고, 망명중인 중이가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중이가 진(秦)에 도착하자 목공은 매우 반가워하면서 다섯 명의 여자를 주어 처로 삼게 했다. 60세 나이에 젊은 여자를 다섯이나 한꺼번에 얻었으니 반갑지 않을 리 없었겠지만, 한 가지가 께름칙했다. 여자들 중에 일찍이 어에게 시집갔던 공주 희영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중이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측근 사공계자가 말했다. “그의 나라도 정벌하려고 하는 마당에 하물며 전처를 받아들이는 일쯤 무어 그리 어려운 일입니까. 희영을 받아들이면 곧 진 목공과 친족이 되어 친분을 강화하는 일이 됩니다. 주군께서는 소소한 예절에 얽매여 중요한 일을 그르치지 마십시오.”

중이가 희영을 아내로 맞이하자 목공은 크게 기뻐하며 주연을 베풀었다.

중이가 섬진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본국으로부터 은밀히 와서 충성을 맹세하며 내응을 약속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럴수록 중이와 연결된 본국 사람들이 회공으로부터 당하는 핍박도 점차 거세졌으므로 오래 지체할 수가 없었다. 중이는 귀국을 결심했다. 중이의 현사들이 본국의 대부들과 내통하여 회합을 가진 뒤 우선 당진의 큰 도시인 곡옥(曲沃)으로 가서 정권을 인수하기로 합의했다. 진 목공의 군대가 국경인 황하(黃河)까지 경호하였다.

중이는 당진의 군영으로 들어가 곡옥으로 진격하였고, 무사히 입성하여 새로운 군주가 되었음을 선포했다. 본국의 대신들이 모두 곡옥으로 와서 충성을 맹세했다. 중이의 나이 62세요, 아버지가 헌공이 보낸 자객들로부터 달아나 망명길에 오른 지 19년만의 일이다. 그가 곧 진 문공(文公)으로 불린다. 한편 회공 어는 자신의 호위군을 이끌고 겨우 고량으로 피신하여 저항하였는데, 중이가 군사를 파견하여 주살하였다.

이야기 PLUS

중이가 환국하기 전, 당진(晉)의 제후 회공은 이미 민심을 잃었고 주변 강대국들도 중이의 환국을 돕기로 합의가 되어 때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문공이 즉위한 뒤 며칠째에 환관 발제(혹은 이제)라는 사람이 알현을 청하였다. 문공은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예전 공자 중이가 아버지 헌공의 명을 받들어 포읍을 지키고 있을 때, 공자를 죽이라는 헌공의 밀명을 받고 죽이려 쫓아왔던 자객이다. 중이가 담을 넘어 도망할 때 발제가 칼을 휘둘러 중이의 옷소매가 잘려나갔다. 간발의 차이로 죽음을 모면한 중이는 숨이 차도록 뛰어 도망치면서 이를 갈았다. 또 중이가 적나라에 있을 때 혜공의 명을 받고 중이를 죽이러 찾아온 자객도 바로 발제였다. 어찌 그 이름을 잊을 수 있겠는가.

문공은 그를 만나지 않고 사람을 보내 질책했다. “그 때에도 혜공은 3일의 기한을 주었는데 너는 나를 화급히 죽이려고 하룻밤 사이에 달려왔다. 네가 어찌 제 발로 찾아와 나를 보자 하는가.” 발제가 말했다. “주군을 감히 두 마음으로 섬길 수가 없으니 그것은 혜공의 신하로서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주공께서 환국하여 제후가 되셨는데, 지난 일만 기억하시려는 것입니까. 제나라 환공은 망명에서 돌아와 제후가 되었을 때 자신을 죽이려고 활을 쏘았던 관중을 재상으로 임명하여 패자의 대업을 이루었습니다. 이 사람이 중요한 일을 고하려고 죽을 것을 각오하고 찾아왔는데 주군께서 접견을 하지 않으시겠다면 임박한 재난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문공이 발제를 만났다. 발제가 엄청난 일을 일러바쳤다. 혜공과 회공을 섬겼던 대부 여성과 극예가 곧 군사를 몰아 궁성에 불 지르고 문공을 시해하기로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문공이 그들을 불러들이려 하였으나 그 수가 너무 많아 오히려 불리했다. 문공은 비밀리에 변복을 하고 성을 빠져나가 섬진(秦)으로 몸을 피했다. 며칠 뒤 그믐날 밤, 과연 여성과 극예의 군사들이 궁성을 기습하여 불을 질렀다. 그러나 문공이 성에 없는 것을 알고 그들은 혼란에 빠졌다. 성을 지키던 부대가 반격을 하고 바깥쪽에서는 섬진의 정예부대 3천명이 뒤를 공격하니 반란은 곧 진압되었다.

“그의 나라도 정벌하려고 하는 마당에, 하물며 전처를 받아들이는 일쯤 무어 그리 어렵습니까. 소소한 예절에 얽매여 중요한 일을 그르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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