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배제고보 시절과 도일 13 바람이 살랑살랑 피부를 간질여 더위를 식혀 주는 회나무 그늘 속. 정식은 도미꼬, 배찬경과 함께 도시락을 가운데 두고 너럭바위 위에 둘러앉았다. 도심의 절 경내면서 많은 묘비들이 가까이 있다고는 하지만, 고즈넉한 숲속 분위기였다. 마침 공휴일이었다. 배찬경이 찾아왔다. 도미꼬의 어머니가 소풍을 권했고, 도시락을 준비했다. 정식이 학원에서 돌아오면 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꼴이 안쓰러웠는가 보았다. 정식은 공부도 공부려니와 나가면 쓰게 되는 돈을 벌충할 방법이 없었다. 군대 간 아들 또래라서일까? 도미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3장 수상한 밥집(1)모텔의 사내가 일러준 식당은 건물 모퉁이를 돌자 곧바로 나타났다. 분식 종류를 퓨전식으로 파는 곳이었다. 모던한 분위기가 메뉴와 잘 어울렸다. 식당은 4인용 탁자 한 개와 2인용 탁자 두 개로 이루어져 있었고 긴 탁자를 창가에 붙여 간이의자 네 개를 놓아 좁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구조였다. 한쪽 벽면을 모두 밥 말리의 공연사진으로 도배를 하여 천장에서 두 개의 조명을 쏘아 마치 밥 말리가 막 공연이라도 할 것 같은 착시효과를 주었다.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레트로 가든(2)언젠가 당신은 건설회사 거래처 사장들 앞에서 결재서류를 집어 던지며 내게 소리를 질렀다. 늘상 있어 온 일이니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다만 그날은 당신에게 먹혔을 또 한 곳의 하청업체 사장이 약물 과다복용으로 병원에 실려 간 날이었고, 나는 결재를 받다 당신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다. 네 일이나 똑바로 하라며 서류를 집어 던지던 당신. 아들한테 너무 하는 거 아닌가, 하며 비웃던 목소리. 나는 당신의 성난 마음을 고스란히 견뎠지. 당신은 그날 밤 나를 술집으로 불러들였어. 내가 도착한 줄도 모르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2장 레트로가든(1)밖으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햇빛이 날카롭게 눈을 찔러댔다. 기타 소리를 쫓아 주변을 돌았다. 모텔 건물 뒤로 나 있는 찻길로 갔다. 왕복 이 차선 도로인 좁은 찻길이었다. 50미터 정도 걷다 보니 바로 옆에서 기타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같은 코드를 지겹도록 반복하고 있었다. 초보인가. 바레 코드를 연습하는 걸 보면 생초보는 아닌 것 같았다. 어쨌든 상대는 집요한 성격인 것만은 분명했다. 줄을 긁어대는 소음과 두 개의 코드를 오가며 쉼 없이 반복하는 짓은 정말이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수
4장배제고보 시절과 도일 10 관부연락선(關釜聯絡船) 선미에서 일장기가 펄럭였다. 물안개 속으로 부산항과 그 너머 일본식 집들과 창고가 즐비한 도시와 산들이 멀어지고 있었다. 정식에게는 흔쾌하지만은 않은 여정이었다.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목표는 뚜렷했다. 과연 그럴 수 있을지는 저 도시를 감싼 물안개 너머로 보이는 풍경처럼 불투명했다. 넓은 세계에서 문학을 공부했으면 하는 소망은 이미 접었다. 배찬경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정식은 아버지가 일본 놈에게 당했고, 오산학교라는 민족학교에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1장 유서(2)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기다렸다는 듯 순식간에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침대 위에 가지런히 개켜둔 이불이 약간 뒤틀린 것이 보였다. 이불을 다시 펴서 똑바로 개켜놓고 베개의 먼지를 탁탁 털어냈다. 깔끔하게 정돈된 상태여야만 뭐든 집중하게 되는 습관은 여전했다. 가방을 열어 죽음을 실행할 만한 물건을 찾아보았다. 수면유도제가 꽤 담긴 약병, 넥타이, 커터 칼. 커터 칼을 꺼냈다. 은색 칼날을 밀어냈다. 뾰족한 끝부분이 유난히 날
4장배제고보 시절과 도일 7 나뭇가지들이 하얗게 치장을 했다. 들새들이 퍼덕거리며 나뭇가지 위에 날개를 접느라 눈가루가 풀풀 날렸다. 나뭇짐을 진 오순 아버지가 오래된 느티나무 밑에 보였다. 남산에 올라가 겨울을 날 땔감을 해 오는가 보았다. 여전히 소작농이었고, 여전히 가난했다. 그래도 오순을 공부시킬 만큼 눈이 트인 사람이었다. 정식은 오순의 아버지와 마주칠까 우려하여 못 본 척 갈밭 사이로 난 길로 걸음을 옮겼다.누구나 연인에게 ‘옛’자 하나면 앞에 붙이면 잊히는데……. 아, 누이를 보냈지만, 누이는
[박숲 작가 당선소감] 신춘문예에 응모했던 작품들이 당선되지 못한 채 쌓여만 가고 있었다. 한파가 이어진 어느 날, 마찬가지로 체념의 아침을 걷고 있었다. 녹지 않는 눈은 군데군데 쓰레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앞서가던 아이가 더러워진 눈더미를 발로 찼다. 이유 없이 아렸다. 잔치가 끝난 뒤의 쓸쓸함. 그 순간 스팸으로 의심되는 전화를 받았다. 나도 모르게 딱딱한 목소리를 냈다. ‘현대경제신문’ ‘대상’이라는 단어가 차가운 공기를 뚫고 나뭇가지 사이로 빠르게 통과했다. 그토록 맑고 투명한 아침햇살이라니! 수면제를 계속 복용해서라도
4장배제고보 시절과 도일 4 개벽사(開闢社) 편집실 밖 호두나무를 감고 올라간 담쟁이 잎들이 불만스런 몸짓처럼 바람에 나부꼈다. 근처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참새 대여섯 마리가 하얀 배를 드러내며 포르르 날았다. 정식은 방금 나빈이 한 말을 머릿속에서 곱새기고 있었다.“왜 자네 시를 남이 고친단 말인가. 자넨 당당한 시인일세. 그뿐인가 휘황한 장래가 약속된 시인 아닌가.”나빈만이 아니었다. 개벽사 주간 이돈화(李敦化)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정식이 직접 가져온 시와 김억이 고친 시를 견주어 보고 불만이 드러나도록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4장배제고보 시절과 도일 2 배제고보 교정의 전나무 숲을 거닐던 정식이 앞에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배찬경이 누구와 함께 오는 중이었다. 굵은 검은 테 안경을 썼는데, 어서 본 듯한 사람이었다.“어이, 정식 군, 찬경 군을 만나니 자네가 여기 있을 거라고 하더군.”배찬경을 따라오는 사람이 먼저 말을 건넸다. 다가온 얼굴을 보니 나빈(稻香 羅彬)이었다. 경성에 올라온 직후 김억의 소개로 만난 적이 있었다. 나빈은 정식과 동갑내기였지만, 이미 3년 전(1919년)에 배제고보를 졸업했다. 요즘에는 현진건(玄鎭健), 홍
4장배제고보 시절과 도일 11922년경성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왕십리 밤거리를 정식은 배찬경과 함께 거닐었다. 김억에게 시작 노트를 가져다주고 하숙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배찬경을 만났다. 배찬경의 하숙은 서소문 부근이었다. 다리는 다 나았다고 했지만, 아직도 심하게 절었다. 아마 평생 그렇게 걸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런 외모 탓에 정식은 배찬경을 얼른 알아보았다.김억은 경성에 올라와 지지난해(1920년) 여름부터 1년 남짓 ‘폐허(廢墟)’ 동인으로 활동했다. 이후 번역에 몰두하여 지난해에는 오뇌(懊惱)의 무
3장3.1독립운동과 폐교 12사랑방에서 할아버지와 정식이 마주앉았다.“오산학교는 당장 재건키 어렵다더라. 너도 배찬경이처럼 경성으로 가서 공부를 계속하거라. 넉넉하지는 못할 테지만 유학비를 대 주마.”그렇지 않아도 지난해 여름 한 철을 정식의 집에서 보낸 김억이 정식을 경성 배제고보에 보내 공부하게 할 것을 할아버지에게 권유했었다. 마침 집안에 매캐한 연기처럼 넘실대던 근심을 어느 정도 물리친 뒤였다. 금광은 그 결정적 장래를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채산성이 향상되고 있었다. 아버지의 병세 또한 어느 정도 차도를 보였다. 둘째 작은
3장3.1독립운동과 폐교 10 저물 녘 대동강이 붉게 타올랐다. 물에 비친 고찰 영명사가 황금옷을 입고 찰랑거렸다. 그 사이를 거룻배 한 척이 천천히 노를 저으며 지나가는 중이었다. 강변 숲길에는 기름종이로 만든 우산을 함께 쓰고 젊은 남녀가 걷고 있었다. 비를 무릅쓰고 주위 풍광을 만끽하며 속마음을 나누나 보았다.아직도 정식은 풍광이 마음에 담기지 않았다. 연광정을 거쳐 대동문, 을밀대, 청류벽 등 평양팔경에 나오는 명소들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연당에 내리는 빗소리를 듣는다는 연당청우(蓮塘聽雨)나 을밀대에서 봄을 감상한다는 을밀상
3장3.1독립운동과 폐교 7 오순의 집을 거쳐 온 어둠이 석양을 몰아냈다. 정식이 홀로 강변의 갈밭 사이를 지나갔다. 동녘에서 붉은 달이 솟아올랐다. 달빛을 쬐던 갈게들이 인기척에 놀라 갈대 속으로 허둥지둥 달아났다. 잠자리를 찾아 갈밭에 깃을 접는 물새들이 부산을 떨었다. 저녁 해는 지고서 어스름의 길저 먼 산엔 어두워 잃어진 구름만나려는 심사는 웬 셈일까요그 사람이야 올 길 바이없는데발길은 누 마중을 가잔 말이냐하늘엔 달 오르며 우는 기러기.- ‘만나려는 심사’ 전문 정식이 나지막이 자작시를 읊조렸다. 만날 사람은 떠났고, 오라
3장 3.1독립운동과 폐교 5 멀리 동쪽 산마루 위로 기러기 떼가 꾸룩꾸룩 울면서 줄지어 날아갔다. 겨울을 난 뒤 북쪽 나라로 터전을 옮기는 모양이었다. 해거름 어스름 속으로 자취를 감추는 기러기 떼를 바라보면서 정식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할아버지는 전처럼 제석산을 넘어가는 길을 택했다. 말을 탄 할아버지는 이번에도 정식을 앞세웠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뒤를 막아섰다. 덜 녹은 눈 때문에 길이 미끄러웠다. 말이 이따금 발을 잘못 디디면서 콧김을 내뿜었다. “어?” 할아버지가 갑자기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저, 저기 불길
3장3.1독립운동과 폐교 3 “우리는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민족은 스스로 주권을 행사할 것임을 선언하노라.”갈산 장터 가운데의 임시연단 위에서 오산학교 학생 대표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장터에는 오산학교 학생과 교직원, 용동교회 신자, 면민 등 수백 명이 모였다. 전날 밤 늦게까지 오산학교와 용동교회를 통해서 격문이 돌았다.3월 1일 경성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는 정주 출신으로 오산학교 설립자인 이승훈이 민족대표로 참석한데다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어 경부총감부로 압송되었다는 소식까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3장3.1독립운동과 폐교 1 “김정식 군, 앞으로 나오게.”정식이 교탁 앞으로 나갔다. 김억이 노트 하나를 정식에게 건넸다. 정식이 며칠 전 김억에게 가져다준 시작 노트였다. 요즘 자신의 복잡한 감정을 토로한 시들이었다. 부조리한 주위 사람들에 대한 반항이기도 했고, 가슴 메어지는 심사의 일단이기도 했다. 노트를 들고 김억이 교실에 들어올 때부터 정식은 가슴이 벌렁거렸다. 드디어 비평의 형식을 빌려서나마 김억의 의견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다.“지금부터 김정식 군의 시를 음미하는 시간을 갖겠네. 김정식 군, 그 노트에서 접힌 부분의
2장거미줄과 잠자리 14 “삼촌, 제발 문을 열어 줘.”정식은 둘째 작은아버지 김인도(金麟燾)에게 방문을 두드리며 사정했다. 어떻게든 방에서 빠져나와 도망쳐야 했다.정식이 할아버지를 따라 집에 당도했을 때는 늦은 밤이었다. 그런데도 마당과 마루, 방들에 호롱불을 훤히 밝히고 있었다. 울 밑에는 새로 화덕을 만들어 부인네들이 전을 부치고, 부산하게 부엌을 들락거렸다. 입맛을 당기는 기름 냄새가 집안에 진동했다. 황해도 재령의 명신학교 교사로 있는 둘째 작은아버지 김인도도 집에 와 있었다. 밖에서 만나면 서로 항렬을 따져야 알 수 있을
2장거미줄과 잠자리 11 하현달이 나뭇가지에 걸렸다. 무슨 말인가 정식에게 줄기차게 해 주는 듯했다. 정식은 귀를 바짝 세우고 눈을 깜박여 달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렇게 달을 바라보며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는 중이었다. 눈두덩에 군살이 얹힌 것 같은 이물감이 점점 커져 거북살스러웠다. 동트는 시간이 두려운 새벽 도둑처럼 쫓겨 가는 바람이 거칠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심술궂게 자주 달을 숨겼다.기숙사 책상 앞에 앉은 정식은 한숨을 토해냈다. 봄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예전엔
2장거미줄과 잠자리 9 “정식아.”어머니가 안채 대청마루 끝에 서서 손짓을 했다. 정식은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용하는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빨래한 옷가지들을 한쪽으로 치우고 무표정하게 아랫목에 앉았다. 사랑방에서 전염되었을 법한 쌀쌀한 기운이 감돌았다. 정식도 불편한 심사를 숨기지 않고 어머니 앞에 앉았다.“바른대로 말해라.”무슨 뜬금없는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정식은 어머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너, 그 애랑 입을 맞추었느냐?”어머니가 다그쳐 물었다.“아니.”“그럼 그 애와 하룻밤이라도 잔 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