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10장 버스킹 버스킹 커뮤니티센터는 자치구에서 운영하는 주민들을 위한 시설이었는데, 사 층 건물 한 채를 모두 사용하고 있었다. 일 층은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체험 방식의 교육 공간으로 이용되었고, 이 층은 다문화 가정 또는 맞벌이 가정의 아이들을 위한 돌보미 공간이었다. 여자는 삼 층으로 나를 데려갔다. 쉼표에서 처음 마주했던 여자와 현재 내 앞의 여자는 전혀 다른 인물처럼 보였다. 한 가지 색으로 보이지만 칸마다 신비한 그림이 숨겨진 부채처럼 내면의 스펙트럼이 다양한 사람 같았다. 문득 처음 여
5장 귀국과 생업 7겹쳐진 산들이 수묵화처럼 짙거나 엷게 사방에 펼쳐졌다. 정식은 향기 나는 나무가 많아서 묘향산이라고 한다는 산 이름의 유래를 확인하고 싶었다. 쪽빛 하늘에서 바람이 건들건들 불어 왔지만, 아무리 코를 벌름거려도 향내는 풍기지 않았다. 보현사 암자 이름인 ‘법왕대(法王臺)’라는 글자를 새긴 너럭바위에 앉아 다리쉼을 했다. 이름 모를 작은 풀꽃들이 단풍 사이로 보였다. 새소리가 아늑히 들려왔다. 지나온 영변 약산과 서해도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그저 생각일 뿐 약산만 하더라도 여기서 3백 리 길이었다.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9장 클럽 비따비(1) 소라와 재림이 기다린 곳은 십 대들이 몰래 드나든다는 클럽이었다. 난생 처음 그런 곳에 가게 된 나는 두려움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꼈다. 어른들이 알지 못하는 숨은 공간, 우리 또래들만 갈 수 있는 공간. 마치 길거리를 각자 떠돌던 고양이들이 한곳으로 모여든 것처럼 아이들의 눈빛에는 어딘지 모르게 허기진 구석이 있었다. 소라와 재림은 자주 드나든 애들처럼 자연스러웠다. 눈이 휘둥그레진 내가 계속 놀라자 용주가 내 어깨를 치면서 말했다. 정대 역시 용주와 가끔 왔었다며 흥분한 표정이었다.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8장 내가 그랬나(2) *모든 것이 새로웠다. 이곳에 닿기 전까지의 삶이 먼 곳의 일처럼 여겨질 만큼. 감당하기 힘든 증오와 끓어오르던 복수심도 잠시 소강상태를 맞은 것처럼 잠잠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음악을 다시 시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감춰진 죄책감을 부추겼다. 뭔가에 홀린 듯 나도 모르게 기타를 잡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여자의 권유로 어깨와 갈비뼈 통증 치료를 받았다. 근육파열을 방치한 탓에 생각보다 치료가 더뎠다. 나는 말리의 식당 일을 도우며 틈틈이 쉼표에서 첫날 읽다 만 지미 핸드릭스 책을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8장 내가 그랬나 구보아저씨는 젊은 시절 음악계에선 꽤 알려진 유명 기타리스트였다고 했다. 어떤 이유에선지 갑자기 사라진 구보아저씨는 그 이후 음악계에서 모습을 감췄다고 했다. 구보아저씨에 대한 온갖 추측이 난무했지만 아저씨는 금세 잊혀진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오랜 세월 떠돌면서 건강을 많이 잃은 건지 처음 만났을 땐 팔을 거의 쓰지 못했다고 했다. 1년 넘게 재활치료를 받아서 이제는 그나마 팔의 신경이 거의 돌아온 것 같다고 했다.“혹시 아까 그 기타에 대해 아는 거 있으세요?”“아 그 기타, 볼수록 매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7장 오해(3) *당시 루시퍼를 훔친 뒤 우리는 기타 주인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하지만 누구도 내색할 수 없었다. 주말 동안 멤버들은 동아리실에 모여 페스티벌 참석에서 누가 루시퍼를 연주할지에 대해 의논했다. 당연히 메인 기타 포지션인 용주가 연주를 해야 맞지만 용주는 일렉기타와 베이스를 연습해왔다. 어쿠스틱은 내 포지션이었기에 다른 멤버들은 용주와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나는 루시퍼를 연주하는 것이 왠지 두려웠다. 그럼에도 루시퍼는 꼭 내가 연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라가 의견을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오해(2) *가게 밖으로 빠져나왔다. 여기저기 둘러보았지만 노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가게로 다시 들어갈까 하다 바깥을 둘러보았다. 마당이 있는 쪽 담을 끼고 옆으로 돌았다. 길게 이어진 골목은 주택가였지만 낡은 집이 대부분이었다. 드문드문 허물어진 폐가도 여러 채 보였다. 재개발 구역이거나 버려진 동네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4차선 도로 건너편과는 전혀 다른 얼굴처럼 분위기부터 달랐다. 맞은편 동네는 신축 건물과 함께 새로 생긴 듯한 상점들이 드문드문 자리 잡고 있었다. 이쪽과 저쪽이 찻길을 사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7장 오해(1) 모텔 문을 나서자마자 차가운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사내가 뒤쫓아 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작정 뛰었다. 그것만이 정답인 것처럼. 그 옛날 기타를 훔쳐 달아나던 때와 오버랩 되었다. 도망치는 것이 맞는 걸까. 모텔 사내는 더 이상 쫓아오지 않는지 내 숨소리만 요란했다. 비가 그친 뒤라 그런지 쌀쌀했다. 안개가 찻길과 건물들을 부옇게 채웠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공중으로 퍼졌다. 아침이 다가오는 것 같았지만 안개 때문인지 동네는 여전히 깊은 밤처럼 고요하고 신비로웠다
5장 귀국과 생업 5 구성 평지동. 정식이 이부자리에 몸을 눕히자마자 아내는 성큼 저고리를 벗었다. 밤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체면을 차리지 않았다.“아이들 장난감은 관두더라도 장인 장모 선물은 사왔어야지요.”아내가 등잔불을 껐다. 이불을 들썩이며 정식 곁에 누웠다. 어느새 치마와 속옷을 벗었는지 미끄러운 맨살이 정식의 몸에 닿았다.“됐어요. 살아 돌아온 것만 해도 다행이에요.”아내가 정식의 샅 사이로 손을 넣었다.“당신을 보니까 오빠의 불편한 심기가 도졌나 봐요. 도대체 혼인을 하기는 한 거냐고 자주 물었거든요.”가족들의 눈총과 구박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6장 기타 루시퍼(3) 용주는 생각보다 치밀했다. 언제 이렇게 모든 정보를 수집해서 열쇠까지 맞춰둔 걸까.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 했다. 구멍에 열쇠를 넣고 차분하게 현관문을 따는 용주를 보자 나는 용주가 조금 무서워졌다. 정대는 현관문 근처에 숨어 망을 보았고, 나는 용주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집이 비어 있다고는 했지만 갑자기 누군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용주의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나와는 달리 용주는 몹시 침착했고 마치 아는 집에 들어온 것처럼 자연스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6장 기타 루시퍼(2) *청계천을 다녀온 뒤 우리 멤버는 자주 모였다. 우리가 다니던 교회 옆 맥도널드 2층은 언제나 한산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용주를 중심으로 모의를 했다. 용주는 우리들만의 기타를 마련해야 한다며 썰을 풀기 시작했다. ‘진정한 음악가에겐 최고의 장비는 필수조건’이라는 것이 핵심이었는데, 용주의 말을 정리하면,‘진정한 음악가 = 좋은 악기 소유 = 비싼 악기’이런 등식이 성립했다. 최상의 기타를 찾아야 했다. 그것도 단 한 대 뿐인 기타 ‘루시퍼’여야 했다. 우리의 가슴에 별을 품게 만든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6장 기타 루시퍼(1) 용주는 우리를 청계천 악기사가 모여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우리나라에 단 한 대뿐인 기타를 찾기 위해서라고 했다. 우리는 악기사를 차례로 돌며 용주가 설명한 디자인과 비슷한 기타를 찾기 위해 꼼꼼하게 뒤졌지만 끝내 만날 수 없었다. 악기사의 주인들은 그런 기타가 존재할 리 없다며 어이없어 하거나, 애들의 쓸데없는 호기심 정도로 무시했다. 나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확신에 찬 용주의 말을 믿기로 했다.대부분의 악기사 전문가들은 한 대 뿐인 희귀한 기타 같은 건 프로 뮤지션이 된 다음 관
5장 귀국과 생업 11923년경성 커엉, 커엉.기적이 울렸다. 정식이 경성역을 빠져나왔다. 반년 만에 돌아왔다. 작별하는 사람과 상봉하는 사람으로 역 광장이 소란했다. 큰 가방을 들고 사람들 틈을 피해 앞으로 나아갔다.정식이 곡절 끝에 시모노세키 역 광장을 빠져나왔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조선인 청년들이 부두에 모여 있다가 의심쩍어 역으로 몰려온 덕분이었다. 멀찍이서 딴 짓만 하던 경찰은 그때에야 비로소 다가와 말리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칼을 휘두르는 일본놈을 폭행한 조선인 청년만 잡아갔다. 정식은 승선한 뒤 피투성이가 된 일본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5장 거울로 가득한 방(1) 방에 들어오자마자 불도 켜지 않고 우두커니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모든 게 사라져 버린 어둠 속에서 빗소리만 존재를 드러냈다. 처음으로 진지하게 외부의 ‘소리’라는 것에 집중했다. 어떤 것에든 소리라는 것이 존재했고, 그 소리는 각자의 고유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인의 기타가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어떻게 그토록 멀쩡할 수가 있을까. 17년 전 잃어버린 기타를 이런 엉뚱한 장소, 엉뚱한 시간에서 마주칠 줄이야.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4장 쉼표(2) “잠깐이라도 앉아서 보세요.”여자가 의자를 가리켰다. 나는 고개만 끄덕하고 계속 서서 책을 읽어나갔다. 그가 들려주는 록 인생은 충분히 매혹적이어서 비에 젖듯 속수무책 빠져들었다. 어린 시절 전설의 뮤지션들의 삶을 새롭게 각색해서 생생하게 들려주던 용주가 떠올랐다. 용주는 그 시절 뮤지션들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들은 어떻게 다 알게 된 걸까. 용주를 떠올리며 책장을 넘겼다. 내 입에서는 연신 감탄사가 뿜어져 나왔다. 기타의 여러 모양을 본뜬 텍스트 디자인이나 간혹 등장하는 핸드릭스의 공연 장면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4장 쉼표(1) 잠결 내내 기타 긁는 소리를 들었다.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어 새벽에 소주 한 병을 마시고 겨우 잠이 들었다. 결심은 자꾸 흔들렸고 또 하루를 보냈다는 자책은 깊어졌다. 꿈인지 현실인지 기타 긁는 소리가 신경을 거슬리게 했지만 극심한 자책감을 가라앉히는 효과를 주었다. 벌써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그제야 벌떡 일어나 모텔을 빠져나왔다. 근처 편의점에서 컵라면으로 허기를 채웠다. 그런 뒤 레트로 가든 쪽으로 걸었다. 노인의 기타를 꼭 확인하고 싶었다. 노인은 또 어딜 간 건지 레트로 가든은 어
4장배제고보 시절과 도일 16 열린 창문으로 소슬한 가을바람이 불어 왔다. 정식이 짐 꾸리기를 마무리하고 한숨을 돌렸다. 가족들의 선물은 돈도 없고 경황도 없어 준비하지 못했다. 다만 며칠 전 학원에 가는 도중 노점에서 아버지의 점퍼와 혁대를 매는 바지나마 하나씩 산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복 바지를 엉덩이에 걸치고 다니는 것이 마음에 걸렸었다. 땅거미가 진 뒤에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배찬경에게 찾아가 작별인사도 건넸다. 다른 이들에게는 인사를 생략하기로 했다. 내일 아침 도쿄역에서 열차를 타고 시모노세키(下關)까지 가서 관부연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3장 수상한 밥집(2) 마침 출입문이 열렸고 중년으로 보이는 여자 손님이 들어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식당남자가 인사를 하며 다가가자 여자는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치즈라면을 시켰다. 남자는 주방으로 들어갔고 여자는 고개를 숙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우울이 짙게 밴 몸짓이었다. 나 역시 꼼짝하지 않고 여자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내가 앉은 탁자와 여자가 앉은 탁자 사이로 음악이 출렁거렸다. 구부정하게 움츠린 여자의 등이 신경 쓰였다. 정물화 속에 뛰어든 인물처럼 미동도 없이 앉아 있
4장배제고보 시절과 도일 13 바람이 살랑살랑 피부를 간질여 더위를 식혀 주는 회나무 그늘 속. 정식은 도미꼬, 배찬경과 함께 도시락을 가운데 두고 너럭바위 위에 둘러앉았다. 도심의 절 경내면서 많은 묘비들이 가까이 있다고는 하지만, 고즈넉한 숲속 분위기였다. 마침 공휴일이었다. 배찬경이 찾아왔다. 도미꼬의 어머니가 소풍을 권했고, 도시락을 준비했다. 정식이 학원에서 돌아오면 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꼴이 안쓰러웠는가 보았다. 정식은 공부도 공부려니와 나가면 쓰게 되는 돈을 벌충할 방법이 없었다. 군대 간 아들 또래라서일까? 도미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3장 수상한 밥집(1)모텔의 사내가 일러준 식당은 건물 모퉁이를 돌자 곧바로 나타났다. 분식 종류를 퓨전식으로 파는 곳이었다. 모던한 분위기가 메뉴와 잘 어울렸다. 식당은 4인용 탁자 한 개와 2인용 탁자 두 개로 이루어져 있었고 긴 탁자를 창가에 붙여 간이의자 네 개를 놓아 좁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구조였다. 한쪽 벽면을 모두 밥 말리의 공연사진으로 도배를 하여 천장에서 두 개의 조명을 쏘아 마치 밥 말리가 막 공연이라도 할 것 같은 착시효과를 주었다.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